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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석원 李錫元Lee SukWon
1954 ~
한국
서양화
작가약력
- 학력 사항
- 전남대학교 미술학과 학사
- 전남대학교 대학원 석사
- 경력 사항
- 대한민국미술대전 심사위원
- 대한민국여성미술대상전 심사위원장
- 대한민국회화대전 심사위원장
- 광주시미술대전 심사위원
- 무등미술대전 심사위원
- 춘추미술대상전 심사위원
- 대한민국수채화대전 / 대한민국수채화전람회 운영위원
- (사)한국미술협회 감사, 이사, 분과위원
- 한국미술교육연구회 전국 회장
- 등 역임
- 전시 이력
- 개인전 (2009, 경복미술문화원) 등 7회 전시
- 단체전
- 1992, 광주·요코하마 현대미술전
- 1995, 광주 국제현대미술제
- 1997, 목포개항100주년 기념전
- 금호미술관 초대전
- 브라질 한국문화원초대전
- 갤러리 LGF초대전
- 광주·요코하마 현대미술전
- 2005, 서울 국제북아트페어(서울 코엑스)
- 2006, 남부현대미술제(포천 반월문예회관)
- 2007, 센티르갤러리 초대전(파주)
- 2007, 광주미술 현장전(광주시립미술관)
- 등 다수 전시
작가 소개
이석원(李錫元)은 원시적 심성세계(心性世界)에 깊숙이 빠져있다. 초기에 즐겨 그렸던 새끼줄을 비롯하여 최근의 화강암 시리즈에 이르기까지 그는 일관되게 자연물에서 원시적인 감각을 이끌어 내려한다. 그의 이런 탐구정신은 인상주의 시대에 나타났던 원시주의(Primitivism)와도 맥락을 같이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방법적으로 보면 그의 작품들은 동양화 정신에 깊이 뿌리를 박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실 산수화는 산과 물을 기본으로 하는 자연 조건을 탐구하는 그림이지만 가장 중요한 핵심은 공간을 힘있게 떠 받치고 있는 바위나 암벽이라고 할 수 있다. 바위를 그리는 방법이 발달해 있고 수많은 준법이 산수화에서 예시되고 있는 것도 그 점을 뒷받침한다. 이렇게 동양화에 있어서 자연을 관찰하는 법이 서양과 다르다는 것은 세잔느의 화법에서도 쉽게 발견 할 수 있다. 세잔느가 그린 “빅토와르 산” 은 전체적으로 보아 바위나 암벽만을 그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자연물의 원시성을 부각시킨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의 바위 그리기 방법과 산수화에서의 바위 그리기는 전혀 다른 것이라고 해야 옳다. 한마디로 세잔느의 바위 그림에는 준법에 대한 분명한 의식이 없는 것이다. 이 말은 그의 자연 관찰이 과학자의 입장에서처럼 분석적이긴 하지만 서구인 특유의 합리주의 자연관에 기초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하지만 산수화에 있어서 준법은 합리주의적인 자연관의 산물이 아니다. 동양화론이 말해 주듯이 산수화에 있어서 자연은 음과 양으로 분류되는 우주적인 에너지(氣)의 현상(現象)이므로 바위를 그릴 때 나타나는 다양한 준법도 실은 에너지의 현상으로 투영되는 것이다.
이석원의 화강암 시리즈가 서양화적인 사실주의보다는 동양화적인 체질을 지닌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먹, 석채와 같은 동양적 재료를 사용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 바위의 질감이나 갈라진 틈에 지대한 관심을 나타내고 있는 점 때문이다. 전통적인 의미의 준법과 정확히 일치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의 그림에 나타나는 바위는 단순한 자연물이 아니라 양기(陽氣)라고 불리는 자연의 힘이 어떻게 존재하고 있는가를 보여주는 것이다. 예컨대 갈라진 틈새는 음기이고 그렇지 않은 곳은 양기이다. 갈라진 곳에는 그림자가 생겨서 음기가 발생하고, 해가 쪼이는 곳은 양기가 발산하고 있다. 사실 우리가 사는 공간은 그 모든 힘에 의존해 있다. 따라서 화가가 그 힘의 실체를 혹은 그 그림자를 이해한다는 것을 자신의 삶을 몸으로 실감하는 행위이고 동시에 인간존재가 독립해 있는 존재가 아니라 사실은 기의 세계 안에 더불어 실재한다는걸 확인하는 행위인 것이다.
이석원의 화강암을 보면 그가 얼마나 이 문제를 집요하게 그리고 우직하게 추적하고 있는가를 알 수 있다. 수없이 되풀이되는 소재이면서도 실은 그 바위 하나하나 모두 그 나름의 표정을 갖고 있는 것은 그 점을 확연하게 보여준다. 이리저리 제멋대로 갈라져나간 틈새 모양도 그렇지만 화강암을 형성하고 있는 독특한 질감과 그 덩어리 성분이 모두 다르다는 것을 그는 끈기 있게 확인해 보이고 있다. 만일 그가 화강암만을 그렸다면 그의 회화는 완벽하게 추상 양식이 될 것이 틀림없다. 질감이나 색감도 그렇지만 이리저리 갈라진 틈새를 보여주는 검은 선들은 그 자체로서 매우 역동적이고 표현주의적인 감동마저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것은 그의 구도법이 그리고자 하는 대상을 화면에 가득히 채우는 소위 접사법(Close up)을 구상한다는데서 더욱 그렇다. 그런 점에서는 그의 작품들이 동양화적이기 보다는 서양화적인 특성을 지닌다고 할 수 있다. 실감있게 말하자면 그는 동양화의 서양화적인 변용(變容)을 추구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이런 점이 분명하게 드러나는 것은 화강암 벽면에 덧그려지는 그의 선묘작업(線描作嶪)에서 확인된다. 이석원은 앞에서 말했듯이 자연 자체를 분석적으로 탐구하기보다는 자연에서 원시적인 심상(心象)을 이끌어내고 그것에 도취하려는 것이다. 그가 일차적으로 완성시킨 화강암의 벽면에다 다시 색선으로 동화와 같은 그림을 그려 넣고 있는 것은 단적으로 그 점을 시사한다.
그는 작가 노트에서 이 점을 다음과 같이 암시하고 있다. ‘잃어버린 날의 동화처럼 사계절 모두에 스며있는 추억들이, 그 무한한 동심의 세계가 오늘의 내 붓 끝에서 다시 살아나고 있는 것이다. 그림다운 그림을 그려보자. 깎아지른 화강암 바위벽에 그림을 그려보자. 화강암에 암벽화를 그리자. 부분적으로 나타났던 화강암의 질감 효과를 체계적으로 확대시켜 붉은색, 푸른색, 검은색 바위 위에 그림을 그리자. 내 마음의 고향을 소재로 삼아서......’
이석원의 원시적 심성이 이 글에서는 잃어버린 날의 동화이거나 동심으로 나타나 있음을 보게 되며 그 원시적 심성은 마치 새가 나무에다 동주리를 틀듯이 암벽에 그려진다는 사실에 주목하게 된다. 그러니까 화강암에 대한 그의 집착은 그림그리기의 종착지가 아니고 실은 완성을 위한 하나의 기반이라고 할 수 잇는데 이점은 동양화 정신과 맥락을 같이 하는 것이다.
사실 안견의 ‘몽유도원도’를 구조적으로 이해하면 기암절벽의 바위와 인적이 드문 신선들의 마을로 이분화되는 두 개의 주제가 결합되어 있는 걸 알 수 있다. 안견이 기암 절벽의 산들로 그의 화폭을 가득히 채웠던 것은 기암절벽에 둘러싸인 마을을 신비하게 보이기 위해서였다. 그에게 있어서 마을은 신선들이 그랬던 것처럼, 속새를 떠난 사람들이 마치 천진난만한 어린애처럼 살 수 있는 피난처가 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안견이 그의 그림에다 ‘도원(桃園)’이라는 화제를 달게 되었던 것은 그 이유야 어찌되었건 그 근본 사상은 자연 시인이었던 도연명(陶淵明)에서 비롯된다. 그의 ‘도화원기(桃花源記)’는 세상 걱정을 잊고 사는 무릉도원 (낙원)의 경험을 노래한 시이다. 오늘의 입장에서 보자면 꿈같은 이야기일지는 모르지만, 자연 환경이 나날이 파괴되어가고 있는 문명론적인 시각에서 볼 때, 그 시는 오히려 현대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 한층 더 절실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십장생도나 민화가 환상적인 그림이 아니라는 것도 그렇다. 소나무나 수석(壽石)이 불로장생의 상징이 되듯이 그것도 같은 맥락이 되기 때문이다. 이런 점은 작가 이석원이 왜 화강암을 그려야 했고 또 그 바탕 위에 동화의 세계를 그려야 했는가를 알게 만든다. 그의 선묘화는 해, 나무, 새, 물고기, 사슴, 구름과 산들, 그리고 천진난만한 아이들로 구성되고 있다. 이것들이 십장생도와 관련이 있다는 건 한 눈에 알아차릴 수 있으나 그는 결코 십장생의 이미지를 그대로 차용하지는 않는다. 사슴과 아이들이 함께 놀이를 한다거나, 혹은 교회 건물이 등장한다거나 멍석을 깔고 담소를 나눈다거나 그물로 물고기를 잡는 등 여러 면에서 창의적인 이미지가 투영되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아무런 선입견 없이 그의 그림을 보게되면 얼른 울주반구대의 암각화를 연상하게 된다. 우리에게 있어서 보기 드문 선사시대의 유물인 그 암각화는 여러 가지 짐승들, 예컨대 사슴, 멧돼지, 호랑이와 같은 산짐승과 고래와 같은 물짐승, 혹은 독수리와 같은 하늘 짐승은 물론이고 남성의 상징을 드러내 놓은 인물로 어우러져 있다. 그 그림들은 모두 쇠꼬챙이로 쪼아서 그려진 것인데 주목해야할 것은 누가 무엇 때문에 그 험준한 암벽에다 그런 것들을 그렸을까하는 점이다. 아무도 그 물음에 분명한 대답을 주지 못하지만 중요한 것은 누구나 그 암각화에서 강렬한 원시적 심성을 느끼게 된다는 사실이다. 그런 시선으로 보면 이석원의 선묘화는 험준한 암벽위에 그려진 것도 아니고 또 쇠꼬챙이로 쪼아서 새긴 그림도 아닌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그가 그림을 그리는 태도로 보면 여러 면에서 선사시대의 분위기를 연상케 되는데 특히 세상의 때가 묻지 않은 무인지경으로 들어가 그 곳에서 신선처럼 동심을 노래하고 싶어한다는 점도 서로 공통된다.
이석원은 이런 경지를 실감있게 표현하기 위하여 한지, 장지, 장판지 심지어 캔버스 천을 이용하기도 하고 또 분채위에다 석채를 덮기도 한다. 그런 방법이 면과 선이 이분화(二分化)되어 있는 그의 회화를 효과적으로 승화시키는 방법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그의 회화는 암각을 그린 극사실주의적인 방법과 동화적인 세계를 그린 구상적 방법이 결합되어 있다. 그러니까 화강암은 면의 세계이고 그 위에 그려진 선묘는 선의 세계이므로 이를 공간과 시간으로 이해할 수 있다. 즉 그의 그림은 먼저 공간이 사실주의적으로 펼쳐지고 그 위에 시간적인 세계가 구상적으로 펼쳐지고 있는 셈이다. 두 개의 세계가 각기 독립하면서, 또한 협력되어진다는 것은 매우 흥미 있는 일이며 그것이 감성적인 것보다는 이지적으로 느껴진다는 점도 주목되는 일이다.
박용숙(미술평론가, 동덕여대 교수)
사실 산수화는 산과 물을 기본으로 하는 자연 조건을 탐구하는 그림이지만 가장 중요한 핵심은 공간을 힘있게 떠 받치고 있는 바위나 암벽이라고 할 수 있다. 바위를 그리는 방법이 발달해 있고 수많은 준법이 산수화에서 예시되고 있는 것도 그 점을 뒷받침한다. 이렇게 동양화에 있어서 자연을 관찰하는 법이 서양과 다르다는 것은 세잔느의 화법에서도 쉽게 발견 할 수 있다. 세잔느가 그린 “빅토와르 산” 은 전체적으로 보아 바위나 암벽만을 그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자연물의 원시성을 부각시킨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의 바위 그리기 방법과 산수화에서의 바위 그리기는 전혀 다른 것이라고 해야 옳다. 한마디로 세잔느의 바위 그림에는 준법에 대한 분명한 의식이 없는 것이다. 이 말은 그의 자연 관찰이 과학자의 입장에서처럼 분석적이긴 하지만 서구인 특유의 합리주의 자연관에 기초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하지만 산수화에 있어서 준법은 합리주의적인 자연관의 산물이 아니다. 동양화론이 말해 주듯이 산수화에 있어서 자연은 음과 양으로 분류되는 우주적인 에너지(氣)의 현상(現象)이므로 바위를 그릴 때 나타나는 다양한 준법도 실은 에너지의 현상으로 투영되는 것이다.
이석원의 화강암 시리즈가 서양화적인 사실주의보다는 동양화적인 체질을 지닌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먹, 석채와 같은 동양적 재료를 사용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 바위의 질감이나 갈라진 틈에 지대한 관심을 나타내고 있는 점 때문이다. 전통적인 의미의 준법과 정확히 일치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의 그림에 나타나는 바위는 단순한 자연물이 아니라 양기(陽氣)라고 불리는 자연의 힘이 어떻게 존재하고 있는가를 보여주는 것이다. 예컨대 갈라진 틈새는 음기이고 그렇지 않은 곳은 양기이다. 갈라진 곳에는 그림자가 생겨서 음기가 발생하고, 해가 쪼이는 곳은 양기가 발산하고 있다. 사실 우리가 사는 공간은 그 모든 힘에 의존해 있다. 따라서 화가가 그 힘의 실체를 혹은 그 그림자를 이해한다는 것을 자신의 삶을 몸으로 실감하는 행위이고 동시에 인간존재가 독립해 있는 존재가 아니라 사실은 기의 세계 안에 더불어 실재한다는걸 확인하는 행위인 것이다.
이석원의 화강암을 보면 그가 얼마나 이 문제를 집요하게 그리고 우직하게 추적하고 있는가를 알 수 있다. 수없이 되풀이되는 소재이면서도 실은 그 바위 하나하나 모두 그 나름의 표정을 갖고 있는 것은 그 점을 확연하게 보여준다. 이리저리 제멋대로 갈라져나간 틈새 모양도 그렇지만 화강암을 형성하고 있는 독특한 질감과 그 덩어리 성분이 모두 다르다는 것을 그는 끈기 있게 확인해 보이고 있다. 만일 그가 화강암만을 그렸다면 그의 회화는 완벽하게 추상 양식이 될 것이 틀림없다. 질감이나 색감도 그렇지만 이리저리 갈라진 틈새를 보여주는 검은 선들은 그 자체로서 매우 역동적이고 표현주의적인 감동마저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것은 그의 구도법이 그리고자 하는 대상을 화면에 가득히 채우는 소위 접사법(Close up)을 구상한다는데서 더욱 그렇다. 그런 점에서는 그의 작품들이 동양화적이기 보다는 서양화적인 특성을 지닌다고 할 수 있다. 실감있게 말하자면 그는 동양화의 서양화적인 변용(變容)을 추구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이런 점이 분명하게 드러나는 것은 화강암 벽면에 덧그려지는 그의 선묘작업(線描作嶪)에서 확인된다. 이석원은 앞에서 말했듯이 자연 자체를 분석적으로 탐구하기보다는 자연에서 원시적인 심상(心象)을 이끌어내고 그것에 도취하려는 것이다. 그가 일차적으로 완성시킨 화강암의 벽면에다 다시 색선으로 동화와 같은 그림을 그려 넣고 있는 것은 단적으로 그 점을 시사한다.
그는 작가 노트에서 이 점을 다음과 같이 암시하고 있다. ‘잃어버린 날의 동화처럼 사계절 모두에 스며있는 추억들이, 그 무한한 동심의 세계가 오늘의 내 붓 끝에서 다시 살아나고 있는 것이다. 그림다운 그림을 그려보자. 깎아지른 화강암 바위벽에 그림을 그려보자. 화강암에 암벽화를 그리자. 부분적으로 나타났던 화강암의 질감 효과를 체계적으로 확대시켜 붉은색, 푸른색, 검은색 바위 위에 그림을 그리자. 내 마음의 고향을 소재로 삼아서......’
이석원의 원시적 심성이 이 글에서는 잃어버린 날의 동화이거나 동심으로 나타나 있음을 보게 되며 그 원시적 심성은 마치 새가 나무에다 동주리를 틀듯이 암벽에 그려진다는 사실에 주목하게 된다. 그러니까 화강암에 대한 그의 집착은 그림그리기의 종착지가 아니고 실은 완성을 위한 하나의 기반이라고 할 수 잇는데 이점은 동양화 정신과 맥락을 같이 하는 것이다.
사실 안견의 ‘몽유도원도’를 구조적으로 이해하면 기암절벽의 바위와 인적이 드문 신선들의 마을로 이분화되는 두 개의 주제가 결합되어 있는 걸 알 수 있다. 안견이 기암 절벽의 산들로 그의 화폭을 가득히 채웠던 것은 기암절벽에 둘러싸인 마을을 신비하게 보이기 위해서였다. 그에게 있어서 마을은 신선들이 그랬던 것처럼, 속새를 떠난 사람들이 마치 천진난만한 어린애처럼 살 수 있는 피난처가 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안견이 그의 그림에다 ‘도원(桃園)’이라는 화제를 달게 되었던 것은 그 이유야 어찌되었건 그 근본 사상은 자연 시인이었던 도연명(陶淵明)에서 비롯된다. 그의 ‘도화원기(桃花源記)’는 세상 걱정을 잊고 사는 무릉도원 (낙원)의 경험을 노래한 시이다. 오늘의 입장에서 보자면 꿈같은 이야기일지는 모르지만, 자연 환경이 나날이 파괴되어가고 있는 문명론적인 시각에서 볼 때, 그 시는 오히려 현대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 한층 더 절실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십장생도나 민화가 환상적인 그림이 아니라는 것도 그렇다. 소나무나 수석(壽石)이 불로장생의 상징이 되듯이 그것도 같은 맥락이 되기 때문이다. 이런 점은 작가 이석원이 왜 화강암을 그려야 했고 또 그 바탕 위에 동화의 세계를 그려야 했는가를 알게 만든다. 그의 선묘화는 해, 나무, 새, 물고기, 사슴, 구름과 산들, 그리고 천진난만한 아이들로 구성되고 있다. 이것들이 십장생도와 관련이 있다는 건 한 눈에 알아차릴 수 있으나 그는 결코 십장생의 이미지를 그대로 차용하지는 않는다. 사슴과 아이들이 함께 놀이를 한다거나, 혹은 교회 건물이 등장한다거나 멍석을 깔고 담소를 나눈다거나 그물로 물고기를 잡는 등 여러 면에서 창의적인 이미지가 투영되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아무런 선입견 없이 그의 그림을 보게되면 얼른 울주반구대의 암각화를 연상하게 된다. 우리에게 있어서 보기 드문 선사시대의 유물인 그 암각화는 여러 가지 짐승들, 예컨대 사슴, 멧돼지, 호랑이와 같은 산짐승과 고래와 같은 물짐승, 혹은 독수리와 같은 하늘 짐승은 물론이고 남성의 상징을 드러내 놓은 인물로 어우러져 있다. 그 그림들은 모두 쇠꼬챙이로 쪼아서 그려진 것인데 주목해야할 것은 누가 무엇 때문에 그 험준한 암벽에다 그런 것들을 그렸을까하는 점이다. 아무도 그 물음에 분명한 대답을 주지 못하지만 중요한 것은 누구나 그 암각화에서 강렬한 원시적 심성을 느끼게 된다는 사실이다. 그런 시선으로 보면 이석원의 선묘화는 험준한 암벽위에 그려진 것도 아니고 또 쇠꼬챙이로 쪼아서 새긴 그림도 아닌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그가 그림을 그리는 태도로 보면 여러 면에서 선사시대의 분위기를 연상케 되는데 특히 세상의 때가 묻지 않은 무인지경으로 들어가 그 곳에서 신선처럼 동심을 노래하고 싶어한다는 점도 서로 공통된다.
이석원은 이런 경지를 실감있게 표현하기 위하여 한지, 장지, 장판지 심지어 캔버스 천을 이용하기도 하고 또 분채위에다 석채를 덮기도 한다. 그런 방법이 면과 선이 이분화(二分化)되어 있는 그의 회화를 효과적으로 승화시키는 방법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그의 회화는 암각을 그린 극사실주의적인 방법과 동화적인 세계를 그린 구상적 방법이 결합되어 있다. 그러니까 화강암은 면의 세계이고 그 위에 그려진 선묘는 선의 세계이므로 이를 공간과 시간으로 이해할 수 있다. 즉 그의 그림은 먼저 공간이 사실주의적으로 펼쳐지고 그 위에 시간적인 세계가 구상적으로 펼쳐지고 있는 셈이다. 두 개의 세계가 각기 독립하면서, 또한 협력되어진다는 것은 매우 흥미 있는 일이며 그것이 감성적인 것보다는 이지적으로 느껴진다는 점도 주목되는 일이다.
박용숙(미술평론가, 동덕여대 교수)
출처/서울아트가이드, 서울갤러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