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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타가와 토요쿠니 歌川 豊國Utagawa Toyokuni
1769 ~ 1825
일본
동양화·판화
작가약력
- 1769(메이와:明和 6년)~1825(분세이:文政 8년). 일본 에도 시대 말기에 활동한 우키요에(浮世絵) 화가.
작가 소개
우타가와 토요쿠니(歌川豊国)는 1769년에 에도(江戶) 미시마쵸(三島町)에서 태어나 우키요에(浮世繪)화가로 에도 시대 말기에 활동하였다. 토요쿠니의 아버지인 구라하시 고로헤(倉橋五郎兵衛)는 인형 제작자로 가부키 배우들의 얼굴과 닮은 인형을 조각하는데 능했다고 전해지는데, 토요쿠니가 뒷날 야쿠샤에(役者繪, 배우 그림)로 명성을 얻게 된 것도 성장기의 환경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어린 시절부터 토요쿠니가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하자 고로헤는 같은 동네에 살던 우키요에 화가인 우타가와 토요하루(歌川豊春)에게 아들을 맡겨 타고난 재주를 키워 주려 했다.
일본의 다른 전통 예능과 마찬가지로, 우키요에의 세계에서도 어린 입문자는 스승의 밑에 들어가면 자신의 성을 스승의 성으로 바꿨고, 스승은 제자들 중에서 가장 뛰어난 제자에게 자신의 이름 두 글자 중 한 글자를 물려주었다. 이를 ‘습명(襲名)’이라고 한다. 이에 토요쿠니는 스승 토요하루의 가장 뛰어난 제자로서 토요하루의 이름에서 ‘토요(豊)’라는 한 글자를 물려받았다.
우타가와 토요쿠니는 야쿠샤에와 미인화를 주로 그렸다. 특히 야쿠샤에는 당시 대중들에게 인기 있었던 가부키의 유명한 배우들의 새로온 배역을 알려주는 초상화로 에도뿐만 아니라 일본 전역의 극장 관람자들이 많이 찾는 그림이었다. 이에 야쿠샤에의 제작은 우키요에 화가들에겐 가장 큰 일거리였으며, 어떤 화가가 에도의 유명 극장에서 활약하던 주연배우를 잘 그려내는가가 화가로서의 성공과 맞물린 문제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토요쿠니는 에도의 대표적인 야쿠샤에 화가로 그 인기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였다.
가부키에서는 극이 진행되다가 감정이 고조되는 순간 정지 자세를 얼마간 취하게 되는데 이 자세를 ‘미에(見得)’라고 한다. 주연배우는 각자 대표적인 미에 자세를 갖고 있었다. 토요쿠니는 배우가 무대 위에서 가장 빛나는 순간인 미에 자세를 전신상으로 그렸다. 그 대표적인 예로 ‘고라이야(高麗屋)’와 ‘야마토야(大和屋)’는 배우의 무대 모습 그림이라는 뜻의 ‘야쿠샤 부타이노스가타에(役者舞臺之姿繪)’라는 시리즈에 속하는 작품이다.
이 작품을 계기로 토요쿠니는 최고의 야쿠샤에 화가가 되었다. 이러한 토요쿠니의 극중 긴장이 고조되는 순간을 잡아낸 미에를 그린 작품은 대중들의 구매욕을 불러일으켰을 것이다. ‘에도극장 3층(1800년)’ 또한 주목되는 작품인데, 토요쿠니는 닮은 얼굴 묘사가 양식화되어 있었던 당시 화풍을 한단계 업그레이드시켜 배우 개개인의 몸동작까지도 닮게 했다. 각 배우의 개성적인 모습과 더불어 삶의 맛이 짙은 화풍으로 우키요에 표현에 감정이입을 이루었다. 이처럼 야쿠샤에로 두각을 나타내었던 토요쿠니는 1797년경부터 야쿠샤에 외에 ‘가부키 극 배우들의 거울(Miroirs des acteurs de kabuki, 1804년)’와 같은 책자 형태의 그림 모음집인 배우 그림책 제작에도 진출하여 인기를 얻었다.
한편 우타가와 토요쿠니는 연극에 대한 정보전달을 목적으로 작품을 제작하기도 했다. 구체적으로 ‘이 쿄겐(狂言)은 금년 봄에 알 수 있습니다(1821년)’는 극장 예고편으로 출연자들의 모습을 미리 알리고 있다. 어느 때에 어떠한 연기 종목이 흥행할까 하는 점은 관객으로서는 알고 싶어 하는 주요 내용이므로, 그 연극을 출판물로 한 것이다. 관객 입장에서는 연극에 관한 주요 정보이기에 단기간에 대량으로 인쇄하고 배포된 작품이다.
그 밖에도 토요쿠니는 야쿠샤에를 그린 도슈사이 사라쿠(東洲斎写楽)가 10개월 남짓 활동하고 사라진 후에 샤라쿠식의 ‘3대 세가와 키쿠노조의 오쿠비에(三代目瀬川菊之丞の大首)’를 그리기도 했다. 1825년 1월 7일, 화가로서의 업적과 명예를 모두 성취한 토요쿠니는 많은 제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67년의 생애에 작별을 고했다.
에도 말기 우키요에 세계에서 패자로 군림한 일파는 우타가와파라 할 수 있을 만큼 우타가와 계파의 화풍이 인기를 얻게 되는데, 그 기초를 닦은 것이 우타가와 토요쿠니로 중요한 역할을 했다. 토요쿠니는1790년대 야쿠샤에 판도에서 도슈사이 샤라쿠, 카츠카와 수네이(勝川春英)와 더불어 자웅을 겨루었는데, 토요쿠니는 샤라쿠나 슌에이 화풍과는 다른 자신만의 개성을 살렸다. 토요쿠니는 지금까지 얼굴을 닮게 그리는 것이 양식화되어 있었던 당시 화풍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시켜 배우 개개인의 몸동작까지도 닮게 함으로써, 각 배우의 개성적인 모습을 추구하였다.
당시 야쿠샤에로 두각을 나타내었던 토요쿠니는 1797년경부터 야쿠샤에 외에 책자 형태의 그림 모음집인 배우 그림책 제작에도 진출하여 인기를 얻었다. 이처럼 토요쿠니는 야쿠샤에의 표현에 정감을 불어넣은 감정 이입으로 대중 취향을 확립해 나갔으며, 우타가와파의 기반을 닦은 우키요에 화가로 평가된다.
일본의 다른 전통 예능과 마찬가지로, 우키요에의 세계에서도 어린 입문자는 스승의 밑에 들어가면 자신의 성을 스승의 성으로 바꿨고, 스승은 제자들 중에서 가장 뛰어난 제자에게 자신의 이름 두 글자 중 한 글자를 물려주었다. 이를 ‘습명(襲名)’이라고 한다. 이에 토요쿠니는 스승 토요하루의 가장 뛰어난 제자로서 토요하루의 이름에서 ‘토요(豊)’라는 한 글자를 물려받았다.
우타가와 토요쿠니는 야쿠샤에와 미인화를 주로 그렸다. 특히 야쿠샤에는 당시 대중들에게 인기 있었던 가부키의 유명한 배우들의 새로온 배역을 알려주는 초상화로 에도뿐만 아니라 일본 전역의 극장 관람자들이 많이 찾는 그림이었다. 이에 야쿠샤에의 제작은 우키요에 화가들에겐 가장 큰 일거리였으며, 어떤 화가가 에도의 유명 극장에서 활약하던 주연배우를 잘 그려내는가가 화가로서의 성공과 맞물린 문제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토요쿠니는 에도의 대표적인 야쿠샤에 화가로 그 인기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였다.
가부키에서는 극이 진행되다가 감정이 고조되는 순간 정지 자세를 얼마간 취하게 되는데 이 자세를 ‘미에(見得)’라고 한다. 주연배우는 각자 대표적인 미에 자세를 갖고 있었다. 토요쿠니는 배우가 무대 위에서 가장 빛나는 순간인 미에 자세를 전신상으로 그렸다. 그 대표적인 예로 ‘고라이야(高麗屋)’와 ‘야마토야(大和屋)’는 배우의 무대 모습 그림이라는 뜻의 ‘야쿠샤 부타이노스가타에(役者舞臺之姿繪)’라는 시리즈에 속하는 작품이다.
이 작품을 계기로 토요쿠니는 최고의 야쿠샤에 화가가 되었다. 이러한 토요쿠니의 극중 긴장이 고조되는 순간을 잡아낸 미에를 그린 작품은 대중들의 구매욕을 불러일으켰을 것이다. ‘에도극장 3층(1800년)’ 또한 주목되는 작품인데, 토요쿠니는 닮은 얼굴 묘사가 양식화되어 있었던 당시 화풍을 한단계 업그레이드시켜 배우 개개인의 몸동작까지도 닮게 했다. 각 배우의 개성적인 모습과 더불어 삶의 맛이 짙은 화풍으로 우키요에 표현에 감정이입을 이루었다. 이처럼 야쿠샤에로 두각을 나타내었던 토요쿠니는 1797년경부터 야쿠샤에 외에 ‘가부키 극 배우들의 거울(Miroirs des acteurs de kabuki, 1804년)’와 같은 책자 형태의 그림 모음집인 배우 그림책 제작에도 진출하여 인기를 얻었다.
한편 우타가와 토요쿠니는 연극에 대한 정보전달을 목적으로 작품을 제작하기도 했다. 구체적으로 ‘이 쿄겐(狂言)은 금년 봄에 알 수 있습니다(1821년)’는 극장 예고편으로 출연자들의 모습을 미리 알리고 있다. 어느 때에 어떠한 연기 종목이 흥행할까 하는 점은 관객으로서는 알고 싶어 하는 주요 내용이므로, 그 연극을 출판물로 한 것이다. 관객 입장에서는 연극에 관한 주요 정보이기에 단기간에 대량으로 인쇄하고 배포된 작품이다.
그 밖에도 토요쿠니는 야쿠샤에를 그린 도슈사이 사라쿠(東洲斎写楽)가 10개월 남짓 활동하고 사라진 후에 샤라쿠식의 ‘3대 세가와 키쿠노조의 오쿠비에(三代目瀬川菊之丞の大首)’를 그리기도 했다. 1825년 1월 7일, 화가로서의 업적과 명예를 모두 성취한 토요쿠니는 많은 제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67년의 생애에 작별을 고했다.
에도 말기 우키요에 세계에서 패자로 군림한 일파는 우타가와파라 할 수 있을 만큼 우타가와 계파의 화풍이 인기를 얻게 되는데, 그 기초를 닦은 것이 우타가와 토요쿠니로 중요한 역할을 했다. 토요쿠니는1790년대 야쿠샤에 판도에서 도슈사이 샤라쿠, 카츠카와 수네이(勝川春英)와 더불어 자웅을 겨루었는데, 토요쿠니는 샤라쿠나 슌에이 화풍과는 다른 자신만의 개성을 살렸다. 토요쿠니는 지금까지 얼굴을 닮게 그리는 것이 양식화되어 있었던 당시 화풍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시켜 배우 개개인의 몸동작까지도 닮게 함으로써, 각 배우의 개성적인 모습을 추구하였다.
당시 야쿠샤에로 두각을 나타내었던 토요쿠니는 1797년경부터 야쿠샤에 외에 책자 형태의 그림 모음집인 배우 그림책 제작에도 진출하여 인기를 얻었다. 이처럼 토요쿠니는 야쿠샤에의 표현에 정감을 불어넣은 감정 이입으로 대중 취향을 확립해 나갔으며, 우타가와파의 기반을 닦은 우키요에 화가로 평가된다.
출처/김달진미술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