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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당 이무호 草堂 李武鎬Lee MuHo
1948 ~
한국
서예
작가약력
- 세계문화예술발전중심회장
- 초당 태극서법연구원 초당서예원 원장
- 세계서법문화예술대전 운영위원장
- ㈔대한민국 미술대전 이사 운영, 심사
- 국회의원서도실장, 지도위원
- 대한민국 헌정회 서예지도교수
- 상해 복단대 객좌교수
- 북경대 연원배 서법대전 한국측 수임 회장
- 옥5관 문화훈장 서훈
작가 소개
초당 이무호는 1948년 경상북도 영덕군 칠보산 아래에서 4형제 중 막내로 태어났다. 사람보다는 산과 나무가 더 친근한 첩첩산골이었던 탓에 이무호는 어려서부터 자연을 벗 삼아 자연에 순응하며 그 진리를 자연스럽게 깨칠 수 있었다. 그는 한학에 조예가 깊었던 조부(이능환)로부터 서예를 자연스레 접했다. 조부는 항상 그의 앞에서 글을 읽고 쓰기를 즐겼고, 이무호는 어려서부터 그 영향을 받고 자랐다. 사실 그의 가문은 중국 당나라 때의 시인 이백(李白)의 직계다. 고려 때 중국에서 사신으로 온 선조가 고려 세자의 스승이 되면서 이곳에 뿌리를 내린 것이다. 결국 경제적인 이유로 중학교 입학은 포기하게 됐지만 서예에 대한 열정만은 포기할 수 없었던 이무호는 돈을 벌면서 서예를 배우겠다는 생각에 대구로 가 당시 퇴계 선생을 기념하는 백일장에 처음 출전해 좌절을 맛보게 된다. 그때 나이 16세로 이에 충격을 받은 이무호는 주경야독으로 밤을 지새우는 날이 많았고, 한번은 방에 불이 난 줄 모르고 잠에 취해있다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적도 있었다.
1972년 군복무를 마친 이무호는 상경해서는 전과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서예공부에 매진했다. 당시 연간 12만 장의 종이를 중국에서 주문, 하루에 100장씩 글씨를 써나갔다. 그런 그에게 깨달음의 기회가 찾아온 것은 1980년대 초 중국 서예계의 국부로 추앙받던 장대천 기념관(대만)을 방문하면서부터다. 그 당시만 해도 한국 서예계는 여러 계파가 있었고 그 곳에 속하지 않으면 활동할 수가 없었다. 이 점이 서예의 독창적인 발전을 저해하는 요소로 작용하고 있었지만 이무호는 그것을 대만 방문을 통해서 깨닫게 된다. 그 후로 그는 옛 법을 따르고 새로움을 창조한다는 ‘법고창신(法古創新)’을 실행에 옮기기 위해 중국과 우리나라의 법체를 모두 배워나가기 시작했다. 중국의 교본(법첩)과 해서와 행초서, 진·당 해서와 육조 해서, 그리고 문인화, 전각, 서각, 금문전서에 이르기까지 두루 섭렵했다. 그가 창안해 낸 ‘태극서법’도 바로 이런 기틀 위에 만들어지게 됐다. 이후 후학 양성을 위해 서울 성북구 동소문동에서 ‘초당서예한문학원’을 운영하고 있다.
1972년 군복무를 마친 이무호는 상경해서는 전과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서예공부에 매진했다. 당시 연간 12만 장의 종이를 중국에서 주문, 하루에 100장씩 글씨를 써나갔다. 그런 그에게 깨달음의 기회가 찾아온 것은 1980년대 초 중국 서예계의 국부로 추앙받던 장대천 기념관(대만)을 방문하면서부터다. 그 당시만 해도 한국 서예계는 여러 계파가 있었고 그 곳에 속하지 않으면 활동할 수가 없었다. 이 점이 서예의 독창적인 발전을 저해하는 요소로 작용하고 있었지만 이무호는 그것을 대만 방문을 통해서 깨닫게 된다. 그 후로 그는 옛 법을 따르고 새로움을 창조한다는 ‘법고창신(法古創新)’을 실행에 옮기기 위해 중국과 우리나라의 법체를 모두 배워나가기 시작했다. 중국의 교본(법첩)과 해서와 행초서, 진·당 해서와 육조 해서, 그리고 문인화, 전각, 서각, 금문전서에 이르기까지 두루 섭렵했다. 그가 창안해 낸 ‘태극서법’도 바로 이런 기틀 위에 만들어지게 됐다. 이후 후학 양성을 위해 서울 성북구 동소문동에서 ‘초당서예한문학원’을 운영하고 있다.
출처/천지일보, 영남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