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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구름 한형석 遠雲 韓亨錫Han HyeongSeok
1910 ~ 1996
근대·현대
음악
작가약력
- 일제 강점기 부산 출신의 독립운동가이자 음악가.
작가 소개
호는 먼구름[遠雲]. 아버지는 한흥교(韓興敎)[1885년생]이고, 어머니는 이인옥(李仁玉)[1883년생]이다. 형 한원석, 동생 한천석·한연석·한갑석·한화석·한정석이 있다. 아버지 한흥교는 일본 오카야마의학전문학교[岡山醫學專門學校]에 유학한 엘리트이며 중국에서 항일 운동을 전개한 독립운동가이다.
한형석(韓亨錫)은 1910년 2월 21일 부산광역시 동래구 명륜동에서 4남 3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1915년 가족과 함께 중국 상하이[上海]로 가서 처음으로 아버지를 대면하였다. 이후 1923년 베이징의 육영소학교, 1926년 육영중학교, 1929년 베이징 노하고급중학교를 졸업하였다. 대한민국 임시 정부 요인인 조성환의 권고로 구국 예술 운동에 뜻을 두고, 상하이 신화예술대학(新華藝術大學) 예술교육과에 입학하여 음악과 연극을 공부하고 1933년에 졸업하였다. 윤봉길(尹奉吉) 의사 의거 후 일제 수사대의 압박이 심해지자 1933년 한유한(韓悠韓)으로 개명하였다.
대학을 졸업한 후 중국군에 속하여 산둥성[山東省]과 개봉(開封), 서안(西安) 등 중국 북부와 서부 일대 전선의 전후방을 누비며 항일 혁명 투쟁에 투신하였다. 이 과정에서 1934년 산둥성 당읍현(堂邑縣)의 무훈중학교 예술 교사 겸 영어 교사, 산둥행정인원훈련소 교관 겸 산둥성립여자사범 부속 소학교 교사, 1937년 중국희극학회 소속 제2항일연극대장, 1939년 중국 중앙군 34집단군 제10사 정치부 공작대장, 한국청년전지공작대 음악 교관 또는 예술부장으로 활동하였다.
1939년 항일 가극 「아리랑」을 작곡하여 발표하는 등 항일 가곡과 군가를 작곡하여 보급하였다. 항일 연극을 제작하기도 하였으며 때로 직접 전투에 참여하였다. 1941년 한국광복군이 창설되자 1944년 한국광복군 제2제대 선전부장 겸 중국희극학회 부회장으로, 한중 협력 공동 항전을 위한 활동을 이어나갔다. 1943년 10월에는 『광복군가집』 제1집, 제2집을 간행하여 보급하기도 하였다.
해방이 되자 산둥성 제남(濟南)에서 교포 송환 귀국 사업에 종사하다가, 1948년 9월 칭다오[靑島]에서 인천으로 30년 만에 귀국하였다. 이후 서울중앙방송국 촉탁 방송 위원[1948년 11월~1949년 11월], 부산 문화 극장 대표[1950년 6월~1951년 3월], 자유 아동 극장 대표[1953년 8월~1956년 8월], 부산대학교 문리대학 교수[1955년 6월~1975년 2월], 부산대학교·부산여자대학교·경성대학교 강사[1975~1988년] 등을 지냈다. 상록수합창단 제2대 단장[1980~1981년]으로도 활약하였다.
특히 6·25 전쟁 이후 서구 부민동 변전소 옆에 설립된 자유 아동 극장에서는 2년간 약 500여 회의 공연을 하였고, 이를 12만여 명의 아동들에게 무료로 관람하게 하였다. 자유 아동 극장에 개설된 색동야학원에서는 매일 밤 80~90명에 이르는 직업 아동들에게 국민 교육을 실시하기도 하였다.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던 한형석은 1996년 6월 14일 부산광역시 서구 부민동 3가 8번지 자택에서 향년 87세의 나이로 삶을 마감하였다.
한형석이 창작한 음악은 크게 가극류[특히 아동 가극], 서정 가곡, 광복군가의 세 갈래로 나눌 수 있다. 이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로 가극류는 아동 가극, 항일 가극, 가극, 아동 가무극, 가창 낭송극으로 나뉜다. 아동 가극 「리나[麗那]」[1937]는 「유랑자의 노래[流浪人之歌]」[남성 독창]와 「반공 급진곡(反攻及進曲)」[합창]으로 구성되어 있다. 항일 가극 「신중국 만세(新中國萬歲)」[1937]는 「봄의 빛[春天的光陽]」[테너 독창], 「신중국 건설[建設新中國]」[합창], 「여명의 노래[黎明之曲]」[독창·중창·합창], 「고향의 달[故鄕月]」[소프라노 독창], 「작은 새의 노래[小鳥的歌]」[소프라노 독창], 「출정 행진곡(出征行進曲)」[합창], 「농촌 무곡(農村舞曲)」[여성 합창]으로 구성되어 있다. 가극 「아리랑(啊哩朗)」[1939]은 「서곡」, 「봄이 왔네」[한국 민요, 시골 처녀 독창], 「목동의 노래[牧歌]」[창작 노래, 목동 독창], 「한국 강산 삼천리(韓國江山三千里)」[혁명군 합창], 「아리랑」[한국 민요, 도망자의 합창], 「고향 생각」[한국 민요, 목동과 시골 처녀의 합창], 「한국 행진곡(韓國行進曲)」[창작 노래]으로 구성되어 있다. 아동 가무극 「승리 무곡(勝利舞曲)」[1941]은 「농촌 무곡(農村舞曲)」, 「중국 무곡(中國舞曲)」, 「옷 짓는 노래[縫衣曲]」, 「승리 무곡」, 「오늘에서야 원한을 갚는다[報仇雪恨在今天]」, 「혈제국기(血祭國旗)」로 구성되어 있다. 이외에 가창 낭송극 「다음 세대[下一代]」[1941]와 아동 가무극 「어린 양들[小山羊]」[1941]이 있다. 또한 아동 가무극 「낙원 행진곡(樂園行進曲)」[1944]은 제1장 「우리는 포화 속에서 유랑한다」, 제2장 「공장에 가다」, 제3장 「어딜 가나 소떼와 말떼」, 제4장 「학생들이여 학교로 오라」, 제5장 「우리는 모두 새로운 영웅들」, 제6장 「높고 푸른 끝없는 하늘」로 구성되어 있다.
둘째, 서정 가곡으로 「신가극 삽곡(新歌劇 揷曲)」[1940]이 있다. 이 가곡은 「출정 떠나는 님을 보내며[送郞出征]」[리쟈 작사], 「오늘에서야 원한을 갚는다[報仇雪恨在今天]」[리쟈 작사, 중국어], 정의의 노래[正義之歌]」[냉파(冷波) 작사], 「전사가(戰士歌)」[장견인(蔣堅忍) 작사, 중국어], 「황하강변의 달[黃河邊的月]」[리쟈 작사], 「고향을 잃은 자매[失去了家鄕的姊妹]」[리쟈 작사]로 구성되어 있다.
셋째, 광복군가를 많이 만들었으며 이를 담은 군가집 두 권이 간행되었다. 그 중에 『광복군가집』 제1집[한국광복군 제2지대 선전위원회, 1943]에는 「국기가(國旗歌)」[이범석 작사], 「2지대가(二支隊歌)」[이해평 작사], 「신출발(新出發)」[신덕영 작사], 「압록강 행진곡(鴨綠江行進曲)」[박영만 작사], 「조국 행진곡(祖國行進曲)」[신덕영 작사], 「여명의 노래」[이해평 작사], 「우리나라 어머니」[신덕영 작사], 「흘러가는 저 구름」[신덕영 작사]이 수록되어 있다.
1970년 5월 제13회 눌원 문화상을 받았다. 1977년 12월에 건국 포장, 1990년에 건국 훈장 애국장을 받았다. 2002년 가곡집 『잊을 수 없는 선율』이 발행되었다. 2004년 6월 14일 옛 지인과 유족을 중심으로 ‘먼구름 한형석 선생 추모사업회’가 만들어졌다. 광복 60주년이었던 2005년 8월 16일 한울림합창단이 기념 음악회 ‘대륙에 묻힌 이름: 항일 독립운동 음악가 한형석’을 부산 문화 회관 중강당에서 열었다. 특히 한울림합창단은 숫자보로 된 한형석의 작품을 오선보로 옮기고, 여기에 편곡 작업을 더해 『한형석 작곡집 1: 먼구름』[예솔]을 펴냈다. 2006년 6월 15일부터 10월 29일까지 부산 근대 역사관 특별 기획전 ‘대륙에 울려 퍼진 항일 정신-먼구름 한형석의 생애와 독립운동’이 개최되었다. 2011년 8월 24 『광복군가집』 제1집이 등록 문화재 제474호로 지정되었다.
한형석(韓亨錫)은 1910년 2월 21일 부산광역시 동래구 명륜동에서 4남 3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1915년 가족과 함께 중국 상하이[上海]로 가서 처음으로 아버지를 대면하였다. 이후 1923년 베이징의 육영소학교, 1926년 육영중학교, 1929년 베이징 노하고급중학교를 졸업하였다. 대한민국 임시 정부 요인인 조성환의 권고로 구국 예술 운동에 뜻을 두고, 상하이 신화예술대학(新華藝術大學) 예술교육과에 입학하여 음악과 연극을 공부하고 1933년에 졸업하였다. 윤봉길(尹奉吉) 의사 의거 후 일제 수사대의 압박이 심해지자 1933년 한유한(韓悠韓)으로 개명하였다.
대학을 졸업한 후 중국군에 속하여 산둥성[山東省]과 개봉(開封), 서안(西安) 등 중국 북부와 서부 일대 전선의 전후방을 누비며 항일 혁명 투쟁에 투신하였다. 이 과정에서 1934년 산둥성 당읍현(堂邑縣)의 무훈중학교 예술 교사 겸 영어 교사, 산둥행정인원훈련소 교관 겸 산둥성립여자사범 부속 소학교 교사, 1937년 중국희극학회 소속 제2항일연극대장, 1939년 중국 중앙군 34집단군 제10사 정치부 공작대장, 한국청년전지공작대 음악 교관 또는 예술부장으로 활동하였다.
1939년 항일 가극 「아리랑」을 작곡하여 발표하는 등 항일 가곡과 군가를 작곡하여 보급하였다. 항일 연극을 제작하기도 하였으며 때로 직접 전투에 참여하였다. 1941년 한국광복군이 창설되자 1944년 한국광복군 제2제대 선전부장 겸 중국희극학회 부회장으로, 한중 협력 공동 항전을 위한 활동을 이어나갔다. 1943년 10월에는 『광복군가집』 제1집, 제2집을 간행하여 보급하기도 하였다.
해방이 되자 산둥성 제남(濟南)에서 교포 송환 귀국 사업에 종사하다가, 1948년 9월 칭다오[靑島]에서 인천으로 30년 만에 귀국하였다. 이후 서울중앙방송국 촉탁 방송 위원[1948년 11월~1949년 11월], 부산 문화 극장 대표[1950년 6월~1951년 3월], 자유 아동 극장 대표[1953년 8월~1956년 8월], 부산대학교 문리대학 교수[1955년 6월~1975년 2월], 부산대학교·부산여자대학교·경성대학교 강사[1975~1988년] 등을 지냈다. 상록수합창단 제2대 단장[1980~1981년]으로도 활약하였다.
특히 6·25 전쟁 이후 서구 부민동 변전소 옆에 설립된 자유 아동 극장에서는 2년간 약 500여 회의 공연을 하였고, 이를 12만여 명의 아동들에게 무료로 관람하게 하였다. 자유 아동 극장에 개설된 색동야학원에서는 매일 밤 80~90명에 이르는 직업 아동들에게 국민 교육을 실시하기도 하였다.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던 한형석은 1996년 6월 14일 부산광역시 서구 부민동 3가 8번지 자택에서 향년 87세의 나이로 삶을 마감하였다.
한형석이 창작한 음악은 크게 가극류[특히 아동 가극], 서정 가곡, 광복군가의 세 갈래로 나눌 수 있다. 이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로 가극류는 아동 가극, 항일 가극, 가극, 아동 가무극, 가창 낭송극으로 나뉜다. 아동 가극 「리나[麗那]」[1937]는 「유랑자의 노래[流浪人之歌]」[남성 독창]와 「반공 급진곡(反攻及進曲)」[합창]으로 구성되어 있다. 항일 가극 「신중국 만세(新中國萬歲)」[1937]는 「봄의 빛[春天的光陽]」[테너 독창], 「신중국 건설[建設新中國]」[합창], 「여명의 노래[黎明之曲]」[독창·중창·합창], 「고향의 달[故鄕月]」[소프라노 독창], 「작은 새의 노래[小鳥的歌]」[소프라노 독창], 「출정 행진곡(出征行進曲)」[합창], 「농촌 무곡(農村舞曲)」[여성 합창]으로 구성되어 있다. 가극 「아리랑(啊哩朗)」[1939]은 「서곡」, 「봄이 왔네」[한국 민요, 시골 처녀 독창], 「목동의 노래[牧歌]」[창작 노래, 목동 독창], 「한국 강산 삼천리(韓國江山三千里)」[혁명군 합창], 「아리랑」[한국 민요, 도망자의 합창], 「고향 생각」[한국 민요, 목동과 시골 처녀의 합창], 「한국 행진곡(韓國行進曲)」[창작 노래]으로 구성되어 있다. 아동 가무극 「승리 무곡(勝利舞曲)」[1941]은 「농촌 무곡(農村舞曲)」, 「중국 무곡(中國舞曲)」, 「옷 짓는 노래[縫衣曲]」, 「승리 무곡」, 「오늘에서야 원한을 갚는다[報仇雪恨在今天]」, 「혈제국기(血祭國旗)」로 구성되어 있다. 이외에 가창 낭송극 「다음 세대[下一代]」[1941]와 아동 가무극 「어린 양들[小山羊]」[1941]이 있다. 또한 아동 가무극 「낙원 행진곡(樂園行進曲)」[1944]은 제1장 「우리는 포화 속에서 유랑한다」, 제2장 「공장에 가다」, 제3장 「어딜 가나 소떼와 말떼」, 제4장 「학생들이여 학교로 오라」, 제5장 「우리는 모두 새로운 영웅들」, 제6장 「높고 푸른 끝없는 하늘」로 구성되어 있다.
둘째, 서정 가곡으로 「신가극 삽곡(新歌劇 揷曲)」[1940]이 있다. 이 가곡은 「출정 떠나는 님을 보내며[送郞出征]」[리쟈 작사], 「오늘에서야 원한을 갚는다[報仇雪恨在今天]」[리쟈 작사, 중국어], 정의의 노래[正義之歌]」[냉파(冷波) 작사], 「전사가(戰士歌)」[장견인(蔣堅忍) 작사, 중국어], 「황하강변의 달[黃河邊的月]」[리쟈 작사], 「고향을 잃은 자매[失去了家鄕的姊妹]」[리쟈 작사]로 구성되어 있다.
셋째, 광복군가를 많이 만들었으며 이를 담은 군가집 두 권이 간행되었다. 그 중에 『광복군가집』 제1집[한국광복군 제2지대 선전위원회, 1943]에는 「국기가(國旗歌)」[이범석 작사], 「2지대가(二支隊歌)」[이해평 작사], 「신출발(新出發)」[신덕영 작사], 「압록강 행진곡(鴨綠江行進曲)」[박영만 작사], 「조국 행진곡(祖國行進曲)」[신덕영 작사], 「여명의 노래」[이해평 작사], 「우리나라 어머니」[신덕영 작사], 「흘러가는 저 구름」[신덕영 작사]이 수록되어 있다.
1970년 5월 제13회 눌원 문화상을 받았다. 1977년 12월에 건국 포장, 1990년에 건국 훈장 애국장을 받았다. 2002년 가곡집 『잊을 수 없는 선율』이 발행되었다. 2004년 6월 14일 옛 지인과 유족을 중심으로 ‘먼구름 한형석 선생 추모사업회’가 만들어졌다. 광복 60주년이었던 2005년 8월 16일 한울림합창단이 기념 음악회 ‘대륙에 묻힌 이름: 항일 독립운동 음악가 한형석’을 부산 문화 회관 중강당에서 열었다. 특히 한울림합창단은 숫자보로 된 한형석의 작품을 오선보로 옮기고, 여기에 편곡 작업을 더해 『한형석 작곡집 1: 먼구름』[예솔]을 펴냈다. 2006년 6월 15일부터 10월 29일까지 부산 근대 역사관 특별 기획전 ‘대륙에 울려 퍼진 항일 정신-먼구름 한형석의 생애와 독립운동’이 개최되었다. 2011년 8월 24 『광복군가집』 제1집이 등록 문화재 제474호로 지정되었다.
출처/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한국학중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