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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태종 이세민 唐太宗 李世民Li Shimin
599 ~ 649
중국 당
작가약력
- 599(수 개황 19)~649(당 정관 23). 중국 당 제2대 황제(재위 626~649).
작가 소개
당(唐)의 실질적인 창건자이자 제2대 황제(재위 626~649). 성은 이(李), 휘는 세민(世民). 묘호 태종(太宗). 아버지인 고조(高祖) 이연(李淵)을 도와 당의 창건에 결정적 계기가 되었던 626년의 현무문의 변(玄武门之变) 을 주도하고 재위기간 중 돌궐(突厥)을 몰아내며 중국을 통일하였다.
수(隋)의 태원유수(太原留守) 이연의 둘째 아들로 20세가 되기 전인 618년 아버지 이연에게 무너져가는 수(隋)에 대해 반기를 들 것을 권유했으며, 새로 세운 당(唐)의 군대를 이끌고 경쟁자들을 무찔러 천하를 장악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태자로 책봉된 이세민의 형인 이건성(李建成)은 동생보다 무능했으며, 태자의 자리를 빼앗길 것을 두려워해 이세민을 공직에서 해임시킨 뒤 암살 음모를 꾸몄으나, 이세민은 그를 지지하는 휘하의 장군들과 참모들의 도움을 받아 이 음모를 사전에 봉쇄하고, 궁궐문인 현무문에 매복해 있다가 형 이건성과 그 일행을 모두 화살로 쏴 죽였다. 고조는 이 사건이 건성(建成)의 정권욕에서 비롯된 것이라 판단하고 이세민에게 제위를 양위하였다.
그의 치세는 정관(貞观)의 치(治)라 칭송받고 후세 제왕의 모범이 되었으나 만년의 고구려 친정 실패 등으로 그가 죽은 뒤에는 정권이 동요하게 되었다. 태종은 정비인 장손황후(长孙皇后)와의 사이에 승건(承乾)ㆍ태(泰)ㆍ치(治)의 세 아들을 두었는데, 그 가운데 장자인 승건을 태자로 책봉했으나 승건이 어리석어 모반에 연루됨으로써 643년(貞观 17년)에 폐위되었고, 셋째 아들 이치(李治)가 태자로 책봉되어 태종이 죽은 후 제위를 이어받아 고종(高宗)이 되었으나 그는 병약하고 우유부단하여, 그의 왕비가 된 측천무후(則天武后)가 실권을 잡게 되었다.
문화면에는 『진서』를 비롯하여 남북조의 정사 편찬을 명하고 『5경정의』를 편집하여 경학의 통일을 꾀하였다. 특히 왕희지의 서를 열애하여 그 서적 수집에 힘쓰고, 탁본을 만들어 신하들에게 나누어주어 왕서가 일세를 풍미하도록 했다. 또한 홍문관을 두고 우세남, 구양순을 교관으로 하여 귀족 자녀에게 해서를 교육했다. 태종 스스로도 왕희지풍의 행서와 비백을 잘하였고, 행서비『진사명』과 『온천명』, 초서의 『병풍서』 등의 작품이 있다. 능묘를 소능이라 칭하고, 명신들의 배장비가 주변에 다수 세워졌다.
수(隋)의 태원유수(太原留守) 이연의 둘째 아들로 20세가 되기 전인 618년 아버지 이연에게 무너져가는 수(隋)에 대해 반기를 들 것을 권유했으며, 새로 세운 당(唐)의 군대를 이끌고 경쟁자들을 무찔러 천하를 장악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태자로 책봉된 이세민의 형인 이건성(李建成)은 동생보다 무능했으며, 태자의 자리를 빼앗길 것을 두려워해 이세민을 공직에서 해임시킨 뒤 암살 음모를 꾸몄으나, 이세민은 그를 지지하는 휘하의 장군들과 참모들의 도움을 받아 이 음모를 사전에 봉쇄하고, 궁궐문인 현무문에 매복해 있다가 형 이건성과 그 일행을 모두 화살로 쏴 죽였다. 고조는 이 사건이 건성(建成)의 정권욕에서 비롯된 것이라 판단하고 이세민에게 제위를 양위하였다.
그의 치세는 정관(貞观)의 치(治)라 칭송받고 후세 제왕의 모범이 되었으나 만년의 고구려 친정 실패 등으로 그가 죽은 뒤에는 정권이 동요하게 되었다. 태종은 정비인 장손황후(长孙皇后)와의 사이에 승건(承乾)ㆍ태(泰)ㆍ치(治)의 세 아들을 두었는데, 그 가운데 장자인 승건을 태자로 책봉했으나 승건이 어리석어 모반에 연루됨으로써 643년(貞观 17년)에 폐위되었고, 셋째 아들 이치(李治)가 태자로 책봉되어 태종이 죽은 후 제위를 이어받아 고종(高宗)이 되었으나 그는 병약하고 우유부단하여, 그의 왕비가 된 측천무후(則天武后)가 실권을 잡게 되었다.
문화면에는 『진서』를 비롯하여 남북조의 정사 편찬을 명하고 『5경정의』를 편집하여 경학의 통일을 꾀하였다. 특히 왕희지의 서를 열애하여 그 서적 수집에 힘쓰고, 탁본을 만들어 신하들에게 나누어주어 왕서가 일세를 풍미하도록 했다. 또한 홍문관을 두고 우세남, 구양순을 교관으로 하여 귀족 자녀에게 해서를 교육했다. 태종 스스로도 왕희지풍의 행서와 비백을 잘하였고, 행서비『진사명』과 『온천명』, 초서의 『병풍서』 등의 작품이 있다. 능묘를 소능이라 칭하고, 명신들의 배장비가 주변에 다수 세워졌다.
출처/중국시사문화사전, 미술대사전(인명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