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검색
- Service
- 작가검색
경지재 조세붕 敬知齋 曺世鵬Cho SeBung
1691 ~ 1760
조선
작가약력
- 1691(숙종 17)~1760(영조 36). 조선 후기 김천 출신의 효자.
작가 소개
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운거(雲擧), 호는 경지재(敬知齋). 아버지는 이조판서에 증직된 조유(曺逾)이며,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첫째 형은 조세호(曺世虎), 둘째 형은 조세룡(曺世龍), 셋째 형은 조세봉(曺世鳳)이다. 조세호는 자는 병여이고 숙종조에 진사시에 합격하여 학행으로 참봉에 제수되고 수직으로 지중추부사에 올랐으며 학자로서만이 아니라 세인이 칭송한 효자이었다.
조세룡은 자는 태여이며, 호는 인재(認齎)다. 수암(遂菴) 권상하(權尙夏) 문하에서 수업하여 예에 밝았으며 상제를 지키는 데 추호도 어긋남이 없이 슬퍼하다 자칫 목숨을 잃을 뻔하였다. 관찰사가 효행으로 천거하여 사헌부지평에 증직되었고 행장은 아우 조세붕이 짓고 묘갈문은 남당(南塘) 한원진(韓元震)이 닦았다. 조세봉은 자는 오보요이고, 호는 삼석재(三惜齋)다. 후세인이 이들 사형제를 일컬어 사효사학행(四孝四學行)이라 하였다.
조세붕은 지금의 김천시 봉산면 인의리에서 태어났다. 천성이 순후하고 도리를 알아 5세에 부친을 여의자 3년을 추복(追服)하고 모친이 별세하자 3년간 시묘를 하였다. 어릴 때부터 형제들과 함께 수암 권상하의 문인으로 수학해 학문이 높았다. 34세인 1725년(영조 1) 생원진사시에 시험을 쳐 증광시(增廣試) 생원(生員) 3등 50위로 합격하였다.
조세붕은 관찰사가 학행으로 천거하여 참봉, 교관, 시직이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병계 윤봉구가 묘갈문을 짓고 정재겸이 묘지문을 행장은 석문 윤봉오가 닦았다. 학행만이 아니라 효성이 지극하여 효행으로 사복시정에 증직되었으며, 문집이 있다.
묘소는 경상북도 김천시 어모면 옥율리에 있다.
조세룡은 자는 태여이며, 호는 인재(認齎)다. 수암(遂菴) 권상하(權尙夏) 문하에서 수업하여 예에 밝았으며 상제를 지키는 데 추호도 어긋남이 없이 슬퍼하다 자칫 목숨을 잃을 뻔하였다. 관찰사가 효행으로 천거하여 사헌부지평에 증직되었고 행장은 아우 조세붕이 짓고 묘갈문은 남당(南塘) 한원진(韓元震)이 닦았다. 조세봉은 자는 오보요이고, 호는 삼석재(三惜齋)다. 후세인이 이들 사형제를 일컬어 사효사학행(四孝四學行)이라 하였다.
조세붕은 지금의 김천시 봉산면 인의리에서 태어났다. 천성이 순후하고 도리를 알아 5세에 부친을 여의자 3년을 추복(追服)하고 모친이 별세하자 3년간 시묘를 하였다. 어릴 때부터 형제들과 함께 수암 권상하의 문인으로 수학해 학문이 높았다. 34세인 1725년(영조 1) 생원진사시에 시험을 쳐 증광시(增廣試) 생원(生員) 3등 50위로 합격하였다.
조세붕은 관찰사가 학행으로 천거하여 참봉, 교관, 시직이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병계 윤봉구가 묘갈문을 짓고 정재겸이 묘지문을 행장은 석문 윤봉오가 닦았다. 학행만이 아니라 효성이 지극하여 효행으로 사복시정에 증직되었으며, 문집이 있다.
묘소는 경상북도 김천시 어모면 옥율리에 있다.
출처/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한국학중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