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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무 이제마 東武 李濟馬Lee JeMa

1837 ~ 1900

조선

작가약력

  • 1837(헌종 3)~1900(광무 4). 개항기 『동의수세보원』, 『격치고』 등을 저술한 학자. 의학자.

작가 소개

이제마(李濟馬)는 전주이씨로 태조 이성계의 고조(高祖)인 목조(穆祖)의 2남 안원대군(安原大君)의 19대손이다. 1837년(헌종 3) 3월 19일 갑신일 오시(午時)에 함경남도 함흥군 주동사면 둔지리 사촌에 있는 반룡산(盤龍山) 자락 아랫마을에서 진사(進士) 이반오(李攀五)와 경주김씨 사이에서 장남이자 서자(庶子)로 태어났다. 호는 동무(東武)이고, 자는 무평(懋平) 또는 자명(子明)이다. 초휘(初諱)는 제마(濟馬)라 하였으나, 전주이씨 안원대군파 선원속보(璿原續譜)에는 그의 이름이 섭운(燮雲), 섭진(燮晉)으로 되어 있다.
어려서부터 비범한 재질을 발휘하여 『경사자집(經史子集)』뿐만 아니라 의약과 복서(卜筮)에도 능통하였다. 평소부터 병법을 좋아하여 무인이 되기를 원하여 호를 동무라고 지었다. 『주역』을 애독하여 태극설(太極說)에 의한 태양(太陽)·소양(少陽)·태음(太陰)·소음(少陰)의 사상원리(四象原理)를 인체의 기질과 성격에 따라 사상인으로 구분하였으며, 의학 분야 연구에 심혈을 기울였다.
이제마의 출생에는 재미있는 일화가 있는데, 그의 아버지 이진사는 원래 술이 약한 사람이었으나 어느날 향교에서 일을 보고 오다가 친구들을 만나 주막에서 많은 술을 마시게 되었다. 친구들은 이진사가 술이 취하자 주모에게 부탁하고 집으로 돌아갔는데, 이 때 주모는 이진사와 같은 지체 높은 사람에게 딸을 주려고 하였다. 열 달이 지난 어느 날 새벽 할아버지 충원공(忠源公)의 꿈에 어떤 사람이 탐스러운 망아지 한 필을 끌고 와서 “이 망아지는 제주도에서 가져온 용마인데 아무도 알아주는 사람이 없어 귀댁으로 끌고 왔으니 맡아서 잘 길러달라.” 하고는 기둥에 매 놓고 가버렸다. 그 때 어떤 여인이 강보에 갓난아기를 싸안고 와서 이진사님의 아기오니 받아달라 간청을 하자, 충원공은 큰 길조라 여기고 모자를 받아 들이도록 허락하였다. 그리고 꿈에 제주도 말을 얻었다하여 아기 이름을 제마라 지었다고 한다.
이제마는 30세를 전후해서 함흥에서 정평으로 가던 중 어떤 객사에 머무르게 되었는데 그 집 안방 아랫목에 글씨를 쓴 종이가 붙여 있었다. 매우 뜻있는 내용이 적혀 있으므로 주인에게 원본을 청하여 한 달 기한으로 책을 빌려 문도 한창연(韓昌淵)에게 베끼도록 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운암(芸菴) 한석지(韓錫地)의 『명선록(明善錄)』이었다. 이후 이제마는 운암을 조선의 일인자라 칭송하였다고 한다.
이제마는 1875년(고종 12) 그의 나이 39세에 무과에 등용되어 다음해에 무위별선(武衛別選) 군관(軍官)으로 입위(入衛)되었다. 1886년(고종 23)에 진해현감겸병마절도사(鎭海縣監兼兵馬節度使)에 제수되어, 이듬해 2월 현감으로 부임하여 1889년 12월에 퇴임하였다. 서울로 돌아와 사상의서의 저술에 착수하여 1894년 4월에 『동의수세보원(東醫壽世保元)』상하 2권을 저술하였다. 1896년에 최문환의 난을 평정한 공로로 정3품인 통정대부(通政大夫) 선유위원(宣諭委員)에 제수되고, 이듬해인 1897년에 고원군수(高原郡守)로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1898년에 모든 관직에서 물러나는데, 그는 함흥에서 1900년 가을까지 한약국(韓藥局)인 보원국(保元局)을 경영하다가 그의 세수(歲壽) 64세가 되는 1900년(광무 4) 9월 21일 오시(午時)에 문인(門人) 김영관의 집에서 그의 생을 마감한다.
그가 세상을 떠난 다음해 6월에 그의 문인들이 모여 생전에 개편을 끝내지 못하였던 『동의수세보원』의 증보판을 출판하였다. 이 증보판은 성명론(性命論)·사단론(四端論)·확충론(擴充論)·장부론(臟腑論)·의원론(醫源論)·광제설(廣濟說)·사상인변증론(四象人辨證論) 등 7편으로 되어 있다.
여기에서 주장하는 사상인들의 분류는 한의방의 음양오행설(陰陽五行說)에 의한 것이 아니라 질병치료에 대한 사상인들의 체질 및 성질의 차이를 논한 것이다. 질병치료에 있어 병증보다는 도리어 체질에 중점을 두어 사상인들이 같은 병에 걸리더라도 치료방법을 같이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한대(漢代) 장중경(張仲景)의 『상한론(傷寒論)』에서 체질과 관계없이 음증에는 온열재인 인삼·부자·당귀 등을 주로 쓰고, 양증에는 냉재인 석고(石膏)·대황(大黃)·망초(芒硝)·시호(柴胡) 등을 주재로 한다는 점과는 그 취급방법이 매우 다르다. 이것은 종래의 한방의학의 전통을 깨뜨린 새로운 법방을 제시한 것으로, 같은 병이라도 환자의 체질에 따라 처방을 달리하여야 한다는 이론이다. 저서로는 『동의수세보원』과 『격치고(格致藁)』외에도 『천유초(闡幽抄)』, 『제중신편(濟衆新編)』, 『광제설(廣濟說)』 등이 있다.
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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