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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산 이은상 鷺山 李殷相Lee EunSang
1903 ~ 1982
근대·현대
작가약력
- 1903∼1982. 시조작가·사학자.
작가 소개
본관은 전주(全州). 호는 노산(鷺山), 필명은 남천(南川)·강산유인(江山遊人)·두우성(斗牛星). 경상남도 마산 출신. 이승규(李承奎)의 둘째 아들이다.
1918년 아버지가 설립한 마산 창신학교(昌信學校) 고등과를 졸업하고, 1923년 연희전문학교 문과에서 수업하다가 1925∼1927년에 일본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 사학부에서 청강하였다.
1931년·1932년 이화여자전문학교 교수를 비롯하여, 동아일보사 기자, 『신가정(新家庭)』 편집인, 조선일보사 출판국 주간 등을 역임하였다. 1942년 조선어학회사건에 연루되어 홍원 경찰서와 함흥 형무소에 구금되었다가 이듬해 기소유예로 석방되었다.
1945년 사상범 예비검속으로 광양 경찰서에 유치 중에 광복과 함께 풀려났다. 광복 후 이충무공기념사업회 이사장, 안중근의사숭모회장, 민족문화협회장, 독립운동사 편찬위원장, 세종대왕기념사업회 이사, 문화보호협회 이사 등을 역임하였다.
1921년 두우성이라는 필명으로 『아성(我聲)』(4호)에 「혈조(血潮)」라는 시를 발표한 바 있으나, 본격적인 문학 활동은 1924년 『조선문단』의 창간 무렵부터였다. 그는 이 잡지를 통하여 평론·수필·시 들을 다수 발표하였는데, 그의 본령이라 할 수 있는 국학이나 시조는 거의 등한시하고, 서구의 자유시 쪽에 기울어 있었다. 이 무렵에 발표한 자유시는 30편을 헤아리고 있는 데 비하여 시조는 단 한편에 불과하였다.
또, 평론부문에서도 1925년『조선문단』에 게재된 「시인 휘트만론」·「테니슨의 사세시」·「영시사강좌(英詩史講座)」·「예술적 이념의 본연성」(1926.6.)이나 『동아일보』에 발표한 「아관남구문학(我觀南歐文學)」(1925.1.30.∼2.23.) 등의 제목들이 그간의 사정을 말해준다. 그러다가 1926년 후반에 이르러 시조부흥 논의가 본격화되면서 시조를 비롯한 전통문학과 국학쪽으로 기울기 시작하였다.
시가 분야에서는 1929∼1930년에 민요조의 리듬을 살린 「새타령」·「매화동(賣花童)」·「조선의 꽃」·「말몰이」·「님 향한 생각이야」·「남산에 올라」·「말노래」 등을 발표하였다.
평론분야에서도 같은 시기에 「청상(靑孀)민요 소고」·「이언(俚諺)의 의의 및 그 형식에 관하여」·「특수 이언과 공통 이언」·「풍수(風水)를 믿던 이들」·「문학상으로 본 조선의 어희(語戱)」·「황진이의 일생과 예술」 등을 발표하였다.
그는 시조는 문학이 아니라고 낮추어 생각하였다가 시조 논의가 일어나자 비로소 시조를 문학시하게 되었다고 술회한 바 있으나, 한동안 자유시와 시조의 창작을 병행하다가 1930년대 후반부터 시조인으로서의 자리를 굳혔다. 그는 시조를 쓰는 한편, 당시(唐詩)를 시조형식으로 번역하기도 하고 시조에 관한 이론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동아일보』에 발표한 「시조 문제」(1927.4.30.∼5.4.)·「시조 단형추의(短型芻議)」(1928.4.18.∼25.)·「시조 창작문제」(1932.3.30.∼4.9.) 등의 논고를 통하여 자수로써가 아니라 음수율로써 시조의 정형성을 구명하려 시도하였다. 1932년에 나온 그의 첫 개인 시조집인 『노산시조집(鷺山時調集)』은 향수·감상·무상·자연예찬 등의 특질로 집약된다.
이 중 「고향생각」·「가고파」·「성불사의 밤」 등은 시조의 평이하고 감미로운 서정성이 가곡에 걸맞아 노래로서 인구에 회자되고 있다. 광복 후 그의 시조는 국토예찬, 조국분단의 아픔, 통일에 대한 염원, 우국지사들에 대한 추모 등 개인적 정서보다는 사회성을 보다 강조하는 방향으로 기울어갔다.
이러한 작품들은 시조집 『노산시조선집』(1958)을 비롯하여, 특히 『푸른 하늘의 뜻은』(1970)과 마지막 작품집인 『기원 祈願』에서 절정을 이루었다. 그의 시조는 대체로 평이하고 기발한 표현으로 독자에게 친근감을 주고 있다.
그는 한때 주요한(朱耀翰)에 이어 두 번째로 양장시조(兩章時調)를 시험하여, 시조의 단형화를 시도한 바도 있으나 말기에 이르러서는 오히려 음수가 많이 늘어나는 경향을 띠었다.
사학가이자 수필가이기도 한 그는 해박한 역사적 지식과 유려한 문장으로 국토순례기행문과 선열의 전기를 많이 써서 애국사상을 고취하는 데 힘썼다. 광복 후에 문학보다는 사회사업에 더 많이 진력하였다.
그 밖에 저서로는 시문집으로 『노산문선(鷺山文選)』·『노산시문선』 등과 수필집으로 『무상(無常)』, 사화집으로 『조선사화집(朝鮮史話集)』과 기행문집 등이 있고, 전기로는 『탐라기행한라산(耽羅紀行漢拏山)』·『피어린 육백리』·『이충무공일대기(李忠武公一代記)』 등 100여 권의 저서를 남겼다.
1918년 아버지가 설립한 마산 창신학교(昌信學校) 고등과를 졸업하고, 1923년 연희전문학교 문과에서 수업하다가 1925∼1927년에 일본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 사학부에서 청강하였다.
1931년·1932년 이화여자전문학교 교수를 비롯하여, 동아일보사 기자, 『신가정(新家庭)』 편집인, 조선일보사 출판국 주간 등을 역임하였다. 1942년 조선어학회사건에 연루되어 홍원 경찰서와 함흥 형무소에 구금되었다가 이듬해 기소유예로 석방되었다.
1945년 사상범 예비검속으로 광양 경찰서에 유치 중에 광복과 함께 풀려났다. 광복 후 이충무공기념사업회 이사장, 안중근의사숭모회장, 민족문화협회장, 독립운동사 편찬위원장, 세종대왕기념사업회 이사, 문화보호협회 이사 등을 역임하였다.
1921년 두우성이라는 필명으로 『아성(我聲)』(4호)에 「혈조(血潮)」라는 시를 발표한 바 있으나, 본격적인 문학 활동은 1924년 『조선문단』의 창간 무렵부터였다. 그는 이 잡지를 통하여 평론·수필·시 들을 다수 발표하였는데, 그의 본령이라 할 수 있는 국학이나 시조는 거의 등한시하고, 서구의 자유시 쪽에 기울어 있었다. 이 무렵에 발표한 자유시는 30편을 헤아리고 있는 데 비하여 시조는 단 한편에 불과하였다.
또, 평론부문에서도 1925년『조선문단』에 게재된 「시인 휘트만론」·「테니슨의 사세시」·「영시사강좌(英詩史講座)」·「예술적 이념의 본연성」(1926.6.)이나 『동아일보』에 발표한 「아관남구문학(我觀南歐文學)」(1925.1.30.∼2.23.) 등의 제목들이 그간의 사정을 말해준다. 그러다가 1926년 후반에 이르러 시조부흥 논의가 본격화되면서 시조를 비롯한 전통문학과 국학쪽으로 기울기 시작하였다.
시가 분야에서는 1929∼1930년에 민요조의 리듬을 살린 「새타령」·「매화동(賣花童)」·「조선의 꽃」·「말몰이」·「님 향한 생각이야」·「남산에 올라」·「말노래」 등을 발표하였다.
평론분야에서도 같은 시기에 「청상(靑孀)민요 소고」·「이언(俚諺)의 의의 및 그 형식에 관하여」·「특수 이언과 공통 이언」·「풍수(風水)를 믿던 이들」·「문학상으로 본 조선의 어희(語戱)」·「황진이의 일생과 예술」 등을 발표하였다.
그는 시조는 문학이 아니라고 낮추어 생각하였다가 시조 논의가 일어나자 비로소 시조를 문학시하게 되었다고 술회한 바 있으나, 한동안 자유시와 시조의 창작을 병행하다가 1930년대 후반부터 시조인으로서의 자리를 굳혔다. 그는 시조를 쓰는 한편, 당시(唐詩)를 시조형식으로 번역하기도 하고 시조에 관한 이론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동아일보』에 발표한 「시조 문제」(1927.4.30.∼5.4.)·「시조 단형추의(短型芻議)」(1928.4.18.∼25.)·「시조 창작문제」(1932.3.30.∼4.9.) 등의 논고를 통하여 자수로써가 아니라 음수율로써 시조의 정형성을 구명하려 시도하였다. 1932년에 나온 그의 첫 개인 시조집인 『노산시조집(鷺山時調集)』은 향수·감상·무상·자연예찬 등의 특질로 집약된다.
이 중 「고향생각」·「가고파」·「성불사의 밤」 등은 시조의 평이하고 감미로운 서정성이 가곡에 걸맞아 노래로서 인구에 회자되고 있다. 광복 후 그의 시조는 국토예찬, 조국분단의 아픔, 통일에 대한 염원, 우국지사들에 대한 추모 등 개인적 정서보다는 사회성을 보다 강조하는 방향으로 기울어갔다.
이러한 작품들은 시조집 『노산시조선집』(1958)을 비롯하여, 특히 『푸른 하늘의 뜻은』(1970)과 마지막 작품집인 『기원 祈願』에서 절정을 이루었다. 그의 시조는 대체로 평이하고 기발한 표현으로 독자에게 친근감을 주고 있다.
그는 한때 주요한(朱耀翰)에 이어 두 번째로 양장시조(兩章時調)를 시험하여, 시조의 단형화를 시도한 바도 있으나 말기에 이르러서는 오히려 음수가 많이 늘어나는 경향을 띠었다.
사학가이자 수필가이기도 한 그는 해박한 역사적 지식과 유려한 문장으로 국토순례기행문과 선열의 전기를 많이 써서 애국사상을 고취하는 데 힘썼다. 광복 후에 문학보다는 사회사업에 더 많이 진력하였다.
그 밖에 저서로는 시문집으로 『노산문선(鷺山文選)』·『노산시문선』 등과 수필집으로 『무상(無常)』, 사화집으로 『조선사화집(朝鮮史話集)』과 기행문집 등이 있고, 전기로는 『탐라기행한라산(耽羅紀行漢拏山)』·『피어린 육백리』·『이충무공일대기(李忠武公一代記)』 등 100여 권의 저서를 남겼다.
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