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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호 학밀 스님 晴湖 學密HakMil Buddhist Monk
1875 ~ 1934
조선·근대
작가약력
- 1875(고종 12)∼1934. 조선 말기의 승려.
작가 소개
1875년(고종 12) 경기도 고양시 뚝섬에서 아버지 나윤천(羅允天)과 어머니 원씨(元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법명은 학밀(學蜜), 법호는 청호(晴湖), 아호는 오은(五隱)이다. 12세 되던 1887년 강원도 양양군 오대산 명주사(明珠寺)에서 출가했고 1889년 15세에 득도하여 23세 때 구족계를 받았다고 한다.
1898년 24세에 오대산에서 개당(開堂)하여 두루 경을 설하여 학인을 키우기 시작하여 10년 동안 후진 교육에 힘을 쏟았다고 한다. 34세에 서울에 와서 조선불교 원종 총무원에서 감사 부장을 지냈고, 각황사(覺皇寺)에서 포교 활동을 하였다. 1911년 사찰령(寺刹令) 반포와 함께 봉은사가 30본산 중 하나로 정해진 뒤 1912년 봉은사 주지가 되어 절 부근의 황무지를 개간하여 전답과 임야 20만평을 확보하였고, 경내의 각종 전각을 중수하고 창건하면서 봉은사를 정비하였다. 1917년 봉은사에서 열렸던 법회에는 10만 명이 운집했다고 한다. 1925년 5월 “을축년 대홍수”로 인근의 주민들이 떠내려가자 배를 띄워 사람들을 구해내고 의복과 음식을 주어 구휼하여 708명의 목숨을 구했다고 한다. 1934년 7월 세수 60세, 법랍 49년으로 입적하였다. 입적 후 그의 부도를 봉은사 수해구제공덕비(水害救濟功德碑) 옆에 마련하였다.
1925년 대홍수에서 도움을 받았던 광주와 고양의 선리, 부리, 잠실리, 신장리 주민들의 주선으로 수해구제공덕비가 세워지고 당시의 지도층 인사들이 이를 기리는 시화를 모아 불괴비첩(不壞碑帖)을 만들어 자비행을 기렸다.
1898년 24세에 오대산에서 개당(開堂)하여 두루 경을 설하여 학인을 키우기 시작하여 10년 동안 후진 교육에 힘을 쏟았다고 한다. 34세에 서울에 와서 조선불교 원종 총무원에서 감사 부장을 지냈고, 각황사(覺皇寺)에서 포교 활동을 하였다. 1911년 사찰령(寺刹令) 반포와 함께 봉은사가 30본산 중 하나로 정해진 뒤 1912년 봉은사 주지가 되어 절 부근의 황무지를 개간하여 전답과 임야 20만평을 확보하였고, 경내의 각종 전각을 중수하고 창건하면서 봉은사를 정비하였다. 1917년 봉은사에서 열렸던 법회에는 10만 명이 운집했다고 한다. 1925년 5월 “을축년 대홍수”로 인근의 주민들이 떠내려가자 배를 띄워 사람들을 구해내고 의복과 음식을 주어 구휼하여 708명의 목숨을 구했다고 한다. 1934년 7월 세수 60세, 법랍 49년으로 입적하였다. 입적 후 그의 부도를 봉은사 수해구제공덕비(水害救濟功德碑) 옆에 마련하였다.
1925년 대홍수에서 도움을 받았던 광주와 고양의 선리, 부리, 잠실리, 신장리 주민들의 주선으로 수해구제공덕비가 세워지고 당시의 지도층 인사들이 이를 기리는 시화를 모아 불괴비첩(不壞碑帖)을 만들어 자비행을 기렸다.
출처/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한국학중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