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泉食 閔泳穆

Min YeongMok

  • 간찰

簡札

Letter

지본묵서
Ink on Paper

22.5×39.5㎝

(신사년(1881))

중앙 하단에 閔泳穆

우드락

추정가

  • KRW  200,000 ~ 500,000

응찰현황

* 마감시간 : 02. 05 - 03:25:00(PM)

남은시간

시작가

100,000 KRW

응찰단위

20,000 KRW

낙찰가 (총0회 응찰)

유찰

작가 소개

본관은 여흥(驪興). 자는 원경(遠卿), 호는 천식(泉食). 민달용(閔達鏞)의 아들로, 민태용(閔泰鏞)에게 입양되었다.
1871년(고종 8) 알성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1881년 이조판서로 승진했으며, 곧 이어 군무변정기연사당상(軍務邊情譏沿司堂上)과 한성부판윤에 올랐으며, 평안도관찰사도 역임하였다. 1883년 독판교섭통상사무(督辦交涉通商事務)가 되어 전권대사로서 조영(朝英) 및 조독수호조약(朝獨修好條約)을 조인하였다. 또한, 그 해 1월 일본과 부산구설해저전선조관(釜山口設海底電線條款)을 체결하였고, 6월 조일통상장정(朝日通商章程) 및 해관세칙(海關細則)·일본인어채범죄조규(日本人漁採犯罪條規)·조선국간행리정약조(朝鮮國間行里程約條) 등을 조인하였다. 그리고 8월 인천일본조계조약을 체결하였다. 1872년 서장관(書狀官)으로 청나라에 다녀온 뒤 개화주의자인 박규수(朴珪壽) 등과 같이 서양의 기술 도입과 개국통상의 유용성을 강조하였다. 1882년의 임오군란 때 변장 도주한 명성황후(明成皇后)의 장례를 치를 때 이회정(李會正)·정범조(鄭範朝)와 함께 국장도감제조(國葬都監提調)로 임명되기도 하였다.
박문국당상(博文局堂上)이 되어 박영효(朴泳孝)·유길준(兪吉濬)·김윤식(金允植)·김만식(金晩植) 등과 같이 1883년 10월 30일 우리 나라 최초의 신문인 『한성순보(漢城旬報)』를 발간하였다. 그러나 민태호(閔台鎬)·민영익(閔泳翊) 및 민응식(閔應植)과 함께 이른바 사민체제(四閔體制)를 구축, 권력의 핵심인물로 부각되었다. 이로 인해 1884년 12월 갑신정변 때 병조판서로 김옥균(金玉均) 등 개화당 인사들에 의해 조영하(趙寧夏)·민태호 등 수구당 요인과 경우궁(景祐宮)으로 입궐하다가 참살당하였다.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문충(文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