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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림 李林Lee Rim
1917 ~ 1983
한국
서양화
작가약력
- 학력
- 조선미술원
- 일본 데코쿠미술학교
- 일본 가와바타 미술학교
- 기관 경력
- 1949년-1972년 마산중학교, 마산여자중, 고등학교, 중동중, 고등학교 교사
- 1968년 제17회 대한민국 미술전람회 추천작가
- 1974년 제23회 대한민국 미술전람회 초대작가
- 1980년 경남미전 심사위원 서양화과 분과 위원장
- 전시
- 1941년-1989년, 개인전
- 1959년-1966년, 제5-9회 백우회 동문회전
- 1960년, 동남아 교육미술 순회전
- 1962년, 제1회 신인예술상전, 경복궁 미술관
- 1962년, 제4회 신기회전
- 1966년-1967년, 제11-12회 창작미협전, 신세계 미술관
- 1968년, 현역작가전, 경복궁 미술관
- 1968년, 동아국제미술전, 경복궁 미술관
- 1968년, 종합미전, 경복궁 미술관
- 1969년, 미공군 태평양 지구 사령부 주최 작품전, 하와이 호놀룰루
- 1971년, 깐느 국제회화전, 깐느
- 1973년, 한국 현역작가 100인전, 국립현대미술관
- 1977년, 한국 현대 서양화 대전, 국립현대미술관
- 1977년, 제4회 한국 미술 대상전, 국립현대미술관
- 1977년, 역대 국전 수상 작가전, 국립현대미술관
- 1978년, 한국 상형전: 일본 아시아 미술, 미술회관
- 1978년, 상형전 창립 회원전
- 1978년, 교우회 합동전
- 1979년, 제15회 아시아 현대 미술전, 동경 동경도 미술관
- 1979년, 한국 미술 오늘의 방법전, 미술회관
- 1980년, 제5회 상형전
- 1980년, 제1회 이웃돕기 미술전, 강남구청
- 1984년, 유작전, 미술회관
- 1987년, 유작전, 국립현대미술관
- 1993년, 유작전, 예술의전당
- 1997년, 이림, 박길웅 화백 기증작품 특별전, 국립현대미술관
- 2000년, 한국 현대미술의 시원, 국립현대미술관
- 수상
- 1960년-1961년, 대한민국 미술전람회 입선
- 1962년-1967년, 대한민국 미술전람회 특선 4회
- 1962년, 제1회 신인예술상전 차석상
- 1963년, 서울시 문화상
- 1965년, 대한민국 미술전람회 문교부장관상
작가 소개
본관은 전주(全州). 본명은 정규(正揆). 경상남도 마산 출신. 한의사 가문의 둘째아들로 태어났다. 1936년에 서울의 조선미술원에서 서양화가 박광진(朴廣鎭)에게 유화를 배우다가 다음해 동경(東京)으로 가서 데이고쿠미술학교(帝國美術學校) 서양화과에 입학하였으나 중도에 자퇴한 뒤 마산으로 돌아와 홀로 제작생활을 하였다.
마산의 중·고등학교에서 미술교사를 지내며 개인전과 혁토사(爀土社)·흑마회(黑馬會) 등의 그룹에 참가하여 향토적이고 토속적인 시각의 자연풍경·선창가·어물 및 인물 풍정 등 정감 짙은 작품을 발표하였다. 1959년에 서울로 이주하여 뒤늦게 국전(國展)에 참가, 몇 차례의 특선을 거쳐 추천작가·초대작가 및 심사위원을 역임하였고, 신기회전(新紀會展)·형상전(形象展) 등에도 회원으로 참여하였다.
1960년 무렵부터는 미술계의 새로운 분위기에 동조한 추상작업으로 중후하고 풍부한 색상과 구성적이며 상징성을 내포하는 자유로운 형상의 화면을 추구하였다. 그 경향의 작품은 주로 국전에 출품되었다. 그러나 1970년대 이후에는 서정적인 자연주의 형태로 시골생활의 정경을 소재로 삼은 작품들도 병행시켰다. 1971년에 비구상작품 「관계」가 카뉴 국제회화제에 출품되었다.
이림은 한국 현대 비구상 회화의 발전에 있어 중요한 역할을 했던 작가이다. 고향인 마산에서 제작한 초기의 작품들은 농촌 또는 어촌의 삶과 풍경을 소재로 하여 향토적인 순수한 정감을 담은 작품들이었다. 그러나 1959년 서울로 올라와 정착한 이후 이림은 추상적인 순수 화면을 추구하는 비구상 회화로 작품 경향을 전환하게 된다. 작가의 비구상 회화는 60년대에 구축적이고 구성적인 전개로 시작되어 70년대에는 유동적이고 자유로운 형태에 대한 실험으로 발전하였다. 이렇게 추상회화를 지향하는 가운데에서도 작가는 종종 구상적 요소들을 화면에 등장시켰다. 이에 관하여 평론가 이구열은 ""이림은 국전을 중심으로 순수조형의 추상작가로 뒤늦게 자신을 재정립하는 놀라운 도전에 성공하고 있었으나, 마음 속 한편으로는 자연주의적 표현충동과 향토적인 이야기가 담기는 평화롭고 서정적 주제의 화면을 버리지 못한 순박한 예술가였다""라고 언급하였다.
마산의 중·고등학교에서 미술교사를 지내며 개인전과 혁토사(爀土社)·흑마회(黑馬會) 등의 그룹에 참가하여 향토적이고 토속적인 시각의 자연풍경·선창가·어물 및 인물 풍정 등 정감 짙은 작품을 발표하였다. 1959년에 서울로 이주하여 뒤늦게 국전(國展)에 참가, 몇 차례의 특선을 거쳐 추천작가·초대작가 및 심사위원을 역임하였고, 신기회전(新紀會展)·형상전(形象展) 등에도 회원으로 참여하였다.
1960년 무렵부터는 미술계의 새로운 분위기에 동조한 추상작업으로 중후하고 풍부한 색상과 구성적이며 상징성을 내포하는 자유로운 형상의 화면을 추구하였다. 그 경향의 작품은 주로 국전에 출품되었다. 그러나 1970년대 이후에는 서정적인 자연주의 형태로 시골생활의 정경을 소재로 삼은 작품들도 병행시켰다. 1971년에 비구상작품 「관계」가 카뉴 국제회화제에 출품되었다.
이림은 한국 현대 비구상 회화의 발전에 있어 중요한 역할을 했던 작가이다. 고향인 마산에서 제작한 초기의 작품들은 농촌 또는 어촌의 삶과 풍경을 소재로 하여 향토적인 순수한 정감을 담은 작품들이었다. 그러나 1959년 서울로 올라와 정착한 이후 이림은 추상적인 순수 화면을 추구하는 비구상 회화로 작품 경향을 전환하게 된다. 작가의 비구상 회화는 60년대에 구축적이고 구성적인 전개로 시작되어 70년대에는 유동적이고 자유로운 형태에 대한 실험으로 발전하였다. 이렇게 추상회화를 지향하는 가운데에서도 작가는 종종 구상적 요소들을 화면에 등장시켰다. 이에 관하여 평론가 이구열은 ""이림은 국전을 중심으로 순수조형의 추상작가로 뒤늦게 자신을 재정립하는 놀라운 도전에 성공하고 있었으나, 마음 속 한편으로는 자연주의적 표현충동과 향토적인 이야기가 담기는 평화롭고 서정적 주제의 화면을 버리지 못한 순박한 예술가였다""라고 언급하였다.
출처/월간미술, 한국민족문화대백과, 국립현대미술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