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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암 주희 晦庵 朱熹Zhu Xi
1130 ~ 1200
중국 남송
작가약력
- 중국 남송의 유학자. 주자학을 집대성. 존칭인 주자(朱子)로 널리 알려짐.
작가 소개
주희의 자는 원회(元晦), 중회(仲晦), 호는 회암(晦庵), 회옹(晦翁), 운곡산인(雲谷山人), 창주병수(滄洲病叟), 둔옹(遯翁) 등이 있다. 복건 성(福建省) 우계(尤溪)에서 출생했다. 선조는 대대로 안휘성(安徽省)의 휘주무원(徽州婺源)의 호족으로 아버지 주송은 관직에 있다가 당시의 재상(宰相) 진회(秦檜)와의 의견충돌로 퇴직하고 우계에 우거(寓居)하였다. 주희는 이곳에서 14세 때 아버지가 죽자, 그의 유언에 따라 호적계(胡籍溪), 유백수(劉白水), 유병산(劉屛山)에게 사사하면서 불교와 노자의 학문에도 흥미를 가졌었다.
그러나 주희는 24세 때 연평(延平) 이통(李侗)을 만나 사숙(私淑)하면서 유학에 복귀하게 된다. 다시 1158년에 주희는 이통을 찾아갔고, 1160년에는 수개월 동안 그와 함께 지내면서 가르침을 받았다. 당시 송대의 성리학자들 가운데 불교와 도교의 철학에 대항하여 새로운 철학 이론을 제창하면서 거의 1,000년 동안 사상의 주도적 위치를 상실하였던 유학의 학문적, 사상적인 위상을 회복하려는 운동이 일었는데, 주희는 이통의 영향을 받은 이후 그 방면의 일에 전념할 결심을 하게 된다.
주희의 학문 토론 친구로는 장남헌(張南軒), 여동래(呂東萊)가 있고, 또 논적으로는 육상산(陸象山)이 있었는데, 이들과 상호 절차탁마(切磋琢磨)하면서 학문을 비약적으로 발전 심화시켰다. 그는 19세에 진사시에 급제하여 71세에 생애를 마칠 때까지 여러 관직을 거쳤으나, 약 9년 정도만 현직에 근무하였을 뿐, 그 밖의 관직은 학자에 대한 일종의 예우로서 반드시 현지에 부임할 필요가 없는 명목상의 관직이었기 때문에 학문에 전념할 수 있었다.
1179-1181년 사이 강서성(江西省) 남강(南康)의 관리로 근무할 때 주희는 그 기회를 이용, 9세기에 건립되어 10세기에 번성했으나 그 뒤 폐허가 된 백록동서원(白鹿洞書院)을 재건했다. 주희에 의해 원래의 모습을 회복하게 된 이 서원은 그 후 오랫동안 명성을 유지했다. 그런 서원들이 성리학이 발전하는 데 도움이 된 제도적 기반이었던 것이다. 1188년 주희는 황제의 도덕수양이 국가 안녕의 기반이라는 주장을 담은 상소문을 올리기도 하였다.
주희는 철학뿐 아니라, 역사에도 깊은 관심을 가져 사마광(司馬光)이 편찬한 역사서인 『자치통감(資治通鑑)』이 무원칙하다고 여겨 그것을 다시 재편집하여, 1172년에 『자치통감강목(資治通鑑綱目)』을 완성하였다. 이 책은 동아시아 전역에서 널리 읽혔다. 또한 유럽에서 최초로 간행된 중국역사서인 『중국통사』(1777~85)의 토대가 되었다고 한다.
주희는 만년에 조정의 초청을 받아 고위직에 오를 수 있는 기회가 몇 번 있었다. 그러나 그는 과감하게 직언을 하고, 늘 소신 있는 의견을 펼쳤으며, 부패와 사욕이 지배하는 정치판을 비타협적으로 공격하다가 파면되거나 외진 지방의 관직으로 쫓겨났다.
만년에 이르러서 정적(政敵)인 한탁주가 주희의 학설과 행실에 대해 중상모략을 하여 그의 학문을 위학(僞學)이라 하여, 저서의 간행과 유포가 금지되었고 정치활동을 비롯한 모든 공적인 활동이 금지되었다. 그가 죽을 때까지도 정치적인 명예는 여전히 회복되지 않다가 그가 죽은 뒤에 곧 회복되었다. 1209년과 1230년에 그에게 시호가 내려졌고 1241년에는 그의 위패가 정식으로 공자사당에 모셔졌다.
주희의 성리학은 오랫동안 중국을 비롯한 동아시아 지식인 사회를 지배해왔고, 사서에 대한 그의 주석서는 과거에 합격하려는 사람들의 필독서가 되었다. 왜냐하면 그 책이 과거 교재였기 때문이다. 그의 사상은 특히 조선의 지식인 사회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쳤는데 예컨대 송시열이라는 학자는 “세상의 모든 이치는 주자가 이미 완벽하게 밝혀 놓았다. 우리에게 남은 일은 다만 그의 이치를 실천하는 것일 뿐이다.
그러므로 주자의 말씀에서 조금이라도 어긋나는 주장을 하거나 주자와 다른 경전의 주석을 다는 자는 사문난적일 뿐이다.”는 취지의 주장을 하기도 하였다. 또 주희의 철학은 일본의 도쿠가와 막부 시대에 널리 받아들여져 공적인 인정을 받았다.
주희의 저서로는 『논어요의(論語要義)』,『논어훈몽구의(論語訓蒙口義)』,『곤학공문편(困學恐聞編)』, 『정씨유서(程氏遺書)』,『논맹정의(論孟精義)』,『자치통감강목(資治通鑑綱目)』,『팔조명신언행록(八朝名臣言行錄)』,『서명해의(西銘解義)』,『태극도설해(太極圖說解)』,『통서해(通書解)』,『정씨외서(程氏外書)』,『이락연원록(伊洛淵源錄)』,『고금가제례(古今家祭禮)』,『근사록(近思錄)』,『사서장구집주(四書章句集注)』, 『주역본의(周易本義)』,『시집전(詩集傳)』,『초사집주(楚辭集注)』등이 있다. 나중에 그의 글은 『주문공문집(朱文公文集)』으로 편집되었고, 제자들과 학문하면서 토론할 때 남긴 주희의 말은 『주자어류(朱子語類)』로 편찬되었다.
그러나 주희는 24세 때 연평(延平) 이통(李侗)을 만나 사숙(私淑)하면서 유학에 복귀하게 된다. 다시 1158년에 주희는 이통을 찾아갔고, 1160년에는 수개월 동안 그와 함께 지내면서 가르침을 받았다. 당시 송대의 성리학자들 가운데 불교와 도교의 철학에 대항하여 새로운 철학 이론을 제창하면서 거의 1,000년 동안 사상의 주도적 위치를 상실하였던 유학의 학문적, 사상적인 위상을 회복하려는 운동이 일었는데, 주희는 이통의 영향을 받은 이후 그 방면의 일에 전념할 결심을 하게 된다.
주희의 학문 토론 친구로는 장남헌(張南軒), 여동래(呂東萊)가 있고, 또 논적으로는 육상산(陸象山)이 있었는데, 이들과 상호 절차탁마(切磋琢磨)하면서 학문을 비약적으로 발전 심화시켰다. 그는 19세에 진사시에 급제하여 71세에 생애를 마칠 때까지 여러 관직을 거쳤으나, 약 9년 정도만 현직에 근무하였을 뿐, 그 밖의 관직은 학자에 대한 일종의 예우로서 반드시 현지에 부임할 필요가 없는 명목상의 관직이었기 때문에 학문에 전념할 수 있었다.
1179-1181년 사이 강서성(江西省) 남강(南康)의 관리로 근무할 때 주희는 그 기회를 이용, 9세기에 건립되어 10세기에 번성했으나 그 뒤 폐허가 된 백록동서원(白鹿洞書院)을 재건했다. 주희에 의해 원래의 모습을 회복하게 된 이 서원은 그 후 오랫동안 명성을 유지했다. 그런 서원들이 성리학이 발전하는 데 도움이 된 제도적 기반이었던 것이다. 1188년 주희는 황제의 도덕수양이 국가 안녕의 기반이라는 주장을 담은 상소문을 올리기도 하였다.
주희는 철학뿐 아니라, 역사에도 깊은 관심을 가져 사마광(司馬光)이 편찬한 역사서인 『자치통감(資治通鑑)』이 무원칙하다고 여겨 그것을 다시 재편집하여, 1172년에 『자치통감강목(資治通鑑綱目)』을 완성하였다. 이 책은 동아시아 전역에서 널리 읽혔다. 또한 유럽에서 최초로 간행된 중국역사서인 『중국통사』(1777~85)의 토대가 되었다고 한다.
주희는 만년에 조정의 초청을 받아 고위직에 오를 수 있는 기회가 몇 번 있었다. 그러나 그는 과감하게 직언을 하고, 늘 소신 있는 의견을 펼쳤으며, 부패와 사욕이 지배하는 정치판을 비타협적으로 공격하다가 파면되거나 외진 지방의 관직으로 쫓겨났다.
만년에 이르러서 정적(政敵)인 한탁주가 주희의 학설과 행실에 대해 중상모략을 하여 그의 학문을 위학(僞學)이라 하여, 저서의 간행과 유포가 금지되었고 정치활동을 비롯한 모든 공적인 활동이 금지되었다. 그가 죽을 때까지도 정치적인 명예는 여전히 회복되지 않다가 그가 죽은 뒤에 곧 회복되었다. 1209년과 1230년에 그에게 시호가 내려졌고 1241년에는 그의 위패가 정식으로 공자사당에 모셔졌다.
주희의 성리학은 오랫동안 중국을 비롯한 동아시아 지식인 사회를 지배해왔고, 사서에 대한 그의 주석서는 과거에 합격하려는 사람들의 필독서가 되었다. 왜냐하면 그 책이 과거 교재였기 때문이다. 그의 사상은 특히 조선의 지식인 사회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쳤는데 예컨대 송시열이라는 학자는 “세상의 모든 이치는 주자가 이미 완벽하게 밝혀 놓았다. 우리에게 남은 일은 다만 그의 이치를 실천하는 것일 뿐이다.
그러므로 주자의 말씀에서 조금이라도 어긋나는 주장을 하거나 주자와 다른 경전의 주석을 다는 자는 사문난적일 뿐이다.”는 취지의 주장을 하기도 하였다. 또 주희의 철학은 일본의 도쿠가와 막부 시대에 널리 받아들여져 공적인 인정을 받았다.
주희의 저서로는 『논어요의(論語要義)』,『논어훈몽구의(論語訓蒙口義)』,『곤학공문편(困學恐聞編)』, 『정씨유서(程氏遺書)』,『논맹정의(論孟精義)』,『자치통감강목(資治通鑑綱目)』,『팔조명신언행록(八朝名臣言行錄)』,『서명해의(西銘解義)』,『태극도설해(太極圖說解)』,『통서해(通書解)』,『정씨외서(程氏外書)』,『이락연원록(伊洛淵源錄)』,『고금가제례(古今家祭禮)』,『근사록(近思錄)』,『사서장구집주(四書章句集注)』, 『주역본의(周易本義)』,『시집전(詩集傳)』,『초사집주(楚辭集注)』등이 있다. 나중에 그의 글은 『주문공문집(朱文公文集)』으로 편집되었고, 제자들과 학문하면서 토론할 때 남긴 주희의 말은 『주자어류(朱子語類)』로 편찬되었다.
출처/서울대학교 철학사상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