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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담 이중환 淸潭 李重煥Lee JungHwan
1690 ~ 1756
조선
작가약력
- 1690(숙종 16)∼1756(영조 32). 조선 후기의 실학자.
작가 소개
본관은 여주(驪州). 자는 휘조(輝祖), 호는 청담(淸潭)·청화산인(靑華山人). 이숭진(李崇鎭)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이영(李泳)이고, 아버지는 참판 이진휴(李震休)이며, 어머니는 오상주(吳相胄)의 딸이다. 이익(李瀷)의 문인으로 실사구시(實事求是) 학풍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1713년(숙종 39) 증광 문과에 병과로 급제, 승문원정자(承文院正字)를 거쳐 1717년 김천도찰방(金泉道察訪), 1719년 승정원주서, 1722년(경종 2) 병조정랑·전적을 역임하였다.
영조가 즉위하자 목호룡(睦虎龍)의 당여로 구금되어 1725년(영조 1) 2월부터 4월까지 네 차례나 형을 받았고, 이듬 해 12월 섬에 유배되었다가, 다음 해 10월에 석방되었으나 그 해 12월에 사헌부의 탄핵으로 다시 유배되었다.
유배에서 풀려나 세상을 떠날 때까지 일정한 거처도 없이 이곳 저곳을 떠돌아다니면서 세상의 온갖 풍상을 다 겪으면서 살았다 한다. 그리하여 전라도와 평안도를 제외한 우리 나라 전역을 두루 답사했으며, 이 과정에서 당시 전국의 인심과 풍속 및 물화의 생산지·집산지 등을 파악할 수 있었다.
이 방면에 특히 관심을 가지게 된 동기는 관직에서 물러난 사대부들이 살아갈 수 있는 새로운 삶의 터전을 찾아보자는 데 있었다. 그가 가장 좋은 곳을 선정하는 기본 관점은 인심과 산천이 좋을 뿐만 아니라 경제적 교류가 좋은 곳이었는데, 이러한 것을 바탕으로 쓴 저서가 바로 『택리지』이다.
그는 여기서 당시의 정치와 경제 및 문화 등 각 방면에 주목할 만한 많은 견해를 피력해 놓았다. 먼저 신분관은 사대부와 농·공·상의 등분을 단순히 직업상의 차이에 불과하다고 생각했으며, 지배계급의 특권을 인정하지 않았다.
경제관은 인간의 생산 활동을 중시해 결국 인간은 그들 스스로를 위한 생산 활동에 의해 의식을 해결해야 한다는 점을 인식하였다.
그러기 위해서는 지리적 환경을 가장 잘 이용해야 한다는 것이 기본적인 지론이요, 사상이었다. 가장 좋은 지리적 환경이란 기름진 땅이 제일이고, 배·수레와 사람 및 물자가 모여들어 필요한 것을 바꿀 수 있는 곳이 다음이라는 것이다.
수전(水田)의 벼 생산량이나 각 지방의 특수농작물에 대해서도 대단한 관심을 기울였다. 즉, 부농들이 진안의 담배밭, 전주의 생강밭, 임천·한산의 모시밭, 안동·예안의 왕골밭[龍鬚田]등을 매점해서 이(利)를 보는 자원으로 삼고 있다는 것이다.
또한, 상업적 농업도 중시해 상업의 발달은 필연적으로 도시의 발전과 교역의 증대를 가져온다고 보았다. 그리고 우리 나라가 상선의 운용에 좋은 지리적 조건을 갖추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것을 최대한 이용하지 못하고, 조선술의 미발달 때문에 가장 불리한 말(馬)로써 물화를 운송하고 있음을 지적해 운반수단의 개선을 주장하기도 하였다.
그의 이러한 주장은 박지원(朴趾源)·박제가(朴齊家) 등의 북학파 학자들에게 계승되어 배·수레의 제조·활용을 열렬히 주창하는 데 큰 보탬이 되었다.
그는 실로 조선 후기의 대지리학자로 불려도 손색이 없겠으나, 풍수지리적인 경지를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하였다. 이는 주로 시대적인 한계에서 온 것이었고, 정치·사회·경제적 관점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였다. 그것은 또한 그의 신분적인 한계에서 온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는 사대부로서의 신분적 위치와 서민적 현실생활의 괴리에서 무척 고민한 실학자였으며, 30여 년의 방랑생활 동안 지리 및 경제·사회를 연구해 우리 나라 실학사상 빛나는 업적을 남겼다.
1713년(숙종 39) 증광 문과에 병과로 급제, 승문원정자(承文院正字)를 거쳐 1717년 김천도찰방(金泉道察訪), 1719년 승정원주서, 1722년(경종 2) 병조정랑·전적을 역임하였다.
영조가 즉위하자 목호룡(睦虎龍)의 당여로 구금되어 1725년(영조 1) 2월부터 4월까지 네 차례나 형을 받았고, 이듬 해 12월 섬에 유배되었다가, 다음 해 10월에 석방되었으나 그 해 12월에 사헌부의 탄핵으로 다시 유배되었다.
유배에서 풀려나 세상을 떠날 때까지 일정한 거처도 없이 이곳 저곳을 떠돌아다니면서 세상의 온갖 풍상을 다 겪으면서 살았다 한다. 그리하여 전라도와 평안도를 제외한 우리 나라 전역을 두루 답사했으며, 이 과정에서 당시 전국의 인심과 풍속 및 물화의 생산지·집산지 등을 파악할 수 있었다.
이 방면에 특히 관심을 가지게 된 동기는 관직에서 물러난 사대부들이 살아갈 수 있는 새로운 삶의 터전을 찾아보자는 데 있었다. 그가 가장 좋은 곳을 선정하는 기본 관점은 인심과 산천이 좋을 뿐만 아니라 경제적 교류가 좋은 곳이었는데, 이러한 것을 바탕으로 쓴 저서가 바로 『택리지』이다.
그는 여기서 당시의 정치와 경제 및 문화 등 각 방면에 주목할 만한 많은 견해를 피력해 놓았다. 먼저 신분관은 사대부와 농·공·상의 등분을 단순히 직업상의 차이에 불과하다고 생각했으며, 지배계급의 특권을 인정하지 않았다.
경제관은 인간의 생산 활동을 중시해 결국 인간은 그들 스스로를 위한 생산 활동에 의해 의식을 해결해야 한다는 점을 인식하였다.
그러기 위해서는 지리적 환경을 가장 잘 이용해야 한다는 것이 기본적인 지론이요, 사상이었다. 가장 좋은 지리적 환경이란 기름진 땅이 제일이고, 배·수레와 사람 및 물자가 모여들어 필요한 것을 바꿀 수 있는 곳이 다음이라는 것이다.
수전(水田)의 벼 생산량이나 각 지방의 특수농작물에 대해서도 대단한 관심을 기울였다. 즉, 부농들이 진안의 담배밭, 전주의 생강밭, 임천·한산의 모시밭, 안동·예안의 왕골밭[龍鬚田]등을 매점해서 이(利)를 보는 자원으로 삼고 있다는 것이다.
또한, 상업적 농업도 중시해 상업의 발달은 필연적으로 도시의 발전과 교역의 증대를 가져온다고 보았다. 그리고 우리 나라가 상선의 운용에 좋은 지리적 조건을 갖추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것을 최대한 이용하지 못하고, 조선술의 미발달 때문에 가장 불리한 말(馬)로써 물화를 운송하고 있음을 지적해 운반수단의 개선을 주장하기도 하였다.
그의 이러한 주장은 박지원(朴趾源)·박제가(朴齊家) 등의 북학파 학자들에게 계승되어 배·수레의 제조·활용을 열렬히 주창하는 데 큰 보탬이 되었다.
그는 실로 조선 후기의 대지리학자로 불려도 손색이 없겠으나, 풍수지리적인 경지를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하였다. 이는 주로 시대적인 한계에서 온 것이었고, 정치·사회·경제적 관점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였다. 그것은 또한 그의 신분적인 한계에서 온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는 사대부로서의 신분적 위치와 서민적 현실생활의 괴리에서 무척 고민한 실학자였으며, 30여 년의 방랑생활 동안 지리 및 경제·사회를 연구해 우리 나라 실학사상 빛나는 업적을 남겼다.
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