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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초 이종우 雪蕉 李鍾禹Lee ChongWoo
1899 ~ 1981
근대·현대
서양화
작가약력
- 학력
- 1923년 일본 동경미술학교 졸업
- 기관 경력
- 1925년 도불
- 1945년 중앙중고등학교 교감
- 1945년 조선미술건설본부 서양화위원장
- 1949년-1980년 대한민국 미술전람회 추천작가, 초대작가, 심사위원, 운영위원
- 1951년-1961년 홍익대학교 교수, 학장 및 명예교수
- 1957년 목우회 회장
- 1960년-1976년 대한민국 예술원 회원 및 부회장
- 전시
- 1921년, 평화 박람회 서양화부전, 일본
- 1927년, 살롱 도톤느, 파리
- 1928년, 개인전
- 1930년, 제1회 동경미술협회전
- 1930년, 제10회 조선화협회전
- 1958년-1967년, 제1-7회 목우회전, 신문회관 화랑
- 1967년, 개인전, 신문회관 화랑
- 1969년, 한국사실작가회전, 신문회관 화랑
- 1972년, 한국 근대미술 60년전, 국립현대미술관
- 1973년, 한국 현역작가 100인전, 국립현대미술관
- 1974년, 개인전, 신문회관 화랑
- 1974년, 한국 현역 원로작가 초대전, 국립현대미술관
- 1975년, 개인전, 신세계 미술관
- 1977년, 한국 현대미술대전: 서양화, 국립현대미술관
- 1979년, 예술원 회원전, 예술원 전시실
- 1984년, 한국 현대미술 자료전, 국립현대미술관
- 1987년, 한국 인물화전, 호암갤러리
- 1991년, 한국미의 원초적 형상전, 서초 갤러리
- 1992년, 한국 근대미술 명품전, 호암갤러리
- 1992년, 국립현대미술관 소장작가 작품전, 대구, 강릉
- 1996년, `96 차세대의 제안전, 조형 갤러리
- 1997년-1998년, 한국 근대미술: 유화- 근대를 보는 눈, 국립현대미술관
- 1997년, 한국 누드미술 80년전, 예술의전당
- 1998년, 다시 찾은 근대미술, 덕수궁 석조전
- 2000년, 고려대학교 개교 95주년 기념전, 고려대학교 박물관
- 수상
- 1924년, 조선 미술전람회 3등상
- 1927년, 살롱 도톤전 입선
- 1961년, 예술원상
- 1962년, 문화훈장 대통령장
- 1968년, 서울시문화상
- 1983년, 제18회 대한민국 은관 문화훈장
작가 소개
황해도 봉산 출신. 호는 설초(雪蕉). 평양고등보통학교를 나와 1917년에 도일, 간사이미술연구소(關西美術硏究所)를 거쳐 이듬해 동경미술학교에 입학하여 1923년 졸업하였다. 일본에서 귀국 후 중앙고등보통학교의 도화 교사가 되었다. 화가로서의 공식적인 데뷔는 1924년 제3회 조선미술전람회[약칭 선전(鮮展)]에 「추억」과 「자화상」을 출품하면서부터이다. 두 작품 중 「추억」이 양화부 3등상에 입상되었다. 그러나 선전 출품은 이 한 해로 끝나고 만다. 그는 이후 선전에는 일절 출품하지 않았다. 1930년대 이후에는 주로 서화협회전람회[약칭 협전(協展)]와 목일회(牧日會) 등 그룹전에만 참여하였다.
1925년 우연한 계기로 프랑스에 가서 약 3년간 파리에 체류, 한국인 화가로서는 최초로 도불 화가가 되었다. 파리에서는 ‘개랑연구소’와 백계 러시아인인 슈하이에프의 연구실에서 주로 고전주의적 사실묘사를 수업하였다. 이 때 제작한 작품 「모부인상(某婦人像)」과 「인형이 있는 정물」이 1927년의 살롱 도톤에 출품, 입선되었다. 1928년 3년간의 수업을 끝내고 귀국하여 그해 동아일보사 주최로 파리 시절의 작품 53점으로 귀국 개인전을 열었다.
귀국 후 한동안 활발한 작품 활동을 하는 한편, 경신학교(儆新學校), 평양의 삭성회(朔星會) 회화연구소 그리고 다시 중앙고등보통학교에서 후진 지도에 힘썼다. 1933년 서화협회 간사가 되었으며, 1934년에는 한국인 서양화가들만의 모임인 목일회를 구성, 이를 발판으로 작품을 발표하였다.
광복 후 조선미술건설본부가 발족되어 서양화부 위원으로 위촉되었으며, 건설본부를 중심으로 다시 조선미술협회가 생기면서 부회장에 올랐다. 이 후 대한미술협회(조선미술협회가 정부수립 후 개칭)의 부회장, 문총(文總) 부회장 등 미술계의 지도적 인사로서, 그리고 국전 창설 이래 장기간에 걸친 심사 위원으로 있었으며, 홍익대학교 미술학부 교수·미술학부장·홍익대학장 등을 역임하는 등 화려한 경력을 쌓았다.
광복 후 그의 활동 무대는 주로 국전과 1958년에 창립된 목우회(木友會), 1969년에 창립된 사실화가회(寫實畫家會) 등이었다. 기타 주요한 초대전으로는 국립현대미술관 주최의 ‘근대미술 60년전’·‘현역화가 100인전’ 등이 있다.
대체로 이종우의 작가 편력은 동경미술학교 졸업을 전후로 한 시기와 파리 체류 시기, 1930년대 이후의 풍류적 생활 그리고 1945년 이후의 화단 활동 등으로 대별된다.
동경미술학교 졸업 전후의 작품으로는 그의 아버지의 상으로 보이는 초상과 향리의 풍경인 「구월산원경(九月山遠景)」이 전하고 있다. 1924년 선전 출품작인 「추억」과 「자화상」은 사진 도판으로만 전하고 있다. 이 시기의 작품 경향은 「초상」·「구월산원경」 등이 습작의 범주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이라면, 「추억」과 「자화상」은 엄격한 구도와 정감적인 대상 파악 등 당시 일본관학파(官學派)의 수준을 가늠하게 하고 있다.
1925년에서 1928년까지의 파리 체류 기간 중 제작된 작품의 경향은 고전적 사실 화풍으로 해부학적인 대상 파악이 두드러지고 있다. 「돌아선 나부」·「모부인상」·「남자나체」·「독서하는 우인」 등 일련의 인물 소재의 작품이 이 시기의 대표작이다.
1945년 이후에는 다시 정감적인 소재 해석과 자연 관조의 동양적인 취향이 지배적으로 나타나면서 파리 체류시의 작품과 극단의 대조를 보여 주고 있다. 특히, 만년에 이르러 야외 사생의 작품을 많이 남기고 있다.
미술계에 끼친 공로로 예술원상(1961)·문화훈장 대통령장(1962)을 받기도 하였다. 1974년 동아일보사는 그의 생애를 통한 주요 작품을 한자리에 모은 회고전을 개최하였으며, 동시에 본격적인 화집도 출판하였다. 이 때 파리 유학 시절의 많은 작품이 발굴, 전시되어 화제를 일으키기도 하였다.
1925년 우연한 계기로 프랑스에 가서 약 3년간 파리에 체류, 한국인 화가로서는 최초로 도불 화가가 되었다. 파리에서는 ‘개랑연구소’와 백계 러시아인인 슈하이에프의 연구실에서 주로 고전주의적 사실묘사를 수업하였다. 이 때 제작한 작품 「모부인상(某婦人像)」과 「인형이 있는 정물」이 1927년의 살롱 도톤에 출품, 입선되었다. 1928년 3년간의 수업을 끝내고 귀국하여 그해 동아일보사 주최로 파리 시절의 작품 53점으로 귀국 개인전을 열었다.
귀국 후 한동안 활발한 작품 활동을 하는 한편, 경신학교(儆新學校), 평양의 삭성회(朔星會) 회화연구소 그리고 다시 중앙고등보통학교에서 후진 지도에 힘썼다. 1933년 서화협회 간사가 되었으며, 1934년에는 한국인 서양화가들만의 모임인 목일회를 구성, 이를 발판으로 작품을 발표하였다.
광복 후 조선미술건설본부가 발족되어 서양화부 위원으로 위촉되었으며, 건설본부를 중심으로 다시 조선미술협회가 생기면서 부회장에 올랐다. 이 후 대한미술협회(조선미술협회가 정부수립 후 개칭)의 부회장, 문총(文總) 부회장 등 미술계의 지도적 인사로서, 그리고 국전 창설 이래 장기간에 걸친 심사 위원으로 있었으며, 홍익대학교 미술학부 교수·미술학부장·홍익대학장 등을 역임하는 등 화려한 경력을 쌓았다.
광복 후 그의 활동 무대는 주로 국전과 1958년에 창립된 목우회(木友會), 1969년에 창립된 사실화가회(寫實畫家會) 등이었다. 기타 주요한 초대전으로는 국립현대미술관 주최의 ‘근대미술 60년전’·‘현역화가 100인전’ 등이 있다.
대체로 이종우의 작가 편력은 동경미술학교 졸업을 전후로 한 시기와 파리 체류 시기, 1930년대 이후의 풍류적 생활 그리고 1945년 이후의 화단 활동 등으로 대별된다.
동경미술학교 졸업 전후의 작품으로는 그의 아버지의 상으로 보이는 초상과 향리의 풍경인 「구월산원경(九月山遠景)」이 전하고 있다. 1924년 선전 출품작인 「추억」과 「자화상」은 사진 도판으로만 전하고 있다. 이 시기의 작품 경향은 「초상」·「구월산원경」 등이 습작의 범주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이라면, 「추억」과 「자화상」은 엄격한 구도와 정감적인 대상 파악 등 당시 일본관학파(官學派)의 수준을 가늠하게 하고 있다.
1925년에서 1928년까지의 파리 체류 기간 중 제작된 작품의 경향은 고전적 사실 화풍으로 해부학적인 대상 파악이 두드러지고 있다. 「돌아선 나부」·「모부인상」·「남자나체」·「독서하는 우인」 등 일련의 인물 소재의 작품이 이 시기의 대표작이다.
1945년 이후에는 다시 정감적인 소재 해석과 자연 관조의 동양적인 취향이 지배적으로 나타나면서 파리 체류시의 작품과 극단의 대조를 보여 주고 있다. 특히, 만년에 이르러 야외 사생의 작품을 많이 남기고 있다.
미술계에 끼친 공로로 예술원상(1961)·문화훈장 대통령장(1962)을 받기도 하였다. 1974년 동아일보사는 그의 생애를 통한 주요 작품을 한자리에 모은 회고전을 개최하였으며, 동시에 본격적인 화집도 출판하였다. 이 때 파리 유학 시절의 많은 작품이 발굴, 전시되어 화제를 일으키기도 하였다.
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월간미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