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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당 이완용 一堂 李完用Lee WanYong
1858 ~ 1926
조선·근대
작가약력
- 1858(철종 9)∼1926. 조선 말기의 문신.
작가 소개
본관은 우봉(牛峰). 자는 경덕(敬德), 호는 일당(一堂). 경기도 광주 출신. 아버지는 이석준(李奭俊)이며, 판중추부사 이호준(李鎬俊)의 양자로 들어갔다.
1882년(고종 19) 증광별시에 병과로 급제, 승지·주서가 되었다. 규장각대교·검교·홍문관수찬·동학교수·우영군사직·의정부검상·해방영군사마(海防營軍司馬)를 역임하고, 1886년 육영공원(育英公院)의 학원(學員)으로 들어가 영어와 신학문을 배웠다.
1887년 주미특파전권공사 박정양(朴定陽)을 따라 미국으로 갔다가, 이듬해 5월 병으로 귀국하여 승정원동부승지·이조참의·외무참의·전보국회판(電報局會辦) 등을 지냈다. 이해 다시 주차미국참찬관(駐箚美國參贊官)으로 미국으로 갔으며, 12월 대리공사로 승진하고 1890년 돌아와 구미파(歐美派)로 알려졌다.
그 뒤 내부참의·성균관대사성·형조참판·동지의금부사·동지성균관사·동지춘추관사·전환국총판·육영공원판리·교환서총판 등을 거쳐, 1894년 김홍집(金弘集)내각의 외무협판이 되었다. 이듬해 5월 박정양내각에서 학부대신과 중추원의관으로 기용되었으며, 그 뒤 김홍집내각에서도 학부대신을 지냈다.
1895년 명성황후시해사건 후 학부대신에서 물러나 미국공사관 서기관 알렌(Allen, H. N., 安連)의 주선으로 미국공사관으로 피신하였다. 1896년 이범진(李範晉) 등과 고종을 러시아공사관으로 파천시킨 공로로 박정양내각의 외부대신 겸 학부대신에 취임하고 농상공부대신 임시서리까지 겸하였다. 독립협회에도 한때 관여하였으나 외부대신으로 있으면서 각종 이권을 열강에게 넘겨준 책임을 물어 제명되었다.
1897년 고종이 러시아공사관에서 돌아와 대한제국이 수립되자, 친러파로 몰려 평안남도 관찰사·전라북도 관찰사 등 외관으로 전전하였다. 그러다가 1901년 한직인 궁내부 특진관이 되어 내직으로 돌아왔다.
1905년 학부대신으로 있으면서 일본특파대사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로부터 조약체결의 제의를 받고, 일본군 무력시위를 이용하여 어전회의를 열고 고종을 협박, 조약을 체결하게 함으로써 을사5적신이 되었다.
강제로 조약을 체결하는 데 앞장섰다 하여 의정대신임시서리 및 외부대신서리까지 겸하였다. 1907년 의정부 참정대신으로 농상공부대신서리·광산사무국총재까지 겸하였다. 이해 6월 이른바 내각관제가 공포되자, 내각총리대신으로 매국 내각의 수반이 되었으며, 궁내부대신서리를 겸하였다.
1907년 7월 헤이그특사사건을 빌미로 초대통감 이토의 사주를 받아 고종의 퇴위를 강요하였다. 그리고 순종이 즉위한 뒤, 정미7조약 체결에 관여하여 내정권을 박탈당하게 함으로써 정미7적이 되었다.
또한 그해 8월 10일 군대해산에 앞장서 동조하는 등 이러한 일련의 친일행적으로 일본정부로부터 욱일동화장(旭日桐花章)을 받았다. 1909년 12월 이재명(李在明)의 칼을 맞았는데 목숨은 건졌다.
1910년 8월 22일 어전회의를 열어 합병안을 가결시키는 동시에 한일양국병합전권위원(韓日兩國倂合全權委員)이 되어 통감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를 관사로 찾아가 합병조약을 체결하였다. 그리고 같은 달 29일 나라를 일제에게 넘겨주고 말았다. 조약 체결 뒤 공식적으로는 백작의 작위와 잔무처리수당 60여 원 및 퇴직금 1,458원 33전을 받았다.
일제강점기에도 조선총독부 중추원고문을 비롯하여 중추원 부의장·조선귀족원 회원·농사장려회 회장·조선물산공진협찬회 명예회원·일본제국군인후원회 조선지부 평의원·조선귀족회 부회장 등을 지냈다. 그리고 소위 ‘일선(日鮮)의 융화’를 내세우며, 한국 황족과 일본 황족간의 혼인을 권장하는 이른바 동화정책에도 앞장섰다.
1919년 3·1운동 때는 독립투쟁을 비난하며 3차에 걸쳐 경고문을 발표하였다. 이듬해 후작이 되고, 농림주식회사고문·교육조사위원·총독부산업조사위원·조선미술전람회심사원·조선사편찬위원회고문·조선농업교육연구회고문·선만노몽연구협회고문 등의 명예직을 겸하며 끝까지 일제에 기생하였다. 전라북도 익산에 묻혔으며, 정치행적과는 달리 당대의 명필이었다.
편서로는 『황후폐하치사문(皇后陛下致詞文)』이 있다.
1882년(고종 19) 증광별시에 병과로 급제, 승지·주서가 되었다. 규장각대교·검교·홍문관수찬·동학교수·우영군사직·의정부검상·해방영군사마(海防營軍司馬)를 역임하고, 1886년 육영공원(育英公院)의 학원(學員)으로 들어가 영어와 신학문을 배웠다.
1887년 주미특파전권공사 박정양(朴定陽)을 따라 미국으로 갔다가, 이듬해 5월 병으로 귀국하여 승정원동부승지·이조참의·외무참의·전보국회판(電報局會辦) 등을 지냈다. 이해 다시 주차미국참찬관(駐箚美國參贊官)으로 미국으로 갔으며, 12월 대리공사로 승진하고 1890년 돌아와 구미파(歐美派)로 알려졌다.
그 뒤 내부참의·성균관대사성·형조참판·동지의금부사·동지성균관사·동지춘추관사·전환국총판·육영공원판리·교환서총판 등을 거쳐, 1894년 김홍집(金弘集)내각의 외무협판이 되었다. 이듬해 5월 박정양내각에서 학부대신과 중추원의관으로 기용되었으며, 그 뒤 김홍집내각에서도 학부대신을 지냈다.
1895년 명성황후시해사건 후 학부대신에서 물러나 미국공사관 서기관 알렌(Allen, H. N., 安連)의 주선으로 미국공사관으로 피신하였다. 1896년 이범진(李範晉) 등과 고종을 러시아공사관으로 파천시킨 공로로 박정양내각의 외부대신 겸 학부대신에 취임하고 농상공부대신 임시서리까지 겸하였다. 독립협회에도 한때 관여하였으나 외부대신으로 있으면서 각종 이권을 열강에게 넘겨준 책임을 물어 제명되었다.
1897년 고종이 러시아공사관에서 돌아와 대한제국이 수립되자, 친러파로 몰려 평안남도 관찰사·전라북도 관찰사 등 외관으로 전전하였다. 그러다가 1901년 한직인 궁내부 특진관이 되어 내직으로 돌아왔다.
1905년 학부대신으로 있으면서 일본특파대사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로부터 조약체결의 제의를 받고, 일본군 무력시위를 이용하여 어전회의를 열고 고종을 협박, 조약을 체결하게 함으로써 을사5적신이 되었다.
강제로 조약을 체결하는 데 앞장섰다 하여 의정대신임시서리 및 외부대신서리까지 겸하였다. 1907년 의정부 참정대신으로 농상공부대신서리·광산사무국총재까지 겸하였다. 이해 6월 이른바 내각관제가 공포되자, 내각총리대신으로 매국 내각의 수반이 되었으며, 궁내부대신서리를 겸하였다.
1907년 7월 헤이그특사사건을 빌미로 초대통감 이토의 사주를 받아 고종의 퇴위를 강요하였다. 그리고 순종이 즉위한 뒤, 정미7조약 체결에 관여하여 내정권을 박탈당하게 함으로써 정미7적이 되었다.
또한 그해 8월 10일 군대해산에 앞장서 동조하는 등 이러한 일련의 친일행적으로 일본정부로부터 욱일동화장(旭日桐花章)을 받았다. 1909년 12월 이재명(李在明)의 칼을 맞았는데 목숨은 건졌다.
1910년 8월 22일 어전회의를 열어 합병안을 가결시키는 동시에 한일양국병합전권위원(韓日兩國倂合全權委員)이 되어 통감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를 관사로 찾아가 합병조약을 체결하였다. 그리고 같은 달 29일 나라를 일제에게 넘겨주고 말았다. 조약 체결 뒤 공식적으로는 백작의 작위와 잔무처리수당 60여 원 및 퇴직금 1,458원 33전을 받았다.
일제강점기에도 조선총독부 중추원고문을 비롯하여 중추원 부의장·조선귀족원 회원·농사장려회 회장·조선물산공진협찬회 명예회원·일본제국군인후원회 조선지부 평의원·조선귀족회 부회장 등을 지냈다. 그리고 소위 ‘일선(日鮮)의 융화’를 내세우며, 한국 황족과 일본 황족간의 혼인을 권장하는 이른바 동화정책에도 앞장섰다.
1919년 3·1운동 때는 독립투쟁을 비난하며 3차에 걸쳐 경고문을 발표하였다. 이듬해 후작이 되고, 농림주식회사고문·교육조사위원·총독부산업조사위원·조선미술전람회심사원·조선사편찬위원회고문·조선농업교육연구회고문·선만노몽연구협회고문 등의 명예직을 겸하며 끝까지 일제에 기생하였다. 전라북도 익산에 묻혔으며, 정치행적과는 달리 당대의 명필이었다.
편서로는 『황후폐하치사문(皇后陛下致詞文)』이 있다.
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