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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암 조광조 靜庵 趙光祖Cho GwangJo
1482 ~ 1519
조선
작가약력
- 1482(성종 13)~1519(중종 14). 조선 전기 교리, 부제학, 대사헌 등을 역임한 문신.
작가 소개
본관 한양. 자 효직(孝直). 호 정암(靜庵). 시호 문정(文正). 개국공신 온(溫)의 5대손이며, 감찰 원강(元綱)의 아들이다. 어천찰방(魚川察訪)이던 아버지의 임지에서 무오사화로 유배 중인 김굉필(金宏弼)에게 수학하였다. 1510년(중종 5) 진사시를 장원으로 통과하고 성균관에 들어가 공부하던 중, 성균관에서 학문과 수양이 뛰어난 자를 천거하게 되자 유생 200여 명의 추천을 받았고, 다시 이조판서 안당(安瑭)의 천거로 1515년 조지서사지(造紙署司紙)에 임명되었다. 같은 해 증광문과에 급제하여 홍문관에 들어갔으며 전적·감찰·정언·수찬·교리·전한 등을 역임하고 1518년 홍문관의 장관인 부제학을 거쳐 대사헌이 되었다.
성균관 유생들을 중심으로 한 사림파(士林派)의 절대적 지지를 바탕으로 도학정치(道學政治)의 실현을 위해 적극적으로 활동하였다. 그것은 국왕 교육, 성리학 이념의 전파와 향촌 질서의 개편, 사림파 등용, 훈구정치(勳舊政治) 개혁을 급격하게 추진하는 것이었다. 국왕 교육은 군주가 정치의 근본이라는 점에서 이상정치를 실현하기 위해 가장 먼저 힘써야 할 것이었다. 그리하여 국왕이 격물(格物)·치지(致知)·성의(誠意)·정심(正心)에 힘써 노력하여 정체(政體)를 세우고 교화를 행할 것을 강조하는 한편 자신들의 정당성을 확립하고 앞 시기의 사화(士禍)와 같은 탄압을 피하기 위해 군자(君子)와 소인(小人)을 분별할 것을 역설하였다. 성리학 이념의 전파를 위해서는 정몽주(鄭夢周)의 문묘종사(文廟從祀)와 김굉필·정여창(鄭汝昌)에 대한 관직 추증을 시행하였으며, 나아가 뒤의 두 사람을 문묘에 종사할 것을 요청하였다. 《여씨향약(呂氏鄕約)》을 간행하여 전국에 반포하게 한 것은 사림파가 주체가 되는 새로운 사회질서를 확립하기 위한 노력이었다. 1518년에 천거를 통해 과거 급제자를 뽑는 현량과(賢良科)의 실시를 주장하여 이듬해에는 천거로 올라온 120명을 대책(對策)으로 시험하여 28인을 선발하였는데 그 급제자는 주로 사림파 인물들이었다.
훈구정치를 극복하려는 정책들은 많은 논란을 일으키며 추진되었다. 아버지 신수근(愼守勤)이 연산군 때에 좌의정을 지냈다는 이유로 반정(反正) 후에 폐위된 중종비 단경왕후(端敬王后) 신씨(愼氏)의 복위를 주장하였는데, 이것은 반정공신들의 자의적인 조치를 비판하는 것이었다. 도교 신앙의 제사를 집행하는 관서로서 성리학적 의례에 어긋나는 소격서(昭格署)를 미신으로 몰아 혁파한 것도 사상적인 문제인 동시에 훈구파 체제를 허물기 위한 노력이었다. 급기야 1519년에는 중종반정의 공신들이 너무 많을 뿐 아니라 부당한 녹훈자(錄勳者)가 있음을 비판하여 결국 105명의 공신 중 2등공신 이하 76명에 이르는 인원의 훈작(勳爵)을 삭제하였다. 이러한 정책 수행은 반정공신을 중심으로 한 훈구파의 격렬한 반발을 불러일으켜 홍경주(洪景舟)·남곤(南袞)·심정(沈貞) 등에 의해 당파를 조직하여 조정을 문란하게 한다는 공격을 받았으며, 벌레가 ‘조광조가 왕이 될 것(走肖爲王)’이라는 문구를 파먹은 나뭇잎이 임금에게 바쳐지기도 하였다. 결국 사림파의 과격한 언행과 정책에 염증을 느낀 중종의 지지를 업은 훈구파가 대대적인 숙청을 단행하는 기묘사화(己卯士禍)를 일으켰다. 위훈삭제가 단행된 이후 사흘만의 일이었다. 기묘사화로 인해 조광조는 능주에 유배되었다가 결국 사사되었다. 그러나 후일 사림파의 승리에 따라 선조 초에 신원되어 영의정이 추증되고, 문묘에 종사되었으며, 전국의 많은 서원과 사당에 제향되었다.
그의 사상의 핵심은 덕(德)과 예(禮)로 다스리는 유학의 이상적 정치인 왕도(王道)를 현실에 구현하려는 것이었으며, “도학을 높이고, 인심을 바르게 하며, 성현을 본받고 지치(至治)를 일으킨다”는 진술로 압축한 바와 같이 도학정치의 구현인 지치라고 표현하였다. 동시에 그러한 이념은 사마시에 제출한 답안인 〈춘부(春賦)〉에 나타나듯이 자연질서 속에서의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따뜻하고 강렬한 확신이 기초가 된 것이었다. 그러나 학문과 경륜이 완숙되기 전에 정치에 뛰어들어 너무 급진적이고 과격하게 개혁을 추진하려다가 실패했다는 점은 후대 사림들에게 경계해야 할 점으로 평가되었다. 훈구파의 반격으로 자기를 따르는 자들과 함께 죽임을 당하고 개혁은 한때 모두 실패로 돌아갔으나, 그의 이념과 정책은 후대 선비들의 학문과 정치에 중요한 지침이 되었다. 조선 후기까지의 모든 사족(士族)은 그가 정몽주·길재(吉再)·김숙자(金叔滋)·김종직(金宗直)·김굉필로 이어져 내려온 사림파 도통(道統)의 정맥(正脈)을 후대에 이어준 인물이라는 점에 정파를 초월하여 합의하고 추앙하였다. 그것은 학문의 전수 관계로 인한 것만이 아니고 목숨을 걸고 이상을 현실정치에 실행하려 한 노력에 대한 경의였다. 문집에 《정암집》이 있다.
성균관 유생들을 중심으로 한 사림파(士林派)의 절대적 지지를 바탕으로 도학정치(道學政治)의 실현을 위해 적극적으로 활동하였다. 그것은 국왕 교육, 성리학 이념의 전파와 향촌 질서의 개편, 사림파 등용, 훈구정치(勳舊政治) 개혁을 급격하게 추진하는 것이었다. 국왕 교육은 군주가 정치의 근본이라는 점에서 이상정치를 실현하기 위해 가장 먼저 힘써야 할 것이었다. 그리하여 국왕이 격물(格物)·치지(致知)·성의(誠意)·정심(正心)에 힘써 노력하여 정체(政體)를 세우고 교화를 행할 것을 강조하는 한편 자신들의 정당성을 확립하고 앞 시기의 사화(士禍)와 같은 탄압을 피하기 위해 군자(君子)와 소인(小人)을 분별할 것을 역설하였다. 성리학 이념의 전파를 위해서는 정몽주(鄭夢周)의 문묘종사(文廟從祀)와 김굉필·정여창(鄭汝昌)에 대한 관직 추증을 시행하였으며, 나아가 뒤의 두 사람을 문묘에 종사할 것을 요청하였다. 《여씨향약(呂氏鄕約)》을 간행하여 전국에 반포하게 한 것은 사림파가 주체가 되는 새로운 사회질서를 확립하기 위한 노력이었다. 1518년에 천거를 통해 과거 급제자를 뽑는 현량과(賢良科)의 실시를 주장하여 이듬해에는 천거로 올라온 120명을 대책(對策)으로 시험하여 28인을 선발하였는데 그 급제자는 주로 사림파 인물들이었다.
훈구정치를 극복하려는 정책들은 많은 논란을 일으키며 추진되었다. 아버지 신수근(愼守勤)이 연산군 때에 좌의정을 지냈다는 이유로 반정(反正) 후에 폐위된 중종비 단경왕후(端敬王后) 신씨(愼氏)의 복위를 주장하였는데, 이것은 반정공신들의 자의적인 조치를 비판하는 것이었다. 도교 신앙의 제사를 집행하는 관서로서 성리학적 의례에 어긋나는 소격서(昭格署)를 미신으로 몰아 혁파한 것도 사상적인 문제인 동시에 훈구파 체제를 허물기 위한 노력이었다. 급기야 1519년에는 중종반정의 공신들이 너무 많을 뿐 아니라 부당한 녹훈자(錄勳者)가 있음을 비판하여 결국 105명의 공신 중 2등공신 이하 76명에 이르는 인원의 훈작(勳爵)을 삭제하였다. 이러한 정책 수행은 반정공신을 중심으로 한 훈구파의 격렬한 반발을 불러일으켜 홍경주(洪景舟)·남곤(南袞)·심정(沈貞) 등에 의해 당파를 조직하여 조정을 문란하게 한다는 공격을 받았으며, 벌레가 ‘조광조가 왕이 될 것(走肖爲王)’이라는 문구를 파먹은 나뭇잎이 임금에게 바쳐지기도 하였다. 결국 사림파의 과격한 언행과 정책에 염증을 느낀 중종의 지지를 업은 훈구파가 대대적인 숙청을 단행하는 기묘사화(己卯士禍)를 일으켰다. 위훈삭제가 단행된 이후 사흘만의 일이었다. 기묘사화로 인해 조광조는 능주에 유배되었다가 결국 사사되었다. 그러나 후일 사림파의 승리에 따라 선조 초에 신원되어 영의정이 추증되고, 문묘에 종사되었으며, 전국의 많은 서원과 사당에 제향되었다.
그의 사상의 핵심은 덕(德)과 예(禮)로 다스리는 유학의 이상적 정치인 왕도(王道)를 현실에 구현하려는 것이었으며, “도학을 높이고, 인심을 바르게 하며, 성현을 본받고 지치(至治)를 일으킨다”는 진술로 압축한 바와 같이 도학정치의 구현인 지치라고 표현하였다. 동시에 그러한 이념은 사마시에 제출한 답안인 〈춘부(春賦)〉에 나타나듯이 자연질서 속에서의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따뜻하고 강렬한 확신이 기초가 된 것이었다. 그러나 학문과 경륜이 완숙되기 전에 정치에 뛰어들어 너무 급진적이고 과격하게 개혁을 추진하려다가 실패했다는 점은 후대 사림들에게 경계해야 할 점으로 평가되었다. 훈구파의 반격으로 자기를 따르는 자들과 함께 죽임을 당하고 개혁은 한때 모두 실패로 돌아갔으나, 그의 이념과 정책은 후대 선비들의 학문과 정치에 중요한 지침이 되었다. 조선 후기까지의 모든 사족(士族)은 그가 정몽주·길재(吉再)·김숙자(金叔滋)·김종직(金宗直)·김굉필로 이어져 내려온 사림파 도통(道統)의 정맥(正脈)을 후대에 이어준 인물이라는 점에 정파를 초월하여 합의하고 추앙하였다. 그것은 학문의 전수 관계로 인한 것만이 아니고 목숨을 걸고 이상을 현실정치에 실행하려 한 노력에 대한 경의였다. 문집에 《정암집》이 있다.
출처/두산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