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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고 최립 東皐 崔岦Choi Rip
1539 ~ 1612
조선
작가약력
- 1539년(중종 34)∼1612년(광해군 4). 조선 중기의 문신·문인.
작가 소개
본관은 통천(通川). 자는 입지(立之), 호는 간이(簡易)·동고(東皐). 아버지는 진사 최자양(崔自陽)이다.
최립은 빈한한 가문에서 태어났으나 굴하지 않고 타고난 재질을 발휘했다. 1555년(명종 10) 17세의 나이로 진사가 됐고 1559년(명종 14)식년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했다.
여러 외직을 지낸 뒤에 1577년(선조 10) 주청사(奏請使)의 질정관(質正官)으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581년(선조 14)재령군수로 굶주린 백성들을 구제하는 것에 힘써 임금으로 부터 옷감을 받았다. 그 해에 다시 주청사의 질정관이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최립은 1584년(선조 17)에 호군(護軍)으로 이문정시(吏文庭試)에 장원을 했다. 1592년(선조 25)에 공주목사가 되었으며 이듬해에 전주부윤을 거쳐 승문원제조를 지냈다. 그 해에 주청사의 질정관이 되었다. 1594년(선조 27)에 주청부사(奏請副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그 뒤에 판결사(判決事)가 되었고 1606년동지중추부사가 되었다. 이듬해에 강릉부사를 지내고 형조참판에 이르러 사직했다. 그리고 평양에 은거했다.
최립은 당대 일류의 문장가로 인정을 받아 중국과의 외교문서를 많이 작성했다. 그리고 중국에 갔을 때에 중국문단에 군림하고 있던 왕세정(王世貞)을 만나 문장을 논했다. 그 곳의 학자들로부터 명문장가라는 격찬을 받았다.
최립은 초(草)·목(木)·화(花)·석(石)의 40여 종을 소재로 한 시부(詩賦)가 유명하다. 역학(易學)에도 심오하여 『주역본의구결부설(周易本義口訣附說)』 등의 2권의 저서가 있다. 그의 글과 차천로(車天輅)의 시와 한호(韓濩)의 글씨를 송도삼절(松都三絶)이라고 일컬었다. 그는 시보다 글로 이름이 높았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시에서도 소식(蘇軾)과 황산곡(黃山谷)을 배워 품격이 호걸스러우며 음색이 굳세어 금석에서 나오는 소리 같다는 평을 들었다.
최립의 문장은 일시를 풍미했다. 당대 명나라에서 유행하던 왕세정 일파의 문장을 따라 예스럽고 우아하며 간결하고 법도에 맞는 글이라는 칭찬을 받았다.
그러나 의고문체(擬古文體)에 뛰어났기 때문에 평범한 산문을 멀리하고 선진문(先秦文)을 모방하여 억지로 꾸미려는 경향이 있었다.
글씨에도 뛰어나 송설체(宋雪體)에 일가를 이루었다.
최립의 문집으로는 『간이집』이 있다. 시학서(詩學書)로는 『십가근체시(十家近體詩)』와 『한사열전초(漢史列傳抄)』 등이 있다.
최립은 빈한한 가문에서 태어났으나 굴하지 않고 타고난 재질을 발휘했다. 1555년(명종 10) 17세의 나이로 진사가 됐고 1559년(명종 14)식년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했다.
여러 외직을 지낸 뒤에 1577년(선조 10) 주청사(奏請使)의 질정관(質正官)으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581년(선조 14)재령군수로 굶주린 백성들을 구제하는 것에 힘써 임금으로 부터 옷감을 받았다. 그 해에 다시 주청사의 질정관이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최립은 1584년(선조 17)에 호군(護軍)으로 이문정시(吏文庭試)에 장원을 했다. 1592년(선조 25)에 공주목사가 되었으며 이듬해에 전주부윤을 거쳐 승문원제조를 지냈다. 그 해에 주청사의 질정관이 되었다. 1594년(선조 27)에 주청부사(奏請副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그 뒤에 판결사(判決事)가 되었고 1606년동지중추부사가 되었다. 이듬해에 강릉부사를 지내고 형조참판에 이르러 사직했다. 그리고 평양에 은거했다.
최립은 당대 일류의 문장가로 인정을 받아 중국과의 외교문서를 많이 작성했다. 그리고 중국에 갔을 때에 중국문단에 군림하고 있던 왕세정(王世貞)을 만나 문장을 논했다. 그 곳의 학자들로부터 명문장가라는 격찬을 받았다.
최립은 초(草)·목(木)·화(花)·석(石)의 40여 종을 소재로 한 시부(詩賦)가 유명하다. 역학(易學)에도 심오하여 『주역본의구결부설(周易本義口訣附說)』 등의 2권의 저서가 있다. 그의 글과 차천로(車天輅)의 시와 한호(韓濩)의 글씨를 송도삼절(松都三絶)이라고 일컬었다. 그는 시보다 글로 이름이 높았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시에서도 소식(蘇軾)과 황산곡(黃山谷)을 배워 품격이 호걸스러우며 음색이 굳세어 금석에서 나오는 소리 같다는 평을 들었다.
최립의 문장은 일시를 풍미했다. 당대 명나라에서 유행하던 왕세정 일파의 문장을 따라 예스럽고 우아하며 간결하고 법도에 맞는 글이라는 칭찬을 받았다.
그러나 의고문체(擬古文體)에 뛰어났기 때문에 평범한 산문을 멀리하고 선진문(先秦文)을 모방하여 억지로 꾸미려는 경향이 있었다.
글씨에도 뛰어나 송설체(宋雪體)에 일가를 이루었다.
최립의 문집으로는 『간이집』이 있다. 시학서(詩學書)로는 『십가근체시(十家近體詩)』와 『한사열전초(漢史列傳抄)』 등이 있다.
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