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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여 김광업 雲如 金廣業Kim KwangEop
1906 ~ 1976
한국
서예
작가약력
- 부산 지역에서 활동하며 한국 현대 서예의 터전을 일군 서예가·전각가이자 안과 의사.
작가 소개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수덕(樹德), 호는 운여(雲如). 1906년 2월 15일 평안남도 평양시 오청리 63번지에서 아버지 김영필(金永弼)과 어머니 양제현(楊薺賢) 사이에서 5남 2녀 중 큰아들로 태어났다. 김영필은 일제 강점기 평안남도 강동, 중화, 성천 등지에서 군수(郡守)를 지냈다. 대한민국 현대 건축의 거장인 김중업(金重業)[1922~1988]이 동생이다. 자녀로 김희경, 김희순, 김희춘, 김희철이 있다.
1920년 평양공립보통학교를 마친 후 상경하여 1927년 3월 경성의학전문학교[서울대학교 의과대학 전신]를 졸업하였다. 1928년 경성대학병원에서 의원으로 근무하다 고향인 평양으로 귀향하였다. 1937년 6월 28일 수양동우회 사건에 연루되어 경찰에 체포되었다. 1945년 해방 직전까지 평양에서 대명안과의원(大明眼科醫院)을 운영하고, 1945년 교통중앙병원 안과 과장을 지냈다. 1951년 1·4 후퇴 때 평양에 부인과 아들 넷을 남겨 두고 자녀 넷[3남 1녀]을 데리고 남하하여, 대구동산병원에서 안과 의사로 재직하다가 1954년 부산시 광복동에 대명안과를 개원하였다.
이듬해인 1955년에 부산시 최초의 서예 학원인 동명서화원(東明書畵院)을 개설하여 부산 서예 발전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이후 오제봉(吳濟峯), 석정(石鼎), 석도윤(石度輪), 김홍경(金弘經), 안광석(安光碩), 이만우(李晩雨), 양진이(楊鎭尼), 변관식(卞寬植), 배재식(裵在植), 권손(權巽) 등 부산·대구 지역 서화 작가와 고승 대덕(高僧大德) 및 지식인들과 교류하며 후진 양성에 힘썼다.
1958년 9월에서 1960년 9월까지 경상남도 미술대전 서예 심사 위원, 1965년 6월 대한민국 국민 미술전 서예 심사 위원장을 역임하였다. 사회 활동에도 힘을 쏟아 1962년 5월 사단법인 한국미술협회 부산지부장을 지냈고, 1963년 10월 흥사단(興士團) 부산지부가 창립되자 초대 지부장에 이어 1968년까지 제2~5대 지부장을 지냈다. 1965년 11월 복음신문사 부산분회장, 1966년 10월 부산시민회관건립추진위원회 위원을 역임하였다. 1965년 8월 국제서예인연합 한국이사회 상임 위원, 1966년 2월 한국서예가협회 위원으로 활동하였다.
1969년 서울특별시 종로구 낙원동으로 이주한 후에도 1970년 흥사단 서울지부장, 영락교회 보건실장으로 활발하게 활동하였다. 1973년 4월 7일 미국 로스앤젤레스에 거주하는 아들의 초청으로 미국으로 건너간 후에도 흥사단 기금 마련을 위한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1974년 5월 21일부터 26일까지 신세계미술관에서 ‘운여 김광업 선생 작품전’을 개최하였다. 1974년 11월 제1회 ‘전각 협회전’을 개최하였다. 1976년 5월 8일 로스앤젤레스에서 새벽에 작품을 준비하다 사망하였다.
김광업은 서예·전각·회화 등에서 많은 작품을 남겼다. 서예는 금문(金文)·갑골문(甲骨文)·석각문자(石刻文字)·대전(大篆)·소전(小篆)·한인(漢印)·와전문(瓦塼文) 등 전서의 모든 영역을 작품화했는데, 특히 금문의 가치에 대한 통찰력과 창의력이 뛰어났다. 전각은 석인(石印)만을 인식하던 당시 서단의 흐름과는 달리 목인(木印)을 근본으로 작품을 만들었으며, 인문(印文)의 포치는 갑골문(甲骨文)·금문(金文)·소전(小篆)·진한인(秦漢印)·와당(瓦當)·봉니(封泥)·전폐(錢弊)·초형(肖形)·한글·영자(英字)·초서(草書)·예서(隷書)에 이르기까지 방대한 고전에서 응용한 다양한 인문(印文)과 장법을 드러내고 있다. 회화는 오랜 구상 끝에 그리기보다는 즉흥적으로 그린 것이 대부분으로 단순함과 담백함이 넘치며, 상업적 목적보다는 지인이나 후학을 위해 그린 경우가 많았다. 김광업의 작품들은 뚜렷한 개성으로 정통성에 의문이 있다는 평을 듣기도 하지만, 법고 창신(法古創新)의 신례로서 창의적 정신과 작품성으로 한국 현대 서예의 모태를 이루었다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1966년 제8회 눌원 문화상(訥園文化賞)을 수상하였다. 1976년 5월 12일 서울특별시 종로구 을지로 2가 대성빌딩 흥사단 본부 강당과 부산시 중구 영주1동 흥사단 부산지부에 빈소가 마련되었다. 장례는 5월 13일 로스앤젤레스에서 교포 사회장으로 치러졌다. 1976년 6월 15일 영락교회 봉사관에서 박조준 목사의 집례로 추도 예배가 열렸으며, 같은 해 12월 10일부터 17일까지 부산 광복동 희다방에서 오제봉·이만우·김용옥 등과 문하생 주최로 전시회가 열렸다.
1977년 4월 13일부터 19일까지 서울특별시 종로구 관훈동의 미술회관에서 안병욱, 배길기, 김충현, 유희강 등의 서예가들과 유족이 결성한 운여김광업선생유작발표준비위원회 주최로 두 번의 ‘운여 김광업 선생 유작전’이 개최되었다. 또 2003년 6월 20일부터 7월 13일까지 서울 예술의 전당과 통도사 성보박물관 주최로 ‘운여 김광업의 문·자·반·야(文·字·般·若)’ 전시가 열렸다.
1920년 평양공립보통학교를 마친 후 상경하여 1927년 3월 경성의학전문학교[서울대학교 의과대학 전신]를 졸업하였다. 1928년 경성대학병원에서 의원으로 근무하다 고향인 평양으로 귀향하였다. 1937년 6월 28일 수양동우회 사건에 연루되어 경찰에 체포되었다. 1945년 해방 직전까지 평양에서 대명안과의원(大明眼科醫院)을 운영하고, 1945년 교통중앙병원 안과 과장을 지냈다. 1951년 1·4 후퇴 때 평양에 부인과 아들 넷을 남겨 두고 자녀 넷[3남 1녀]을 데리고 남하하여, 대구동산병원에서 안과 의사로 재직하다가 1954년 부산시 광복동에 대명안과를 개원하였다.
이듬해인 1955년에 부산시 최초의 서예 학원인 동명서화원(東明書畵院)을 개설하여 부산 서예 발전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이후 오제봉(吳濟峯), 석정(石鼎), 석도윤(石度輪), 김홍경(金弘經), 안광석(安光碩), 이만우(李晩雨), 양진이(楊鎭尼), 변관식(卞寬植), 배재식(裵在植), 권손(權巽) 등 부산·대구 지역 서화 작가와 고승 대덕(高僧大德) 및 지식인들과 교류하며 후진 양성에 힘썼다.
1958년 9월에서 1960년 9월까지 경상남도 미술대전 서예 심사 위원, 1965년 6월 대한민국 국민 미술전 서예 심사 위원장을 역임하였다. 사회 활동에도 힘을 쏟아 1962년 5월 사단법인 한국미술협회 부산지부장을 지냈고, 1963년 10월 흥사단(興士團) 부산지부가 창립되자 초대 지부장에 이어 1968년까지 제2~5대 지부장을 지냈다. 1965년 11월 복음신문사 부산분회장, 1966년 10월 부산시민회관건립추진위원회 위원을 역임하였다. 1965년 8월 국제서예인연합 한국이사회 상임 위원, 1966년 2월 한국서예가협회 위원으로 활동하였다.
1969년 서울특별시 종로구 낙원동으로 이주한 후에도 1970년 흥사단 서울지부장, 영락교회 보건실장으로 활발하게 활동하였다. 1973년 4월 7일 미국 로스앤젤레스에 거주하는 아들의 초청으로 미국으로 건너간 후에도 흥사단 기금 마련을 위한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1974년 5월 21일부터 26일까지 신세계미술관에서 ‘운여 김광업 선생 작품전’을 개최하였다. 1974년 11월 제1회 ‘전각 협회전’을 개최하였다. 1976년 5월 8일 로스앤젤레스에서 새벽에 작품을 준비하다 사망하였다.
김광업은 서예·전각·회화 등에서 많은 작품을 남겼다. 서예는 금문(金文)·갑골문(甲骨文)·석각문자(石刻文字)·대전(大篆)·소전(小篆)·한인(漢印)·와전문(瓦塼文) 등 전서의 모든 영역을 작품화했는데, 특히 금문의 가치에 대한 통찰력과 창의력이 뛰어났다. 전각은 석인(石印)만을 인식하던 당시 서단의 흐름과는 달리 목인(木印)을 근본으로 작품을 만들었으며, 인문(印文)의 포치는 갑골문(甲骨文)·금문(金文)·소전(小篆)·진한인(秦漢印)·와당(瓦當)·봉니(封泥)·전폐(錢弊)·초형(肖形)·한글·영자(英字)·초서(草書)·예서(隷書)에 이르기까지 방대한 고전에서 응용한 다양한 인문(印文)과 장법을 드러내고 있다. 회화는 오랜 구상 끝에 그리기보다는 즉흥적으로 그린 것이 대부분으로 단순함과 담백함이 넘치며, 상업적 목적보다는 지인이나 후학을 위해 그린 경우가 많았다. 김광업의 작품들은 뚜렷한 개성으로 정통성에 의문이 있다는 평을 듣기도 하지만, 법고 창신(法古創新)의 신례로서 창의적 정신과 작품성으로 한국 현대 서예의 모태를 이루었다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1966년 제8회 눌원 문화상(訥園文化賞)을 수상하였다. 1976년 5월 12일 서울특별시 종로구 을지로 2가 대성빌딩 흥사단 본부 강당과 부산시 중구 영주1동 흥사단 부산지부에 빈소가 마련되었다. 장례는 5월 13일 로스앤젤레스에서 교포 사회장으로 치러졌다. 1976년 6월 15일 영락교회 봉사관에서 박조준 목사의 집례로 추도 예배가 열렸으며, 같은 해 12월 10일부터 17일까지 부산 광복동 희다방에서 오제봉·이만우·김용옥 등과 문하생 주최로 전시회가 열렸다.
1977년 4월 13일부터 19일까지 서울특별시 종로구 관훈동의 미술회관에서 안병욱, 배길기, 김충현, 유희강 등의 서예가들과 유족이 결성한 운여김광업선생유작발표준비위원회 주최로 두 번의 ‘운여 김광업 선생 유작전’이 개최되었다. 또 2003년 6월 20일부터 7월 13일까지 서울 예술의 전당과 통도사 성보박물관 주최로 ‘운여 김광업의 문·자·반·야(文·字·般·若)’ 전시가 열렸다.
출처/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한국학중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