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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정 임응식 九丁 林應植Limb EungSik
1912 ~ 2001
한국
사진
작가약력
- 1912∼2001. 전후 생활주의 리얼리즘 사진을 주도한 한국의 사진작가.
- 학력 사항
- 체신대학교 행정학과 졸업
- 경력 사항
- 부산여광사진구락부 회원
- 1952-1961, 사진작가협회 창설 및 회장
- 1973-1989, 중앙대학교 교수
- 등 역임
- 전시 이력
- 개인전
- 1950, 개인전(부산)
- 1982, 고희전(국립현대미술관)
- 1991, 기증작품전(국립현대미술관)
- 1995, 개인전(삼성 포토갤러리)
- 2011, 임응식-기록의 예술, 예술의 기록(덕수궁미술관)
- 등 전시
- 단체전
- 1934, 일본사진살롱 입선
- 1936-1937, 전조선사진살롱 입선
- 1955, 일본국제사진살롱 입선
- 1955, 한∙미합동사진전:한국의 가족기획
- 1967-1972, 한국창작사진협회전
- 2005, 광복60년사진60년-시대와 사람들(마로니에미술관)
- 등 전시
- 수상 내역
- 1958, 한국사진작가협회 문화상
- 1961, 서울시 문화상
- 1978, 현대사진문화상
- 1989, 은관문화훈장
- 등 수상
- 저서
- 『한국의 고건축 사진 시리즈』 (광장출판사, 1977)
- 『임응식 사진작품집(2권)』,『한국사진작가선-임응식』(시각사, 1979)
- 『풍모』(시각사,1982),『사진사상』(햇뜸사, 1986)
- 『내가 걸어온 한국사단』(눈빛, 1999)
작가 소개
호는 구정(九丁). 부산에서 임춘화(林春和)의 4남 2녀 중 막내로 출생했다. 형인 임응구(林應九)는 서양화가이다. 와세다중학교[早稻田中學校] 입학 선물로 카메라를 받고 사진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1931년 부산체신리원양성소(釜山遞信吏員養成所)를 수료하고 1933년에는 일본인 중심으로 결성된 여광사진구락부(黎光寫眞俱樂部)에 가입했다. 1934년에는 일본 도시마체신학교[豊島遞信學校]를 졸업하고 1935년 강릉우체국에서 근무하면서 강릉사우회(江陵寫友會)를 조직했다. 1938년부터 43년까지는 부산지방체신국에서 근무했다. 1944년부터 46년까지 일본물리탐광주식회사(日本物理探鑛株式會社)에서 과학사진을 찍었다. 1946년부터 부산에서 사진현상소 ‘아르스(ARS)’를 운영했으며 부산광화회(釜山光畵會)를 결성했다. 부산광화회는 1947년 ‘부산예술사진연구회’로 이어져 회원전을 개최하였다.
한국전쟁 인천상륙작전 당시 종군사진기자로 참전하였고 10월 15일에 부산에서 ‘경인전선보도사진전’을 열었다. 1952년 6월 서울에서 피난 온 대한사진예술연구회 회원들과 합동전을 개최하였다. 같은 해 12월에 한국사진작가협회를 창립하고 회장을 역임했다. 이 단체는 정기전 개최, 대한민국미술전람회의 사진부 신설과 국제전 진출 등 사진의 문화예술계로의 제도적 정착과 발전에 힘썼다. 1957년 미국현대미술관(MOMA)의 사진전인 ‘인간가족전’을 경복궁 미술관에 유치하는 데 애썼다.
1953년 서울대학교 미술대학에서 한국 최초의 사진강좌를 맡았고, 이화여자대학교, 홍익대학교 등에서 사진을 가르쳤다. 1974년부터 78년까지 중앙대학교 사진과 교수를 역임했으며, 1977년에는 한국사진교육연구회를 창립했다.
한국문화단체총연합회 중앙위원(1953∼60), 한국미술가협회 사진부 대표(1955∼60), 한국창작사진가협회 회장(1964∼71), 대한민국미술대전 초대작가(1964∼82) 및 심사위원과 운영위원(1974∼75), ‘사진영상의 해’ 조직 위원장(1998) 등을 역임하였다.
임응식의 작품경향은 한국전쟁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 일제강점기에는 신흥사진을 실험하면서 서정적이고 향토적인 소재를 담은 소위 ‘살롱 사진’과 ‘회화주의 사진’을 주로 찍었다. 1934년 일본 『사진살롱』지에 「초자(硝子)의 정물」로 등단했고, 1937년 ‘전조선사진살롱’전에서 「둑을 가다」로 입선했다.
1950년대부터 ‘생활주의 리얼리즘’의 사진이념을 주장했다. 예술적 살롱 사진을 배격하고 현실의 모습을 직면해 담아내는 리얼리즘의 추구를 선언했다. 생활주의 사진의 흐름은 1950년대 한국 사진계의 주류를 형성했는데, 그 배경으로는 한국전쟁의 경험과 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의 『라이프(Life)』지의 포토저널리즘, 일본의 리얼리즘 사진 경향이 지적된다. 「구직(求職)」을 비롯한 전후의 고단한 삶의 모습을 담은 사진들은 생활주의 사진의 대표적인 예이다.
1966년부터는 『공간』지에 한국 고건축사진을 연재했고, 이를 모아 사진집 『한국의 고건축』을 1977년에 출간했다. 1969년『공간』지의 편집주간이 되고 김환기와 오상순 등 여러 문화예술인들의 초상사진을 촬영하여 사진집 『풍모(風貌)』를 1982년에 출간했다. 그는 1950년대부터 사망한 2001년까지 서울 명동의 모습을 꾸준히 사진에 담았다. 2012년에 임응식 탄생 100주년 기념전이 덕수궁미술관에서 열렸다.
1958년 한국사진문화상, 1960년 서울특별시 문화상, 1971년 대한민국 문화예술상, 1978년 현대사진문화상, 1989년 은관문화훈장 등을 받았다.
한국전쟁 인천상륙작전 당시 종군사진기자로 참전하였고 10월 15일에 부산에서 ‘경인전선보도사진전’을 열었다. 1952년 6월 서울에서 피난 온 대한사진예술연구회 회원들과 합동전을 개최하였다. 같은 해 12월에 한국사진작가협회를 창립하고 회장을 역임했다. 이 단체는 정기전 개최, 대한민국미술전람회의 사진부 신설과 국제전 진출 등 사진의 문화예술계로의 제도적 정착과 발전에 힘썼다. 1957년 미국현대미술관(MOMA)의 사진전인 ‘인간가족전’을 경복궁 미술관에 유치하는 데 애썼다.
1953년 서울대학교 미술대학에서 한국 최초의 사진강좌를 맡았고, 이화여자대학교, 홍익대학교 등에서 사진을 가르쳤다. 1974년부터 78년까지 중앙대학교 사진과 교수를 역임했으며, 1977년에는 한국사진교육연구회를 창립했다.
한국문화단체총연합회 중앙위원(1953∼60), 한국미술가협회 사진부 대표(1955∼60), 한국창작사진가협회 회장(1964∼71), 대한민국미술대전 초대작가(1964∼82) 및 심사위원과 운영위원(1974∼75), ‘사진영상의 해’ 조직 위원장(1998) 등을 역임하였다.
임응식의 작품경향은 한국전쟁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 일제강점기에는 신흥사진을 실험하면서 서정적이고 향토적인 소재를 담은 소위 ‘살롱 사진’과 ‘회화주의 사진’을 주로 찍었다. 1934년 일본 『사진살롱』지에 「초자(硝子)의 정물」로 등단했고, 1937년 ‘전조선사진살롱’전에서 「둑을 가다」로 입선했다.
1950년대부터 ‘생활주의 리얼리즘’의 사진이념을 주장했다. 예술적 살롱 사진을 배격하고 현실의 모습을 직면해 담아내는 리얼리즘의 추구를 선언했다. 생활주의 사진의 흐름은 1950년대 한국 사진계의 주류를 형성했는데, 그 배경으로는 한국전쟁의 경험과 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의 『라이프(Life)』지의 포토저널리즘, 일본의 리얼리즘 사진 경향이 지적된다. 「구직(求職)」을 비롯한 전후의 고단한 삶의 모습을 담은 사진들은 생활주의 사진의 대표적인 예이다.
1966년부터는 『공간』지에 한국 고건축사진을 연재했고, 이를 모아 사진집 『한국의 고건축』을 1977년에 출간했다. 1969년『공간』지의 편집주간이 되고 김환기와 오상순 등 여러 문화예술인들의 초상사진을 촬영하여 사진집 『풍모(風貌)』를 1982년에 출간했다. 그는 1950년대부터 사망한 2001년까지 서울 명동의 모습을 꾸준히 사진에 담았다. 2012년에 임응식 탄생 100주년 기념전이 덕수궁미술관에서 열렸다.
1958년 한국사진문화상, 1960년 서울특별시 문화상, 1971년 대한민국 문화예술상, 1978년 현대사진문화상, 1989년 은관문화훈장 등을 받았다.
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서울아트가이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