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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규삼 林圭三Lim KyuSam
1917 ~ 2008
한국
서양화
작가약력
- 학력
- 1942년, 도쿄 일본미술학교 유화과 졸업
- 기관 경력
- 1950년, 안동사범고등학교 재직
- 1958년, 신기회(新紀會) 창립(윤성호, 김진명, 윤재간, 이상우, 이달주)
- -1977년, 용산고, 수도여고, 경기여고 등
- 남가주한인미술가 협회장
- 등 역임
- 전시
- 1949년-1981년, 대한민국 미술전람회 출품
- 1961년, 대한민국 미술전람회 추천작가
- 1966년, 친선한국미술전, 말레이시아
- 1973년, 한국현역화가100인전, 국립현대미술관
- 1974년, 대한민국 미술전람회 초대작가
- 1975년, 개인전, 미술회관
- 1977년, 한국현대서양화대전, 국립현대미술관
- 1977년, 개인전, 미술회관
- 1978년, 개인전, LA 삼일당화랑
- 1979년, 한국현대미술50대전:서양화, 국립현대미술관
- 1981년, 개인전, LA 삼일당화랑
- 1984년, 현대미술초대전, 국립현대미술관
- 1991년, 개인전, 미국 가든그로브 아름화랑
- 1992년, 원로작가회화전, 국립현대미술관
- 1993년, 70년대 작품전, 예술의전당
- 1995년, 개인전, 미국 가든그로브 사비나화랑
- 등 전시
- 수상
- 1940년 제14회 신구조사전 입선
- 1941년 제12회 독립전 입선
- 1949년-1957년, 대한민국 미술전람회 입선 6회
- 1958년-1960년, 대한민국 미술전람회 특선 3회
작가 소개
임규삼은 1917년 서울에서 출생했다. 장원보통학교를 다닐 때부터 그림을 그리고 무엇이든 만드는 것을 좋아했다. 마당에 산을 만들고 연못을 파는 등 어린 시절부터 예술적인 재능을 보여주었다. 1942년 도쿄의 일본미술학교 유화과를 졸업하고 1940년 제14회 신구조사전과 1941년 제12회 독립전에서 입선을 하며 일찍이 작가적인 재능을 인정받아 화단에 등단, 순차적인 작가 생활을 밟아왔다. 해방 후 1949년 대한민국 미술전람회가 창설된 해 부터 1981년까지 30년을 국전에 출품했다. 1958년부터는 3년간 특선을 차지해 1961년 추천작가가 되었고 74년에는 초대작가가 되었다. 그는 1950년, 안동사범고등학교에서 교편을 잡기 시작해 용산고, 수도여고, 경기여고 등에서 1977년까지 사회적 격동 속에서도 꿋꿋이 교단을 지키며 후학을 양성하였고 1978년부터 미국으로 이민을 떠나 재외 작품생활을 지속하였다.
임규삼의 작품에는 과거보다는 현재를, 현재보다는 미래를 향한 희망적인 메시지가 강하게 담겼다. 그 시대를 살고 있는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외면적인 모습보다는 내면, 즉 정서에 접근해 들어가는 간접화법을 택하면서 어두운 현실을 어둡게 그리지 않고 밝게 그렸다.
초기의 그림은 향토색이 짙었다. 달, 소 양등을 많이 그렸고 정물로는 석류를 많이 그렸다. 또 치마저고리를 입은 여성들을 그렸는데 머리에 물동이를 이거나 광주리를 들고 있는 구성이었다. 50년대 한국의 어두운 현실 속에서 그는 작가적 감수성으로 시대상을 통찰하고 특히 한국여성들의 현실적인 정서를 포착했다.
1960년대에는 누드, 정물 그리고 풍경화를 함께 그렸고 대부분이 여성, 아이들로 된 인물화가 많다. 이는 시대상이 작가의 미감에 의해 재해석 되는 정서적 표현을 중시한 것에 대한 반영이며 어머니와 자식이라는 상징으로 희망에 대한 메시지로 읽힌다.
1970년대에 들어서 국가적인 경제개발계획에 따라 궁핍한 삶으로부터 벗어가게 된 한국 사회에서 그의 작업은 돌연 사실주의 시각으로 변화한다. 1970년 ‘흙 빚는 노인’, 1971년 ‘한일’ 그리고 자연경치를 묘사한 일련의 풍경화는 사실주의 화풍을 따르고 있다. 이는 현실에 대한 직접적인 관심의 표명이라고 할 수 있다. 그 동안 추적해온 애잔한 삶의 정서가 70년대 경제적 부를 추구하는 사회풍조에 의해 가려져 더 이상 회화적인 주제가 될 수 없는 상황이 되었고,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그로서는 보다 밝고 희망적인 사람들의 생활상을 그대로 옮겼다. 현실을 그대로 응시하는 작가적 시선은 인간 삶의 터전으로서의 대자연으로 옮겨지면서 그의 풍경화는 삶의 얘기가 담긴 서정시 같은 느낌을 지어낸다.
1978년 미국으로 이주한 후 1980년대로 접어들면서 색조가 한결 밝아지고 주제나 소재도 밝은 내용이 된다. 무엇보다도 색채이미지가 밝고 맑아졌다. 색채에 대한 감각은 한층 자유로운 상태가 되었는데 이는 미국 생활에서 느끼는 인상과 감정의 표현이 밝고 쾌활한 색채 이미지로 보인다. 그러나 한 가지 변하지 않은 것은 그림의 주제였다. 그의 미의식이 가진 한국의 토속적인 정서 때문에 인물화나 정물화에서는 한국인, 한국적인 소재에서 벗어나지 않는 것이었다.
1990년이 되어 가족을 주제로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자유롭게 날아다니는 새들과 온갖 동물들의 평화로운 모습으로 표현했다. 노년이 된 작가는 미술은 오래 볼수록 깊이 있는 아름다움이 있어야 하고 서정적이며 평화로워야 인간의 피폐한 마음을 치유하고 어루만질 수 있는 제 기능을 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임규삼의 작품에는 과거보다는 현재를, 현재보다는 미래를 향한 희망적인 메시지가 강하게 담겼다. 그 시대를 살고 있는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외면적인 모습보다는 내면, 즉 정서에 접근해 들어가는 간접화법을 택하면서 어두운 현실을 어둡게 그리지 않고 밝게 그렸다.
초기의 그림은 향토색이 짙었다. 달, 소 양등을 많이 그렸고 정물로는 석류를 많이 그렸다. 또 치마저고리를 입은 여성들을 그렸는데 머리에 물동이를 이거나 광주리를 들고 있는 구성이었다. 50년대 한국의 어두운 현실 속에서 그는 작가적 감수성으로 시대상을 통찰하고 특히 한국여성들의 현실적인 정서를 포착했다.
1960년대에는 누드, 정물 그리고 풍경화를 함께 그렸고 대부분이 여성, 아이들로 된 인물화가 많다. 이는 시대상이 작가의 미감에 의해 재해석 되는 정서적 표현을 중시한 것에 대한 반영이며 어머니와 자식이라는 상징으로 희망에 대한 메시지로 읽힌다.
1970년대에 들어서 국가적인 경제개발계획에 따라 궁핍한 삶으로부터 벗어가게 된 한국 사회에서 그의 작업은 돌연 사실주의 시각으로 변화한다. 1970년 ‘흙 빚는 노인’, 1971년 ‘한일’ 그리고 자연경치를 묘사한 일련의 풍경화는 사실주의 화풍을 따르고 있다. 이는 현실에 대한 직접적인 관심의 표명이라고 할 수 있다. 그 동안 추적해온 애잔한 삶의 정서가 70년대 경제적 부를 추구하는 사회풍조에 의해 가려져 더 이상 회화적인 주제가 될 수 없는 상황이 되었고,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그로서는 보다 밝고 희망적인 사람들의 생활상을 그대로 옮겼다. 현실을 그대로 응시하는 작가적 시선은 인간 삶의 터전으로서의 대자연으로 옮겨지면서 그의 풍경화는 삶의 얘기가 담긴 서정시 같은 느낌을 지어낸다.
1978년 미국으로 이주한 후 1980년대로 접어들면서 색조가 한결 밝아지고 주제나 소재도 밝은 내용이 된다. 무엇보다도 색채이미지가 밝고 맑아졌다. 색채에 대한 감각은 한층 자유로운 상태가 되었는데 이는 미국 생활에서 느끼는 인상과 감정의 표현이 밝고 쾌활한 색채 이미지로 보인다. 그러나 한 가지 변하지 않은 것은 그림의 주제였다. 그의 미의식이 가진 한국의 토속적인 정서 때문에 인물화나 정물화에서는 한국인, 한국적인 소재에서 벗어나지 않는 것이었다.
1990년이 되어 가족을 주제로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자유롭게 날아다니는 새들과 온갖 동물들의 평화로운 모습으로 표현했다. 노년이 된 작가는 미술은 오래 볼수록 깊이 있는 아름다움이 있어야 하고 서정적이며 평화로워야 인간의 피폐한 마음을 치유하고 어루만질 수 있는 제 기능을 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출처/한국일보, 김달진미술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