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脩石 鄭基善

Jeong GiSeon

  • 간찰

簡札

Letter

지본묵서
Ink on Paper

34.5×45㎝

(정축년(1817))

우측 하단에 鄭基善

배접

추정가

  • KRW  400,000 ~ 800,000

응찰현황

* 마감시간 : 07. 21 - 04:00:00(PM)

남은시간

시작가

200,000 KRW

응찰단위

20,000 KRW

낙찰가 (총0회 응찰)

유찰

작가 소개

본관은 동래(東萊). 자는 원백(元伯). 호는 수석(脩石). 한양 출신. 정치검(鄭致儉)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정동윤(鄭東倫)이고, 아버지는 정지용(鄭持容)이며, 어머니는 이창중(李昌中)의 딸이다.
1812년(순조 12) 생원으로 정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1815년(순조 15) 다시 한림소시(翰林召試)에 선발된 뒤 함경도암행어사로 발탁되어 문란한 지방행정을 바로잡기 위하여 활약하였다. 예를 들면 영흥부의 부사였던 엄기(嚴耆) 등의 잘못을 적발하여 논죄하는 한편, 각 고을 창고에 보관하고 있는 곡식과 장부를 조사하여 허류(虛留) 등 부정행위를 단속하고, 아울러 제진(諸鎭)의 봉수대와 목장 및 일로(馹路)의 폐단을 제거하도록 하였다.
1817년(순조 17) 홍문록에서 4점을 얻은 뒤 직각·검상·이조참의 등을 지내고 부제학을 거쳐, 1827년(순조 27)에는 경상도관찰사가 되어 왜관소통사(倭館小通事) 배말돈(裵末敦)이 왜인들로부터 피해를 당한 것을 계기로 하여 동래부사와 부산첨사를 문책하는 한편, 왜인들을 방어하는 대책을 수립함과 아울러 국가에서도 강경책을 쓰도록 건의하여 이를 성사시켰다.
이듬해 그는 경상도관찰사로서 도내에 극심한 재해를 극복하기 위하여 중앙에 구원을 요청하였는데 이때 왕은 특별히 내탕금(內帑金) 1만냥을 하사하였으므로 이것을 바탕으로 하여 기민(飢民)을 구제하는 데 성공하였다. 그 뒤 우부빈객(右副賓客)을 거쳐 1833년(순조 33)에는 드디어 예조판서에 올랐고 그 이듬해는 다시 대사헌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