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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치 정철조 石痴 鄭喆祚Jeong CheolJo

1730 ~ 1781

조선

서화

작가약력

  • 1730년(영조 6)∼1781년(정조 5). 조선 후기의 문신·서화가.

작가 소개

본관은 해주(海州). 자는 성백(誠伯), 호는 석치(石痴).
증조부는 정중구(鄭重龜)이고, 조부는 정필녕(鄭必寧)으로 1714년(숙종 40) 갑오증광문과(甲午增廣文科)에 을과(乙科) 6등으로 급제하여 호조참판(戶曹參判)을 역임하였다. 아버지 정운유(鄭運維)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정운유는 1756년(영조 32) 병자정시문과(丙子庭試文科)에 을과 2등으로 급제하여 자헌대부(資憲大夫) 공조판서(工曹判書)를 역임하였고 1794년(정조 18)에 익정(翼靖)이란 시호를 받았다. 모친은 원휘(元徽)의 딸이다.
그는 1777년(정조 1) 정유증광사마시(丁酉增廣司馬試)에 생원 2등으로 합격하였고 현감을 지낸 정후조(鄭厚祚)와 그림에 뛰어난 재주를 지닌 정순조(鄭順祚)를 동생으로 두었다. 한편 그의 큰 여동생은 반남(潘南) 박사설(朴師說)의 아들 박우원(朴祐源)에게, 작은 여동생은 여주(驪州) 이용휴(李用休)의 아들 이가환(李家煥)에게 시집을 갔다. 말하자면 석치와 금대(錦帶) 이가환은 서로 처남매부지간이다. 그의 아들은 정시행(鄭時行)이며, 손자는 1828년(순조 28) 무자식년사마시(戊子式年司馬試)에 진사 2등으로 합격하고, 1855년(철종 6) 을묘별시문과(乙卯別試文科)에 병과 4등으로 급제하여 판서를 지낸 정천화(鄭天和)이다.
정철조는 1774년(영조 50) 갑오증광문과(甲午增廣文科)에 병과 7등으로 급제하여 정언(正言)을 지냈다. 그는 홍대용(洪大容)과 함께 김원행(金元行)의 문하에서 동문수학하였다.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과는 인척관계로 맺어졌으며, 이른바 연암 집단인 이덕무(李德懋), 박제가(朴齊家), 이서구(李書九), 유득공(柳得恭) 등과 교유하였다. 그 외 이용휴, 이가환 부자, 정상기(鄭尙驥), 황윤석, 김이안(金履安) 등과 교유하였다.
정철조는 1772년(영조 48) 이후로 연암 집단과 지속적인 교류를 통하여 문학과 예술, 실용적인 학문 등을 연마하였다. 그는 인중(기중기), 승고(도르래), 마전(맷돌), 취수(수차) 등과 같은 기계들을 손수 만들고 그것을 시험하였다. 그는 서양과학서적을 연구하여 천문관측이나 역산에 대해서도 상당한 조예를 갖추었다. 그는 또한 동국지도를 만든 정상기와 교류하였는데, 여지도 방면에 심오한 학문적 조예가 있었다. 다른 한편으로 정밀한 그림에도 뛰어나 정조의 초상화를 그리기도 하였다.
정철조는 주로 박지원 · 박제가 · 홍대용 · 황윤석 등 북학파 인사들과 교분이 두터웠다. 또 동생 정후조(鄭厚祚)와 함께 하동정씨 가문의 정상기(鄭尙驥)가 제작한 지도를 수보(修補)하였고, 정상기의 증손자인 문인화가 정수영(鄭遂榮)이 『해산첩(海山帖)』에서 정철조의 <금강산도>에 대해 평한 구절이 있어 양가의 인사들이 교유했을 가능성이 높다. 이규상(李奎象)과 이덕무(李德懋) · 황윤석 · 정수영 등이 남긴 기록에서 서화와 문방(文房)에 대한 애호취미와 기호를 짐작할 수 있다.
남종화풍 산수도와 <금강산도> 같은 진경산수화, 그리고 사슴 그림 같은 동물화를 그렸는가 하면 핍진한 묘사력이 요구되는 초상화 실력도 갖추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현재 전하는 작품은 그리 많지 않다. 안평대군의 별장이었던 무계정사(武溪精舍) 터를 중심으로 주변 일대의 경관을 담은 <무계구기(武溪舊基)>는 현장을 충실히 재현하기보다는 흥이 실리는 대로 거칠고 소략한 필치로 소화한 문인화풍 진경산수화이다.
출처/한국역대인물종합정보시스템, 한국역대서화가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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