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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산 이상규 惠山 李祥奎Lee SangGyu

1847 ~ 1923

조선

작가약력

  • 1847(헌종 13)∼1923. 조선 말기의 유학자.

작가 소개

자는 명뢰(明賚)이고, 호는 혜산(惠山)이다. 본관은 함안(咸安)이고, 출신지는 경상남도 고성군(固城郡) 무양리(武陽里)이다. 증조부는 사복시정에 증직된 죽와(竹窩) 이광호(李光浩), 조부는 증이조참의(贈吏曺參議) 이기덕(李基德)이며, 부친은 이제권(李濟權)이다. 처부는 의성김씨(義城金氏) 김우진(金佑鎭)이다.
어려서 종조부를 따라 향교에 가서 석전례(釋奠禮)를 보고 온 후로 친구들과 놀 때조차도 예의를 지키기 위해 노력하였으며, 숙부에게서 『소학(小學)』을 배웠다. 1864년(고종 1)에 과거에 응시하여 자신의 포부를 펼치려고 하였으나 낙방하였다. 고향으로 돌아온 그는 소정(韶亭) 조성교(趙性敎)에게 출처대절(出處大節: 군자가 벼슬에 나갈 때와 나가지 말아야 할 때)을 배우고 이후 과거 공부를 포기하였다. 1872년(고종 9) 동생 이영규(李榮奎)와 함께 당시 김해부사(金海府使)로 와 있는 성재(性齋) 허전(許傳)에게서 『대학(大學)』과 『중용(中庸)』을 배웠다. 이어 그는 만성(晩醒) 박치복(朴致馥: 1824∼1894), 단계(端磎) 김인섭(金隣燮: 1827∼1903), 해려(海閭) 권상적(權相迪) 등 당시 지역의 이름난 선비를 찾아가 성명(性命)을 비롯한 성리학에 대해 질정하였다.
1876년(고종 13), 1877년(고종 14) 아버지와 어머니의 회갑에 흉년이 들자 그는 부모의 회갑연 대신 빈민에게 곡식을 나눠주었다.
1880년(고종 17) 고성에서 단성(丹城) 묵곡(墨谷)으로 옮긴 이후 번잡한 세상일에 관심을 두지 않고 학문에만 더 전념하였다. 당시 지리산 아래서 학문에 정진 중이던 이조참판(吏曹參判) 이세재(李世宰)가 그를 보고 뛰어난 선비라며 조정에 천거하여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가 제수(除授)되었으나 나가지 않았다.
스승인 성재 허전이 세상을 떠나자, 그는 심상(心喪) 3년을 입었으며, 단성 이택당(麗澤堂)에 스승 허전의 영정을 모시는 일을 주도하였다. 1905년(광무 9) 을사늑약이 체결되었다는 소식을 접한 그는 울분을 시로 토로하였으며, 탁청대(濯淸臺)와 환구정(喚驅亭)을 지어 은거하였다. 1910년(융희 4) 경술국치 때에는 비록 나라는 망하였지만 마음까지 망할 수는 없다고 하며 더욱 학문에 정진하였다. 1921년 제자들에게 ‘숭정학(崇正學)’ 세 글자를 유언으로 남겼다.
저서로 문집 『혜산선생문집(惠山先生文集)』이 있다.
출처/한국역대인물종합정보시스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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