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행중인 경매
- Online Auction
- 진행중인 경매
응찰현황
작가 소개
본관은 반남(潘南), 자는 계긍(季肯), 호는 서계(西溪)·잠수(潛叟)·서계초수(西溪樵叟)등 이다. 이조 참판 박정(朴炡)과 관찰사 윤안국(尹安國)의 딸인 양주 윤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조선 후기의 학자로 남원에서 태어났다. 현종 1년(1660) 증광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성균관 전적을 시작으로 예조좌랑·병조좌랑·정언·홍문관 교리 겸 경연시독관·북평사 등을 역임하였다. 1667년에 홍문관 수찬에 임명되었을 때는 응구언소(應求言疏)를 올려 신분제도의 모순에 따른 사대부들의 무위도식을 비판하고, 외교정책에 있어서는 실리주의 정책을 펼 것과 백성을 위한 법률의 혁신, 정치·사회제도의 개혁을 주장하였다. 1668년에는 이조좌랑에 임명되었으나 취임하지 않고 있다가 동지사의 서장관으로 청나라를 다녀온 후 당쟁에 혐오를 느껴 관료생활을 그만두고 양주(楊州) 석천동(石泉洞 : 지금의 도봉산 아래 다락원)으로 물러났다. 그뒤 숙종 23년(1697) 4월에 한성부판윤을 비롯하여 예조판서, 이조판서 등 수차례 관직이 주어졌지만 모두 부임하지 않고 오로지 학문 연구와 제자 양성에만 주력하였다.
그가 생존했던 시기는 송시열(宋時烈)을 축으로 한 노론계(老論系)가 정국을 주도하였고 있었기 때문에 반주자학적(反朱子學的) 입장에 섰던 그로서는 정치적으로 많은 제약을 받았다. 예를 들면 병자호란 당시 송시열이 청태종공덕비문을 지은 이경석(李景奭)을 비판한 것에 대해 1702년 이경석의 신도비명(神道碑銘)을 찬술하면서 송시열이 이경석을 비판한 것은 잘못된 일이라고 하여 노론의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또한 조선의 성리학이 중국 중심적 학문 태도를 보이는 것에 회의적이었다. 1703년에는 《사변록(思辨錄)》을 저술하여 주자학을 비판하고 독자적 견해를 밝혀 노론에게서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몰렸다. 박세당은 관작을 삭탈당하고 옥과(玉果)로 유배형을 받았으나, 이인엽(李寅燁)의 상소로 유배형이 집행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곧 7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가 죽으면서 아들에게 “장례를 지낸 후에 아침 저녁으로 올리는 상식(上食)을 설치하지 말라”고 유언하였다. 이 말은 조선후기 성리학자들의 행동양식 표준으로 인식되어 오던 예론(禮論)의 근간을 흔드는 것으로서 당시 정치세력에게 커다란 파문을 일으켰다. 이와 같이 그는 당대 조선조 유학을 지배하던 주자설(朱子說)의 절대화된 권위를 인정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다각적인 회의를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정주학적(程朱學的) 학풍과 사상이 강요되던 테두리에서 벗어나 실사구시적(實事求是的)인 태도로 고전의 본뜻을 찾아보고자 하였기 때문에 관념화된 성리학과는 근본적인 차이를 두고 있었다. 이러한 점에서 그의 사상은 이후 진보적인 학문을 촉진시키는데 선구적인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다.
그는 정치적으로 소론계(少論系)와 빈번하게 교류하면서, 소론의 거두인 윤증(尹拯)을 비롯하여 박세채(朴世采), 처숙부 남이성(南二星), 처남 남구만(南九萬), 최석정(崔錫鼎) 등과 교유하였다. 그리고 우참찬 이덕수(李德壽), 함경 감사 이탄(李坦), 좌의정 조태억(趙泰億) 등을 비롯한 제자를 길렀다.
그가 죽은지 얼마 지나지 않아 신원(伸老)되었으나 20년이 지난 1722년(경종 2)에 문절(文節)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현재 경기도 의정부시 장암동 수락산(水落山) 중턱 석림사(石林寺) 옆에 그의 묘소가 있다. 저서로는 《서계선생집(西溪先生集)》, 《사변록(思辨錄)》, 《신주도덕경(新註道德經)》 1책 및 《남화경주해산보(南華經註解刪補)》 6책과 농서인 《색경(穡經)》이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