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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매당 이윤 雙梅堂 李胤Lee Yun
1462 ~ ?
조선
작가약력
- 1462(세조 8)∼? 조선 전기의 문신·학자.
작가 소개
본관은 고성(固城). 자는 자백(子伯), 호는 쌍매당(雙梅堂). 아버지는 사온서령(司醞署令)을 지내고 승정원도승지에 추증된 이평(李泙)이며, 어머니는 양천허씨(陽川許氏)로 군사(郡事) 허추(許樞)의 딸이다. 아우 이주(李胄)와 함께 김종직(金宗直)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483년(성종 14) 성균관유생으로 있으면서 정여창(鄭汝昌)과 함께 수강궁(壽康宮)을 보수하는 역사에 승려들을 동원, 이들에게 도첩(度牒)을 지급하려는 조정의 계획에 반대했고, 이듬 해에 일어난 승려들의 성균관유생 구타사건 때 승려들을 엄벌에 처할 것을 여러 차례 상소하였다.
1486년최세걸(崔世傑)·김후손(金後孫) 등과 함께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했으며, 1498년(연산군 4) 사간원대사간으로 재임 중 무오사화에 연루되어 거제에 유배당하였다.
1500년 진도에 유배되었던 아우 이주와 함께 풀려났으며, 1506년(중종 1) 중종반정으로 홍문관의 응교·전한 등을 거친 뒤 시강관(侍講官)으로 있으면서 영의정 유순(柳洵)을 탄핵하였다.
그 해 10월에는 부제학으로 있으면서 임금에게 신하의 간언을 따르고 아첨배들을 멀리하며 학풍을 바로잡을 것 등을 포함한 13조목의 방책을 진언하기도 하였다. 이듬 해에는 유자광(柳子光) 일파를 여러 차례에 걸쳐 신랄하게 배척하였다.
1510년이계맹(李繼孟) 등과 함께 성절사(聖節使)의 일행으로 중국에 가서 명나라의 무종(武宗)에게 환대를 받고 돌아왔다.
한때 노모의 봉양을 위해 청도훈도(淸道訓導)에 재임하면서 청렴으로 이름을 떨쳤다. 김일손(金馹孫)·권오복(權五福) 등과 깊이 교유했으며, 1504년 갑자사화 때 아우 이주가 장살(杖殺)되는 등 일가가 참변을 겪기도 하였다. 만년에는 영산의 마고리(麻姑里)에 쌍매당을 짓고 은거하였다. 저서로는 『쌍매당일고(雙梅堂逸稿)』 1책이 있다.
1483년(성종 14) 성균관유생으로 있으면서 정여창(鄭汝昌)과 함께 수강궁(壽康宮)을 보수하는 역사에 승려들을 동원, 이들에게 도첩(度牒)을 지급하려는 조정의 계획에 반대했고, 이듬 해에 일어난 승려들의 성균관유생 구타사건 때 승려들을 엄벌에 처할 것을 여러 차례 상소하였다.
1486년최세걸(崔世傑)·김후손(金後孫) 등과 함께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했으며, 1498년(연산군 4) 사간원대사간으로 재임 중 무오사화에 연루되어 거제에 유배당하였다.
1500년 진도에 유배되었던 아우 이주와 함께 풀려났으며, 1506년(중종 1) 중종반정으로 홍문관의 응교·전한 등을 거친 뒤 시강관(侍講官)으로 있으면서 영의정 유순(柳洵)을 탄핵하였다.
그 해 10월에는 부제학으로 있으면서 임금에게 신하의 간언을 따르고 아첨배들을 멀리하며 학풍을 바로잡을 것 등을 포함한 13조목의 방책을 진언하기도 하였다. 이듬 해에는 유자광(柳子光) 일파를 여러 차례에 걸쳐 신랄하게 배척하였다.
1510년이계맹(李繼孟) 등과 함께 성절사(聖節使)의 일행으로 중국에 가서 명나라의 무종(武宗)에게 환대를 받고 돌아왔다.
한때 노모의 봉양을 위해 청도훈도(淸道訓導)에 재임하면서 청렴으로 이름을 떨쳤다. 김일손(金馹孫)·권오복(權五福) 등과 깊이 교유했으며, 1504년 갑자사화 때 아우 이주가 장살(杖殺)되는 등 일가가 참변을 겪기도 하였다. 만년에는 영산의 마고리(麻姑里)에 쌍매당을 짓고 은거하였다. 저서로는 『쌍매당일고(雙梅堂逸稿)』 1책이 있다.
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