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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봉 이호민 五峯 李好閔Lee HoMin
1553 ~ 1634
조선
작가약력
- 1553(명종 8)∼1634(인조 12). 조선 중기의 문신.
작가 소개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효언(孝彦), 호는 오봉(五峯)·남곽(南郭)·수와(睡窩). 증조부는 호조판서·적개좌리공신 연안군(延安君)이숙기(李淑琦), 할아버지는 홍문관수찬이세범(李世範)이며 아버지는 이천현감(伊川縣監)이국주(李國柱)이다. 어머니는 정경부인으로 비안 박씨(比安朴氏) 사직 박여(朴旅)의 딸이다.
이호민은 1579년(선조 12)에 진사가 됐으며 1584년(선조 17)에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했다. 1585년(선조 18)에 사관(史官)으로 발탁됐으며 응교와 전한을 역임했다. 후에 집의·응교를 겸직했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에는 이조좌랑에 있으면서 왕을 의주까지 호종했다. 임진왜란 중에는 요양(遼陽)으로 가서 명나라에 지원을 요청해 명나라의 군대를 끌어들이는 데에 크게 공헌했다. 그 뒤에는 상호군(上護軍)·행사직(行司直)을 거쳤으며 1595년(선조 28)에는 부제학으로 명나라에 보내는 외교문서를 전담했다. 1596년(선조 29)에는 참찬관(參贊官)을 지냈다. 1599년(선조 32)에 동지중추부사가 되어 사은사(謝恩使)로서 명나라에 다녀왔다. 1601년(선조 34) 예조판서로 인성왕후(仁聖王后)의 지문(誌文)을 다시 썼으며 대제학 및 좌찬성을 지냈다. 1604년(선조 37)에 호성공신(扈聖功臣 : 임진왜란 때 선조를 모시고 의주까지 호종한 공이 있는 사람에게 준 칭호) 2등으로 연릉군(延陵君)에 봉해졌다. 그 뒤에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가 됐으며 부원군(府院君)에 진봉됐다. 이호민은 1608년 선조가 죽자, 영창대군(永昌大君)의 즉위를 반대하며 장자를 옹립해야 된다고 주장했다. 광해군이 즉위하자 고부청시승습사(告訃請諡承襲使)로 명나라에 가서 입장론(立長論 : 장자를 세워야 한다는 주장)을 내세웠다. 광해군이 임무를 성실히 수행하고 온 것에 대하여 포상하려 했으나 「고부시공로사차(告訃時功勞辭箚)」를 올려 사양했다. 한편, 1612년(광해군 4) 김직재(金直哉)의 옥사에 연루되기도 했다. 1614년(광해군 6) 정온(鄭蘊) 등이 영창대군 살해에 대한 항의를 하다가 귀양 가게 되자 「청환수정온보외차(請還收鄭蘊輔外箚)」를 올려 이들의 방면을 요구했다. 1615년(광해군 7) 정인홍(鄭仁弘) 등의 원찬론(遠竄論)으로 인해 7년간 교외에서 죄를 기다렸다. 인조반정 후에 오래된 신하로 우대를 받았다.
이호민은 문장에 뛰어났다. 특히 임진왜란 때에는 왕명으로 각종 글을 작성하였는데 그가 지은 교서(敎書)는 내용이 간절하고 표현이 아름다워 보는 이의 감동을 자아냈다고 한다. 그러나 교서 등의 글보다는 한시에 뛰어나다는 평을 들었다. 의주에 있을 때에 일본의 수중에 있던 서울을 삼도의 군사가 연합해 공격한다는 소식을 듣고 지은 시 「용만행재하삼도병진공한성(龍灣行在下三道兵進攻漢城)」은 절창으로 널리 애송됐다. 저서로는 『오봉집(五峰集)』 16권이 있다. 죽은 뒤에 청백리에 올랐으며 지례(知禮)의 도동향사(道東鄕祠)에 제향됐다. 시호는 문희(文僖)이다.
이호민은 1579년(선조 12)에 진사가 됐으며 1584년(선조 17)에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했다. 1585년(선조 18)에 사관(史官)으로 발탁됐으며 응교와 전한을 역임했다. 후에 집의·응교를 겸직했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에는 이조좌랑에 있으면서 왕을 의주까지 호종했다. 임진왜란 중에는 요양(遼陽)으로 가서 명나라에 지원을 요청해 명나라의 군대를 끌어들이는 데에 크게 공헌했다. 그 뒤에는 상호군(上護軍)·행사직(行司直)을 거쳤으며 1595년(선조 28)에는 부제학으로 명나라에 보내는 외교문서를 전담했다. 1596년(선조 29)에는 참찬관(參贊官)을 지냈다. 1599년(선조 32)에 동지중추부사가 되어 사은사(謝恩使)로서 명나라에 다녀왔다. 1601년(선조 34) 예조판서로 인성왕후(仁聖王后)의 지문(誌文)을 다시 썼으며 대제학 및 좌찬성을 지냈다. 1604년(선조 37)에 호성공신(扈聖功臣 : 임진왜란 때 선조를 모시고 의주까지 호종한 공이 있는 사람에게 준 칭호) 2등으로 연릉군(延陵君)에 봉해졌다. 그 뒤에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가 됐으며 부원군(府院君)에 진봉됐다. 이호민은 1608년 선조가 죽자, 영창대군(永昌大君)의 즉위를 반대하며 장자를 옹립해야 된다고 주장했다. 광해군이 즉위하자 고부청시승습사(告訃請諡承襲使)로 명나라에 가서 입장론(立長論 : 장자를 세워야 한다는 주장)을 내세웠다. 광해군이 임무를 성실히 수행하고 온 것에 대하여 포상하려 했으나 「고부시공로사차(告訃時功勞辭箚)」를 올려 사양했다. 한편, 1612년(광해군 4) 김직재(金直哉)의 옥사에 연루되기도 했다. 1614년(광해군 6) 정온(鄭蘊) 등이 영창대군 살해에 대한 항의를 하다가 귀양 가게 되자 「청환수정온보외차(請還收鄭蘊輔外箚)」를 올려 이들의 방면을 요구했다. 1615년(광해군 7) 정인홍(鄭仁弘) 등의 원찬론(遠竄論)으로 인해 7년간 교외에서 죄를 기다렸다. 인조반정 후에 오래된 신하로 우대를 받았다.
이호민은 문장에 뛰어났다. 특히 임진왜란 때에는 왕명으로 각종 글을 작성하였는데 그가 지은 교서(敎書)는 내용이 간절하고 표현이 아름다워 보는 이의 감동을 자아냈다고 한다. 그러나 교서 등의 글보다는 한시에 뛰어나다는 평을 들었다. 의주에 있을 때에 일본의 수중에 있던 서울을 삼도의 군사가 연합해 공격한다는 소식을 듣고 지은 시 「용만행재하삼도병진공한성(龍灣行在下三道兵進攻漢城)」은 절창으로 널리 애송됐다. 저서로는 『오봉집(五峰集)』 16권이 있다. 죽은 뒤에 청백리에 올랐으며 지례(知禮)의 도동향사(道東鄕祠)에 제향됐다. 시호는 문희(文僖)이다.
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