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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당 정기헌 白堂 鄭基憲Jeong GiHeon
1886 ~ 1956
근대
서예
작가약력
- 1886(고종 23)~1956. 일제강점기 창원 출신의 독립운동가이자 서예가.
작가 소개
정기헌의 호는 백당(白堂)이며, 1886년 현 경상남도 창원시 상남면 봉림리 62번지에서 정규엽(鄭珪燁)과 이근수(李根秀)의 2남 3녀 중 차남으로 출생하였다. 그는 민족의식이 투철하고 배일사상이 철저하여 어떠한 경우라도 일제에 협력이 되는 일이라면 아예 손대지 않았다. 아울러 일제의 영향력 아래에 있는 개인이나 단체하고는 절대로 교분이나 연관을 맺지 않을 만큼 꼿꼿한 사람이었다.
정기헌은 고향에서 한문을 수학한 후, 일본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일본을 먼저 알아야 한다는 믿음으로 신학문을 배우기로 하고 서울로 올라가 YMCA[기독교청년회]에서 수학하였다. 그 후 한글학자 주시경 선생의 문인이 되었으며, 교남학회 회원으로 활동하였다.
1916년부터 마산부 부림동[現 昌原市 馬山合浦區 富林洞]에서 마산보성상회(馬山普成商會)라는 지물포를 위장(僞裝) 운영, 애국인사들의 연락 거점으로 이용하고 상해임시정부가 설립된 후로는 상해임시정부의 조직원인 조완구(趙琬九) 선생과 특별한 교분을 가지고 연락을 유지하면서 그 곳에서 밀파되어 오는 동지들의 뒷바라지를 하고 그들의 연락 업무를 담당하였으며 선대로부터 물려 받은 재산으로 그들을 통해 독립운동 자금을 해외로 전달하기도 하였다. 이후 일본 경찰의 의심을 받아 가택수색을 받고 구인되어 고문을 당하는 곤욕에도 끝내 함구하였다.
1921년 11월 미국 워싱턴에서 개최된 열강들의 군축회의[일명 태평양회의]에 국민공회 대표 이상재(李商在)와 양기탁(梁起鐸)을 필두로 국내 종교계 및 사회단체 대표와 전국 13도 260군 대표 총372명이 서명한 후 상해를 경유, 워싱턴에 머물고 있는 우리 대표단[단장 이승만 상해임시정부 대통령]을 통해 발표하려던 일본의 한반도 강점을 규탄하고 우리 국민의 독립 열망을 호소한 청원서인 「한국인민치태평양회의서(韓國人民致太平洋會議書)」에 경상남도 창원군 대표로 서명하였다.
1926년 10월에는 독립운동자금 마련을 위해 전라남도 광양군 봉강면[현 광양시 봉강면 지곡리] 일대 959,000평에 지인 1명과 공동명의로 광업권을 설정받아 현지인을 대리인으로 두고 금을 채굴하였으나, 일본인들의 탄압과 방해로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고 한다.
1930년대 후반에 그를 잘 아는 사람이 창원군수로 부임해 왔다. 창원군수는 정기헌을 불러 상남면장에 취임하라고 권하였으나 그는 한마디로 잘라 거절하였다. 그에게 있어 일제와의 타협이나 그 아래에서의 관직이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일제하에서의 관직이란 바로 친일행위와 다르지 않다는 소신 때문이었다. 그만큼 투철한 애국심을 지닌 인물이었다.
해방 후 말년에 창원군 상남면 봉림리 62번지[現 昌原市 義昌區 鳳谷洞]에 거주하면서 청년들에게 한글과 한문을 가르쳐 문맹퇴치에 힘썼으며 서예활동에 매진하던 중 시력 약화로 사회활동을 접고 그 후 실명(失明)과 노환으로 투병 중 향년 71세로 1956년에 사망하였다.
전해오는 재실·서당·비문(齋室·書堂·碑文)의 글씨로는 창원의 집 성퇴헌(省退軒) 편액·주련[경상남도 창원시 의창구 사림동]·달천정(達川亭) 편액[1938년 씀, 창원시 의창구 북면 외감리]·참의창녕조공배숙부인영산신씨묘비(參議昌寧曺公配淑夫人靈山辛氏墓碑)[1951년 씀, 창원시 의창구 북면 지개리]·영모재(永慕齋) 편액·주련[1952년 씀, 창원시 의창구 북면 외산리]·소산서당(小山書堂) 편액[창원시 성산구 사파동]·성주사중흥조등암대종사공덕비(聖住寺 中興祖藤巖大宗師功德碑)[창원시 성산구 천선동]·사와처사경주최공표효비·쌍효각(思窩處士慶州崔公表孝碑·雙孝閣)[1944년씀, 경남 고성군 거류면 당동리] ·연파정(蓮坡亭) 편액·주련[1949년 씀, 고성군 구만면 저연리]· 계산정(桂山亭)·쌍효려(雙孝閭)의 상량문·편액[1951년씀, 고성군 구만면 광덕리]·송양재(松陽齋) 편액·주련[고성군 거류면 송정리]·지지원비(遲遲園碑)[1945년 씀, 함안군 여항면 외암리]·규모당(跬模堂)·율간정(栗澗亭)·자미정(紫薇亭)의 편액[함안군 산인면 모곡리]·진무공신인원군이휴복신도비(振武功臣仁原君李休復神道碑)[1946년 씀, 함안군 군북면 명관리]·경덕서당(景德書堂) 편액·주련 [창녕군 길곡면 증산리]· 옥산재(玉山齋) 편액[창녕군 길곡면 길곡리]· 무일처사하산성공묘비(無逸處士夏山成公墓碑)[창녕군 유어면 진창리]·지산재(芝山齋) 편[의령군 지정면 득소리]·대학당(大學堂) 편액·주련[밀양시 하남읍 대사리]·처사청주송공묘비(處士淸州宋公墓碑)[김해시 진례면 송정리]·벽송정고운최치원시(碧松亭 孤雲 崔致遠詩) 편액[경북 고령군 쌍림면 신촌리] 등이 현재까지 밝혀졌다. 그 외에 병풍(屛風) 글씨로 회재(晦齋) 선생의 「원조오잠(元朝五箴)」을 쓴 병풍 글씨(10폭, 창원시 성산구 반림동)가 있고 문집으로는「백당시집(白堂詩集)」(3책)이 있다.
정기헌은 고향에서 한문을 수학한 후, 일본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일본을 먼저 알아야 한다는 믿음으로 신학문을 배우기로 하고 서울로 올라가 YMCA[기독교청년회]에서 수학하였다. 그 후 한글학자 주시경 선생의 문인이 되었으며, 교남학회 회원으로 활동하였다.
1916년부터 마산부 부림동[現 昌原市 馬山合浦區 富林洞]에서 마산보성상회(馬山普成商會)라는 지물포를 위장(僞裝) 운영, 애국인사들의 연락 거점으로 이용하고 상해임시정부가 설립된 후로는 상해임시정부의 조직원인 조완구(趙琬九) 선생과 특별한 교분을 가지고 연락을 유지하면서 그 곳에서 밀파되어 오는 동지들의 뒷바라지를 하고 그들의 연락 업무를 담당하였으며 선대로부터 물려 받은 재산으로 그들을 통해 독립운동 자금을 해외로 전달하기도 하였다. 이후 일본 경찰의 의심을 받아 가택수색을 받고 구인되어 고문을 당하는 곤욕에도 끝내 함구하였다.
1921년 11월 미국 워싱턴에서 개최된 열강들의 군축회의[일명 태평양회의]에 국민공회 대표 이상재(李商在)와 양기탁(梁起鐸)을 필두로 국내 종교계 및 사회단체 대표와 전국 13도 260군 대표 총372명이 서명한 후 상해를 경유, 워싱턴에 머물고 있는 우리 대표단[단장 이승만 상해임시정부 대통령]을 통해 발표하려던 일본의 한반도 강점을 규탄하고 우리 국민의 독립 열망을 호소한 청원서인 「한국인민치태평양회의서(韓國人民致太平洋會議書)」에 경상남도 창원군 대표로 서명하였다.
1926년 10월에는 독립운동자금 마련을 위해 전라남도 광양군 봉강면[현 광양시 봉강면 지곡리] 일대 959,000평에 지인 1명과 공동명의로 광업권을 설정받아 현지인을 대리인으로 두고 금을 채굴하였으나, 일본인들의 탄압과 방해로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고 한다.
1930년대 후반에 그를 잘 아는 사람이 창원군수로 부임해 왔다. 창원군수는 정기헌을 불러 상남면장에 취임하라고 권하였으나 그는 한마디로 잘라 거절하였다. 그에게 있어 일제와의 타협이나 그 아래에서의 관직이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일제하에서의 관직이란 바로 친일행위와 다르지 않다는 소신 때문이었다. 그만큼 투철한 애국심을 지닌 인물이었다.
해방 후 말년에 창원군 상남면 봉림리 62번지[現 昌原市 義昌區 鳳谷洞]에 거주하면서 청년들에게 한글과 한문을 가르쳐 문맹퇴치에 힘썼으며 서예활동에 매진하던 중 시력 약화로 사회활동을 접고 그 후 실명(失明)과 노환으로 투병 중 향년 71세로 1956년에 사망하였다.
전해오는 재실·서당·비문(齋室·書堂·碑文)의 글씨로는 창원의 집 성퇴헌(省退軒) 편액·주련[경상남도 창원시 의창구 사림동]·달천정(達川亭) 편액[1938년 씀, 창원시 의창구 북면 외감리]·참의창녕조공배숙부인영산신씨묘비(參議昌寧曺公配淑夫人靈山辛氏墓碑)[1951년 씀, 창원시 의창구 북면 지개리]·영모재(永慕齋) 편액·주련[1952년 씀, 창원시 의창구 북면 외산리]·소산서당(小山書堂) 편액[창원시 성산구 사파동]·성주사중흥조등암대종사공덕비(聖住寺 中興祖藤巖大宗師功德碑)[창원시 성산구 천선동]·사와처사경주최공표효비·쌍효각(思窩處士慶州崔公表孝碑·雙孝閣)[1944년씀, 경남 고성군 거류면 당동리] ·연파정(蓮坡亭) 편액·주련[1949년 씀, 고성군 구만면 저연리]· 계산정(桂山亭)·쌍효려(雙孝閭)의 상량문·편액[1951년씀, 고성군 구만면 광덕리]·송양재(松陽齋) 편액·주련[고성군 거류면 송정리]·지지원비(遲遲園碑)[1945년 씀, 함안군 여항면 외암리]·규모당(跬模堂)·율간정(栗澗亭)·자미정(紫薇亭)의 편액[함안군 산인면 모곡리]·진무공신인원군이휴복신도비(振武功臣仁原君李休復神道碑)[1946년 씀, 함안군 군북면 명관리]·경덕서당(景德書堂) 편액·주련 [창녕군 길곡면 증산리]· 옥산재(玉山齋) 편액[창녕군 길곡면 길곡리]· 무일처사하산성공묘비(無逸處士夏山成公墓碑)[창녕군 유어면 진창리]·지산재(芝山齋) 편[의령군 지정면 득소리]·대학당(大學堂) 편액·주련[밀양시 하남읍 대사리]·처사청주송공묘비(處士淸州宋公墓碑)[김해시 진례면 송정리]·벽송정고운최치원시(碧松亭 孤雲 崔致遠詩) 편액[경북 고령군 쌍림면 신촌리] 등이 현재까지 밝혀졌다. 그 외에 병풍(屛風) 글씨로 회재(晦齋) 선생의 「원조오잠(元朝五箴)」을 쓴 병풍 글씨(10폭, 창원시 성산구 반림동)가 있고 문집으로는「백당시집(白堂詩集)」(3책)이 있다.
출처/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한국학중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