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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당 척계광 南塘 戚繼光Qi JiGuang
1528 ~ 1588
중국 명
작가약력
- 1528~1588. 중국 명(明) 말기의 무장(武將)이자 서법가(書法家), 시인.
작가 소개
자(字)는 원경(元敬), 호(號)는 남당(南塘), 맹제(孟諸)이며, 시호(諡號)는 무의(武毅)이다. 등주위(登州衛, 지금의 山東省 蓬莱) 출신으로 조상의 원적(原籍)은 허난성[河南省] 웨이후이[衛輝]로 알려져 있다. 1528년 11월 12일(嘉靖 7년 윤10월 1일)에 산둥성[山東省] 지닝[済寧]에서 태어났으며, 1588년 1월 5일(萬暦 15년 12월 8일) 등주(登州)에서 죽었다. 유대유(兪大猷, 1504~1580)와 함께 푸젠성[福建省], 저장성[浙江省], 광둥성[廣東省] 등에서 왜구(倭寇)의 침입을 물리쳤으며, 알탄 칸[阿勒坦汗, 1507~1582]이 이끄는 몽골 타타르족(Tatars, 韃靼)의 침략에 맞서 장성(長城)의 방위(防衛)를 굳건히 하였다. 가정제(嘉靖帝, 재위 1521~1566)와 융경제(隆慶帝, 재위 1567~1572) 연간(年間)에 ‘남왜북로(南倭北虜)’의 외환(外患)을 극복하는 데 큰 공을 세웠으며, 중국인들에게는 특히 항왜(抗倭)의 민족영웅(民族英雄)으로 숭앙(崇仰)되어 왔다.
척계광(戚继光)은 1544년(嘉靖 23년) 아버지의 뒤를 이어 등주위(登州衛)의 지휘첨사(指揮僉事)가 되었으며, 1555년(嘉靖 34년)부터 저장성[浙江省]에서 왜구(倭寇)의 침입에 맞서 항왜(抗倭) 활동을 본격화하였다. 그는 저장성[浙江省] 진화[金華]와 이우[義烏]에서 농부(農夫)와 광부(鑛夫) 등으로 4000명의 의용군(義勇軍)을 모아 조련하여 이른바 ‘척가군(戚家軍)’이라고 불리는 항왜(抗倭)의 주력(主力)으로 삼았다. 그리고 수군(水軍)을 조직하여 중국 남동부의 해안 지역에서 밀무역(密貿易)을 하며 노략질을 일삼던 왜구(倭寇)의 토벌에 나섰다. 그 뒤 1567년까지 10여년 동안 왜구와 80여 차례나 전투를 벌이며 왜구(倭寇)를 물리쳤다. 1561년(嘉靖 40년), 그는 타이저우[台州], 셴주[仙居] 등에서 왜구(倭寇)와 9차례 전투를 벌였으며 모두 승리하였다. 1562년에는 푸젠성[福建省]의 왜구(倭寇) 근거지를 소탕하였고, 그 공으로 도독첨사(都督僉事)가 되었다. 1564년(嘉靖 42년)에는 평해위(平海衛, 지금의 福建省 莆田)에서 왜구(倭寇)를 물리쳐 도독동지(都督同知)를 거쳐 푸젠[福建] 총병(總兵)이 되었다. 그 뒤에도 척계광(戚继光)은 푸젠성[福建省]과 광둥성[廣東省] 연안(沿岸)에서 왜구(倭寇)와 전투를 벌여 남동(南東) 해안 지역을 평정하였다.
1567년에 해금(海禁)이 해제되어 왜구(倭寇)의 활동이 잠잠해지자, 척계광(戚继光)은 몽골 타타르족[韃靼]의 침략에 맞서 동북(東北) 지방의 방위(防衛)를 담당하였다. 만력제(萬曆帝, 재위 1573∼1620) 연간(年間)의 초기에 내각대학사(内閣大学士)로서 커다란 권력을 행사했던 장거정(張居正, 1525~1582)은 척계광(戚继光)을 중용하여 베이징[北京]의 방위와 장병(將兵)들의 조련을 맡겼다. 그는 병사들을 전차(戰車), 기병(騎兵), 보병(步兵)으로 편성하여 엄격히 조련하여 정예 부대로 만들었고, 변경의 방위를 튼튼히 하여 군사적 안정을 가져왔다.
하지만 장거정(張居正)이 죽은 뒤 그는 1583년(萬曆 11년) 공적(功績)을 시기한 자들에게 탄핵(弾劾)되어 파면(罷免)되었다. 그에 대한 파면(罷免) 조치는 3년 뒤에 철회되었지만, 실의(失意)에 빠진 척계광(戚继光)은 병고(病苦)에 시달리다 1588년 등주(登州)에서 죽었다. 그는 <기효신서(紀效新書)>, <연병실기(練兵實紀)>, <이융요략(莅戎要略)>, <무비신서(武備新書)> 등의 병서(兵書)를 남겼으며, <지지당집(止止堂集)>이라는 시문집(詩文集)도 전해진다. 그가 남긴 <기효신서(紀效新書)> 등의 병서(兵書)는 중국뿐 아니라 조선(朝鮮)과 일본(日本)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청(清) 말기에 증국번(曾國藩, 1811~1872)은 척계광(戚继光)의 병서(兵書)에 따라 부대를 편성하여 태평천국(太平天國)의 난을 진압하였고, 조선(朝鮮)에서도 임진왜란(壬辰倭亂) 이후 <기효신서(紀效新書)>의 속오법(束伍法)과 삼수기법(三手技法)에 따라 훈련도감(訓鍊都監) 등의 5군영과 속오군(束伍軍)을 편성하였다.
척계광(戚继光)은 1544년(嘉靖 23년) 아버지의 뒤를 이어 등주위(登州衛)의 지휘첨사(指揮僉事)가 되었으며, 1555년(嘉靖 34년)부터 저장성[浙江省]에서 왜구(倭寇)의 침입에 맞서 항왜(抗倭) 활동을 본격화하였다. 그는 저장성[浙江省] 진화[金華]와 이우[義烏]에서 농부(農夫)와 광부(鑛夫) 등으로 4000명의 의용군(義勇軍)을 모아 조련하여 이른바 ‘척가군(戚家軍)’이라고 불리는 항왜(抗倭)의 주력(主力)으로 삼았다. 그리고 수군(水軍)을 조직하여 중국 남동부의 해안 지역에서 밀무역(密貿易)을 하며 노략질을 일삼던 왜구(倭寇)의 토벌에 나섰다. 그 뒤 1567년까지 10여년 동안 왜구와 80여 차례나 전투를 벌이며 왜구(倭寇)를 물리쳤다. 1561년(嘉靖 40년), 그는 타이저우[台州], 셴주[仙居] 등에서 왜구(倭寇)와 9차례 전투를 벌였으며 모두 승리하였다. 1562년에는 푸젠성[福建省]의 왜구(倭寇) 근거지를 소탕하였고, 그 공으로 도독첨사(都督僉事)가 되었다. 1564년(嘉靖 42년)에는 평해위(平海衛, 지금의 福建省 莆田)에서 왜구(倭寇)를 물리쳐 도독동지(都督同知)를 거쳐 푸젠[福建] 총병(總兵)이 되었다. 그 뒤에도 척계광(戚继光)은 푸젠성[福建省]과 광둥성[廣東省] 연안(沿岸)에서 왜구(倭寇)와 전투를 벌여 남동(南東) 해안 지역을 평정하였다.
1567년에 해금(海禁)이 해제되어 왜구(倭寇)의 활동이 잠잠해지자, 척계광(戚继光)은 몽골 타타르족[韃靼]의 침략에 맞서 동북(東北) 지방의 방위(防衛)를 담당하였다. 만력제(萬曆帝, 재위 1573∼1620) 연간(年間)의 초기에 내각대학사(内閣大学士)로서 커다란 권력을 행사했던 장거정(張居正, 1525~1582)은 척계광(戚继光)을 중용하여 베이징[北京]의 방위와 장병(將兵)들의 조련을 맡겼다. 그는 병사들을 전차(戰車), 기병(騎兵), 보병(步兵)으로 편성하여 엄격히 조련하여 정예 부대로 만들었고, 변경의 방위를 튼튼히 하여 군사적 안정을 가져왔다.
하지만 장거정(張居正)이 죽은 뒤 그는 1583년(萬曆 11년) 공적(功績)을 시기한 자들에게 탄핵(弾劾)되어 파면(罷免)되었다. 그에 대한 파면(罷免) 조치는 3년 뒤에 철회되었지만, 실의(失意)에 빠진 척계광(戚继光)은 병고(病苦)에 시달리다 1588년 등주(登州)에서 죽었다. 그는 <기효신서(紀效新書)>, <연병실기(練兵實紀)>, <이융요략(莅戎要略)>, <무비신서(武備新書)> 등의 병서(兵書)를 남겼으며, <지지당집(止止堂集)>이라는 시문집(詩文集)도 전해진다. 그가 남긴 <기효신서(紀效新書)> 등의 병서(兵書)는 중국뿐 아니라 조선(朝鮮)과 일본(日本)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청(清) 말기에 증국번(曾國藩, 1811~1872)은 척계광(戚继光)의 병서(兵書)에 따라 부대를 편성하여 태평천국(太平天國)의 난을 진압하였고, 조선(朝鮮)에서도 임진왜란(壬辰倭亂) 이후 <기효신서(紀效新書)>의 속오법(束伍法)과 삼수기법(三手技法)에 따라 훈련도감(訓鍊都監) 등의 5군영과 속오군(束伍軍)을 편성하였다.
출처/두산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