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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오 정춘수 靑吾 鄭春洙Jung ChunSu
1873 ~ 1953
근대·일제강점기
작가약력
- 1873(고종 10)~1953. 일제강점기 기독교조선감리회연맹 이사장, 일본기독교조선교단 고문 등을 역임한 개신교인.
작가 소개
1873년 2월 12일 충청북도 청주 출생으로, 본관은 광주(光州). 자는 명옥(明玉), 호는 청오(靑吾)이다. 1882년부터 1897년까지 한문을 배우고, 1904년부터 1907년까지 감리교 성서학원(聖書學院)에서 수학하였다.
1907년 경성신학교(京城神學校)에 입학해 1911년 12월 졸업하였으며, 1911년 목사 안수를 받아 1913년부터 1916년까지 개성 북부교회(北部敎會)를 맡았다. 1916년 9월부터 원산 상리교회(上里敎會)를 담임하면서 1919년 3·1운동 때 「독립선언서」에 서명하고 민족대표로 참여하였다.
3·1운동에 참여한 혐의로 1년 6개월의 징역형을 선고받았고, 1921년 5월 출옥하였다. 1922년 9월부터 1924년 8월까지 개성 북부교회, 1924년 9월부터 1926년 8월까지 개성 중앙교회(中央敎會)를 담임하였으며, 1926년 9월부터 1930년까지 남감리교회(南監理敎會) 춘천지방 장로사(長老司)를 지냈다. 1927년 2월 신간회(新幹會) 간사로 선출되었다.
1931년부터 1932년까지 평양 신양리구역 목사로 있다가 1932년부터 1933년까지 서울 동대문교회(東大文敎會)를 맡았다. 이 무렵 중앙기독교청년회(YMCA) 총무 신흥우(申興雨)가 조직한 적극신앙단(積極信仰團)에 참여하였고, 경성(京城) 수표교교회(水標橋敎會)를 담임하였다.
1938년 5월 ‘흥업구락부(興業俱樂部) 사건’에 연루되어 구속되었다가 같은 해 9월 ‘전향성명서’를 발표하고 풀려났다. 1939년 9월에는 조선감리교 제4대 감독으로 피선되었다. 1940년 7월 국민정신총동원(國民精神總動員) 기독교조선감리회연맹(基督敎朝鮮監理會聯盟)을조직해 이사장에 취임하였으며, 1941년 1월 국민총력조선연맹 문화부 문화위원, 9월 조선임전보국단 발기인으로 참여해 10월부터 평의원으로 활동하였다.
1941년 12월 동양지광사(東洋之光社) 주최 미영타도좌담회에 참석해 ‘영미인의 종교정책’을 발표하였으며, 『동양지광(東洋之光)』 1942년 1월호에 「응징의 이유 세 가지」, 『국민문학(國民文學)』 1942년 3월호에 「기독교와 신체제운동」 등의 글을 발표하였다.
1944년 3월 교단상임위원회를 열어 교회 통폐합과 전투기 헌납을 골자로 하는 「애국기(愛國機) 헌납 및 교회병합 실시에 관한 건」을 통과시켰고, 같은 해 7월 개신교를 통합해 조직한 일본기독교조선교단(日本基督敎朝鮮敎團)의 고문을 맡아 일제의 황민화운동에 협력하였다.
광복 후 1947년 2월 감리교에서 일제강점기 감리교 지도자들의 친일 행각을 폭로하는 성명이 발표되어 활동이 제한되었다. 1949년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에 체포되어 60일간 구속되었으나 기소유예로 풀려났다. 1950년 한국전쟁으로 피란 중 충청북도 청원에서 1953년 1월 10일 사망하였다.
1907년 경성신학교(京城神學校)에 입학해 1911년 12월 졸업하였으며, 1911년 목사 안수를 받아 1913년부터 1916년까지 개성 북부교회(北部敎會)를 맡았다. 1916년 9월부터 원산 상리교회(上里敎會)를 담임하면서 1919년 3·1운동 때 「독립선언서」에 서명하고 민족대표로 참여하였다.
3·1운동에 참여한 혐의로 1년 6개월의 징역형을 선고받았고, 1921년 5월 출옥하였다. 1922년 9월부터 1924년 8월까지 개성 북부교회, 1924년 9월부터 1926년 8월까지 개성 중앙교회(中央敎會)를 담임하였으며, 1926년 9월부터 1930년까지 남감리교회(南監理敎會) 춘천지방 장로사(長老司)를 지냈다. 1927년 2월 신간회(新幹會) 간사로 선출되었다.
1931년부터 1932년까지 평양 신양리구역 목사로 있다가 1932년부터 1933년까지 서울 동대문교회(東大文敎會)를 맡았다. 이 무렵 중앙기독교청년회(YMCA) 총무 신흥우(申興雨)가 조직한 적극신앙단(積極信仰團)에 참여하였고, 경성(京城) 수표교교회(水標橋敎會)를 담임하였다.
1938년 5월 ‘흥업구락부(興業俱樂部) 사건’에 연루되어 구속되었다가 같은 해 9월 ‘전향성명서’를 발표하고 풀려났다. 1939년 9월에는 조선감리교 제4대 감독으로 피선되었다. 1940년 7월 국민정신총동원(國民精神總動員) 기독교조선감리회연맹(基督敎朝鮮監理會聯盟)을조직해 이사장에 취임하였으며, 1941년 1월 국민총력조선연맹 문화부 문화위원, 9월 조선임전보국단 발기인으로 참여해 10월부터 평의원으로 활동하였다.
1941년 12월 동양지광사(東洋之光社) 주최 미영타도좌담회에 참석해 ‘영미인의 종교정책’을 발표하였으며, 『동양지광(東洋之光)』 1942년 1월호에 「응징의 이유 세 가지」, 『국민문학(國民文學)』 1942년 3월호에 「기독교와 신체제운동」 등의 글을 발표하였다.
1944년 3월 교단상임위원회를 열어 교회 통폐합과 전투기 헌납을 골자로 하는 「애국기(愛國機) 헌납 및 교회병합 실시에 관한 건」을 통과시켰고, 같은 해 7월 개신교를 통합해 조직한 일본기독교조선교단(日本基督敎朝鮮敎團)의 고문을 맡아 일제의 황민화운동에 협력하였다.
광복 후 1947년 2월 감리교에서 일제강점기 감리교 지도자들의 친일 행각을 폭로하는 성명이 발표되어 활동이 제한되었다. 1949년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에 체포되어 60일간 구속되었으나 기소유예로 풀려났다. 1950년 한국전쟁으로 피란 중 충청북도 청원에서 1953년 1월 10일 사망하였다.
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