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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저 조익 浦渚 趙翼Cho Ik
1579 ~ 1655
조선
작가약력
- 1579(선조 12)~1655(효종 6). 조선 후기 우의정, 좌의정, 중추부영사 등을 역임한 문신.
작가 소개
본관은 풍양(豐壤). 자는 비경(飛卿), 호는 포저(浦渚)·존재(存齋). 오위도총부부총관 조안국(趙安國)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현령 조간(趙侃)이고, 아버지는 중추부첨지사 조영중(趙瑩中)이다. 어머니는 찬성 윤근수(尹根壽)의 딸이다. 장현광(張顯光)·윤근수의 문인이다.
임진왜란 중 음보로 정포만호(井浦萬戶)가 되어 1598년(선조 31) 군량미 23만 석을 운반하는 공을 세웠다. 왜란이 끝난 뒤 다시 수학하여 1602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승문원정자에 임명되어 본격적인 벼슬살이를 시작하였다. 이후 삼사의 관직을 두루 지내던 중, 1611년(광해군 3)김굉필(金宏弼)·조광조(趙光祖)·이언적(李彦迪)·정여창(鄭汝昌) 등을 문묘에 배향할 것을 주장하다가 고산도찰방으로 좌천되고, 이어 웅천현감을 역임하였다. 뒤이어 인목대비(仁穆大妃)가 유폐되는 사태가 빚어지자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인 광주(廣州)로 은거했다가 충청도 신창으로 옮겨 살았다. 1623년 인조가 즉위하자 이조좌랑에 임용되어 신창 도고산(道高山) 아래 모옥(茅屋)을 떠나 다시 조정에 들어갔다. 이듬해이괄(李适)의 난을 겪은 뒤 의정부 검상·사인(舍人)에 임명되고, 이어 응교·직제학 등을 거쳐 동부승지에 올랐다. 1631년 어머니가 죽자 잠시 벼슬을 떠났으나, 3년 상을 마친 뒤 곧 관직에 복귀하였다. 한성부우윤·개성부유수·대사간·이조참판·대사성·예조판서·대사헌·공조판서·한성부판윤 등을 두루 역임하면서 이원익(李元翼)을 도와 대동법(大同法)을 확대하고 관리하는 일에도 적극 참여하였다. 1636년 예조판서로 있을 때 병자호란을 당하자 종묘를 강화도로 옮기고 뒤이어 인조를 호종하려다가, 아들 진양(進陽)에게 강화로 모시게 했던 80세의 아버지가 도중에 실종되어 아버지를 찾느라고 남한산성으로 인조를 호종할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그리하여 호란이 끝난 뒤 그 죄가 거론되어 관직을 삭탈당하고 유배되었지만, 그 까닭이 효성을 다하고자 한 데 있었고, 또 아버지를 무사히 강화로 도피시킨 뒤 윤계(尹棨)·심지원(沈之源) 등과 함께 경기 지역의 패잔병들을 모아 남한산성을 포위하고 있는 적을 공격하며 입성하고자 노력한 사실이 참작되어 그 해 12월에 석방되었다. 그리고 3년 뒤에는 원손보양관(元孫輔養官)으로 조정에 들라는 하명을 받았으나, 늙은 아버지를 봉양해야 한다는 이유로 거절하였다. 뒤이어 예조판서·이조판서·대사헌의 직이 내려졌지만, 모두 사양하다가 아버지가 죽고 상복을 벗게 되자 1648년 좌참찬이 되어 다시 조정에 나갔다. 이후 1655년 3월 중추부영사(中樞府領事)로 죽기까지 우의정·좌의정과 중추부 판사·영사의 자리를 거듭 역임하였다. 윤방(尹昉)의 시장(諡狀) 사건에 관련되어 몇 개월 동안 삭직되고 문외출송(門外黜送)되는 고초를 겪기도 했으나, 대체로 무난하게 벼슬 생활을 하면서 김육(金堉)과 함께 대동법을 확장, 시행하는 데 기여하였다. 또 각종 폐막(弊瘼)을 개혁하는 데에도 전념하였다. 한편으로 학문에도 정진, 『곤지록 困知錄』·『중용주해 中庸註解』·『대학주해 大學註解』·『서경천설 書經淺說』 등을 지어 효종에게 바쳤다. 이 저술들은 주자(朱子)의 장구(章句)를 크게 고친 것이었지만, 사람들은 감히 이를 헐뜯지 못했다고 한다.
고향 광주에서 77세로 죽으니 효종은 시호를 내리고, 6월에 대흥(大興)동화산(東華山) 아래에 장례하기까지 관원을 보내어 치조(致弔)하였다. 뒷날 광주(廣州)의 명고서원(明皐書院), 개성의 숭양서원(崧陽書院), 신창의 도산서원(道山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위의 논술 외에 문집으로 『포저집』 35권 18책이 전하고, 『역상개략 易象槪略』은 이름만 전한다.
성리학의 대가로서 예학에 밝았으며, 경학·병법·복술에도 뛰어났다. 어려서부터 변함없이 우정을 지켜온 장유(張維)·최명길(崔鳴吉)·이시백(李時白)과 함께 ‘사우(四友)’라 불려졌다. 시호는 문효(文孝)이다.
임진왜란 중 음보로 정포만호(井浦萬戶)가 되어 1598년(선조 31) 군량미 23만 석을 운반하는 공을 세웠다. 왜란이 끝난 뒤 다시 수학하여 1602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승문원정자에 임명되어 본격적인 벼슬살이를 시작하였다. 이후 삼사의 관직을 두루 지내던 중, 1611년(광해군 3)김굉필(金宏弼)·조광조(趙光祖)·이언적(李彦迪)·정여창(鄭汝昌) 등을 문묘에 배향할 것을 주장하다가 고산도찰방으로 좌천되고, 이어 웅천현감을 역임하였다. 뒤이어 인목대비(仁穆大妃)가 유폐되는 사태가 빚어지자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인 광주(廣州)로 은거했다가 충청도 신창으로 옮겨 살았다. 1623년 인조가 즉위하자 이조좌랑에 임용되어 신창 도고산(道高山) 아래 모옥(茅屋)을 떠나 다시 조정에 들어갔다. 이듬해이괄(李适)의 난을 겪은 뒤 의정부 검상·사인(舍人)에 임명되고, 이어 응교·직제학 등을 거쳐 동부승지에 올랐다. 1631년 어머니가 죽자 잠시 벼슬을 떠났으나, 3년 상을 마친 뒤 곧 관직에 복귀하였다. 한성부우윤·개성부유수·대사간·이조참판·대사성·예조판서·대사헌·공조판서·한성부판윤 등을 두루 역임하면서 이원익(李元翼)을 도와 대동법(大同法)을 확대하고 관리하는 일에도 적극 참여하였다. 1636년 예조판서로 있을 때 병자호란을 당하자 종묘를 강화도로 옮기고 뒤이어 인조를 호종하려다가, 아들 진양(進陽)에게 강화로 모시게 했던 80세의 아버지가 도중에 실종되어 아버지를 찾느라고 남한산성으로 인조를 호종할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그리하여 호란이 끝난 뒤 그 죄가 거론되어 관직을 삭탈당하고 유배되었지만, 그 까닭이 효성을 다하고자 한 데 있었고, 또 아버지를 무사히 강화로 도피시킨 뒤 윤계(尹棨)·심지원(沈之源) 등과 함께 경기 지역의 패잔병들을 모아 남한산성을 포위하고 있는 적을 공격하며 입성하고자 노력한 사실이 참작되어 그 해 12월에 석방되었다. 그리고 3년 뒤에는 원손보양관(元孫輔養官)으로 조정에 들라는 하명을 받았으나, 늙은 아버지를 봉양해야 한다는 이유로 거절하였다. 뒤이어 예조판서·이조판서·대사헌의 직이 내려졌지만, 모두 사양하다가 아버지가 죽고 상복을 벗게 되자 1648년 좌참찬이 되어 다시 조정에 나갔다. 이후 1655년 3월 중추부영사(中樞府領事)로 죽기까지 우의정·좌의정과 중추부 판사·영사의 자리를 거듭 역임하였다. 윤방(尹昉)의 시장(諡狀) 사건에 관련되어 몇 개월 동안 삭직되고 문외출송(門外黜送)되는 고초를 겪기도 했으나, 대체로 무난하게 벼슬 생활을 하면서 김육(金堉)과 함께 대동법을 확장, 시행하는 데 기여하였다. 또 각종 폐막(弊瘼)을 개혁하는 데에도 전념하였다. 한편으로 학문에도 정진, 『곤지록 困知錄』·『중용주해 中庸註解』·『대학주해 大學註解』·『서경천설 書經淺說』 등을 지어 효종에게 바쳤다. 이 저술들은 주자(朱子)의 장구(章句)를 크게 고친 것이었지만, 사람들은 감히 이를 헐뜯지 못했다고 한다.
고향 광주에서 77세로 죽으니 효종은 시호를 내리고, 6월에 대흥(大興)동화산(東華山) 아래에 장례하기까지 관원을 보내어 치조(致弔)하였다. 뒷날 광주(廣州)의 명고서원(明皐書院), 개성의 숭양서원(崧陽書院), 신창의 도산서원(道山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위의 논술 외에 문집으로 『포저집』 35권 18책이 전하고, 『역상개략 易象槪略』은 이름만 전한다.
성리학의 대가로서 예학에 밝았으며, 경학·병법·복술에도 뛰어났다. 어려서부터 변함없이 우정을 지켜온 장유(張維)·최명길(崔鳴吉)·이시백(李時白)과 함께 ‘사우(四友)’라 불려졌다. 시호는 문효(文孝)이다.
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