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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르주 브라크 Georges Braque

1882 ~ 1963

프랑스

서양화

작가약력

  • 1882.5.13 ~ 1963.8.31. 프랑스의 화가. 근대 프랑스 회화의 아버지.

작가 소개

조르주 브라크(Georges Braque)는 1882년 프랑스 파리 근교의 아르장퇴유에서 태어났다. 센 강변에 자리한 아르장퇴유는 인상파 화가들이 즐겨 찾던 곳이다. 어린 시절 그는 가족과 함께 바닷가 도시 르 아브르로 옮겨 이곳에서 성장했는데, 이곳 역시 화가들의 거처로 인기가 많았다. 그의 아버지와 할아버지는 주택 도장과 실내 디자인 사업에 종사했다. 브라크는 어릴 때부터 조수로 아버지의 일을 도왔지만, 점차 순수미술에 관심을 가지게 되면서 십대 중반에 르 아브르에 있는 에콜 데 보자르 야간반에서 그림을 공부했다.
1900년 브라크는 르 아브르를 떠나 파리로 이주했다. 그는 라울 뒤피(Raoul Dufy)와 오통 프리에스(Othon Friesz)와 어울리며 인상주의와 야수주의 운동의 영향 하에서 활동했다. 또한 폴 세잔(Paul Cézanne)에도 큰 관심을 기울였다. 세잔의 명성은 20세기로 접어들면서 급격하게 높아져서, 세잔이 사망한 지 1년 뒤인 1907년에는 파리에서 대대적인 회고전이 열렸다. 브라크는 이듬해인 1908년 여름 세잔이 말년을 보낸 남프랑스의 에스타크를 방문해 세잔 특유의 단순화된 형태와 억제된 색채를 적용한 풍경화를 그렸다.
브라크는 이 과정에서 단순히 외형적인 형태를 단순화하는 데 그치지 않고, 더욱 명확하게 그리고자 구체적인 묘사를 과감하게 생략했다. 게다가 형식을 강조하기 위해 색채를 녹색, 갈색, 황토색으로 제한했다. 색 자체에서 형태를 만들어낸 세잔과 달리, 브라크는 색채를 사물의 형태를 강조하기 위한 용도로만 사용했다. 에스타크에서 여름을 보내고 그해 가을, 브라크는 에스타크에서 그린 자신의 그림을 파리 살롱전에 출품했다. 하지만 심사위원들의 반응은 냉담했다. 비평가 루이 보셀(Louis Vauxcelles)은 브라크의 작품에 대해 경멸의 조로 ‘입체’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이후 이 말은 ‘입체파(큐비즘)’라는 20세기의 가장 영향력 있는 미술운동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이 시기에 젊은 화상 다니엘 앙리 칸바일러(Daniel-Henry Kahnweiler)가 브라크의 작품을 모아 전시했다. 칸바일러는 브라크에게 당시 파리 미술계에서 엄청난 명성을 얻고 있던 파블로 피카소(Pablo Picasso)를 소개했다. 1909년부터 1914년까지 브라크와 피카소는 늘 함께 작업했고 의견을 나누면서 새로운 실험에 착수했다. 두 사람은 2차원의 평면 위에서 3차원의 오브제를 표현하기 위해 전통적인 구도를 파기하는 시도를 감행했다. 그들이 이 시기에 제작한 입체파 작품들은 미술사의 전체 지형도를 바꿔놓았고, 오늘날까지 미술가들에게 지속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
1908년부터 1911년까지 ‘분석적 입체주의’ 시기 동안 브라크는 초창기의 생생한 색채를 포기하고 형태와 입체감, 선에 대한 엄정한 연구에 집중했다. 이 시기의 브라크와 피카소의 공동 작업은 너무도 긴밀해서 각자의 작품 구별이 거의 불가능할 정도였다. 뒤이은 ‘종합적 입체주의’라고 불리는 1912년부터 1914년 동안에 브라크는 신문 조각이나 모래, 톱밥 등 일반적으로 회화의 범주에서 벗어나는 재료를 도입하여 콜라주 기법으로 캔버스에 부착하여 제작한 아상블라주와 종이를 이용한 콜라주인 파피에 콜레, 눈속임기법인 트롱프뢰유, 두껍게 칠하기와 같은 새로운 기법을 선보임으로써 한결 탁월한 독창성을 발휘했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브라크는 전쟁터로 나갔다. 1915년 부상으로 전역한 브라크는 전쟁 중에 입은 머리 부상으로 1년 동안 요양을 한 뒤 다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 사이 파리에 남아 있었던 피카소는 상당한 명성을 떨치고 있었으며, 이제 두 사람은 각자의 길을 걷게 되었다. 브라크는 정물화라는 주제에 매달리며 꾸준히 입체주의의 가능성을 탐구하여 보다 세련된 경지로 입체주의를 밀고 나갔다. 특히 만년에 이를수록 조용하고 차분하게 가라앉은 색채감은 이성과 감각의 미묘한 조화를 중시하는 프랑스적인 전통의 흐름과도 맥을 같이 한다.
브라크는 1920년대 들면서 신고전주의적이고 기념비적인 여인의 형상을 화폭에 담기 시작했다. 그리고 세르게이 디아킬레프(Sergey Pavlovich Diaghilev)의 ‘발레 뤼스’의 무대장치를 디자인하기도 했고, 조각이나 스테인드글라스, 보석공예, 그래픽디자인 분야에서도 실험적인 활동을 지속했다. 후기에는 ‘작업실’ 연작, ‘당구대’ 연작, 그리고 ‘새’의 이미지를 도입한 캔버스화를 많이 그렸다. 그는 1948년 제24회 베네치아 비엔날레에서 회화 부문 1등상을 수상했다. 1961년에는 살아 있는 화가로서는 처음으로 루브르 박물관에 그의 작품이 전시되었다. 브라크는 1963년 파리에서 생을 마감했다.
주요 작품으로 《에스타크 풍경 Paysage de l`Estaque》(1906), 《에스타크의 집 Houses at L`Estaque》(1908), 《거대한 나부 Grand Nu》(1908), 《포르투갈인 Le Portugais》(1911), 《과일 접시와 유리잔 Fruit Dish and Glass》(1912), 《바이올린과 파이프 Violin and Pipe》(1913~1914), 《카네포르(제물 바구니를 머리에 인 처녀) Canéphore》(1922), 《만돌린이 있는 정물 Still Life with a Mandolin》(1935), 《거실 Le salon》(1944), 《작업실 V Atelier V》(1950) 등이 있다.
출처/두산백과, 501 위대한 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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