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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송 최규상 雪松 崔圭祥Choi GyuSang
1891 ~ 1956
한국
서화
작가약력
- 전라북도 김제 출신의 서화가
- 석정 이정직․성재 김태석 사사
- 경력
- 1924-1930 전북 김제 백산면장
- 김제군청근무
- 1946 대동한묵회 창립회원
- 1954 학술원 추천회원
- 전주한묵회․이묵의 회원
- 등 역임
- 전시
- 1931 선전 입선
- 전주한묵회전
- 1946 대동한묵회전
- 이묵회전
- 등 전시
작가 소개
최규상(崔圭祥)의 본관은 전주(全州)이고, 호는 춘곡(春谷)·설송(雪松)·설하(雪霞), 자는 백심(伯心)이다. 초명은 규하(圭夏)로 지었으나 후에 보근(輔根)이라 불렀다. 호는 처음에는 춘곡(春谷)으로 불렀다가 전주로 이거하며 설송으로 불렀고, 말년에는 설하(雪霞)라 하였다. 당호는 노하당주인(老霞堂主人) 또는 취묵헌주인(醉墨軒主人)이라 하였다.
최규상은 1891년 지금의 전라북도 김제시 진봉면 고사리에서 태어났다. 고려 충숙왕(忠肅王) 때 문하시중을 지낸 문성공(文成公) 최아(崔阿)의 22세손이다. 아버지 최보열(崔輔烈)은 도학과 문장으로 이름난 유학자로서, 전라북도 정읍시 태인(泰仁)에 있는 무성서원(武城書院)의 도내 장의(掌議)와 만경군(萬頃郡) 도헌(都憲)을 지냈다.
최규상은 어려서부터 성품이 온유하고 몸가짐이 단정하여 가난한 생활 속에서도 학문을 닦는 데 게으르지 않았다. 일찍이 석정(石亭) 이정직(李定稷)[1840~1910]의 문하에서 학문과 서도를 연마하였다. 군산에 있는 측량 학교에서 신학문을 익힌 뒤, 한때 백산면장을 역임했으며, 석교학교를 세우고 경영하였다.
1930년 전주로 이거하여 성재(惺齋) 김태석(金台錫)에게 사사하여 전서(篆書)와 예서(隸書) 및 전각을 배웠으며, 전주의 효산(曉山) 이광렬(李光烈)과 교유하여 많은 활동을 하였다. 대동한묵회원으로 활동하였고, 1954년에는 학술원과 예술원의 추천회원이 되었다. 1955년에는 덕수궁미술관에서 열린 제1회 현대미술 상시전람회에 작품을 출품하였다. 만년에는 서도에 정진하여 전주에 한묵회(翰墨會)를 창설하고 후진을 양성하여 학정(鶴汀) 백홍기(白洪基) 등을 배출하였다.
유재(裕齋) 송기면(宋基冕)은 최규상의 인품에 대해, “눈처럼 깨끗하고 노송처럼 고고한 속되지 않는 몸으로, 저자거리에 숨어 세속과 함께 하네.”라고 말하였다. 서체는 구양순체(歐陽詢體)에 기초를 두었으나 안진경체(顔眞卿體)를 체득하여 해서(楷書)·행서(行書)·초서(草書)·예서에 능통하여 독창적 경지에 이르렀다. 묘소는 전라북도 김제시 성덕면 대목리 산59-1번지인 서김제 톨게이트 북쪽 50m 지점에 자리하고 있다. 이곳에는 아버지 최보열의 묘소도 함께 있다.
최규상의 글씨는 경향 각지의 각종 기념비문과 묘비·주련(柱聯)·현액(懸額)에서 많이 찾아볼 수 있으며, 문장에도 능하여 서한과 기문에서 그의 우아한 문필을 볼 수 있다. 전북도립미술관 및 강암서예관에 작품이 소장되어 있으며, 전주의 기령당과 완주 소양 주덕재 등에 편액(扁額)이 남아 있다.
최규상은 1891년 지금의 전라북도 김제시 진봉면 고사리에서 태어났다. 고려 충숙왕(忠肅王) 때 문하시중을 지낸 문성공(文成公) 최아(崔阿)의 22세손이다. 아버지 최보열(崔輔烈)은 도학과 문장으로 이름난 유학자로서, 전라북도 정읍시 태인(泰仁)에 있는 무성서원(武城書院)의 도내 장의(掌議)와 만경군(萬頃郡) 도헌(都憲)을 지냈다.
최규상은 어려서부터 성품이 온유하고 몸가짐이 단정하여 가난한 생활 속에서도 학문을 닦는 데 게으르지 않았다. 일찍이 석정(石亭) 이정직(李定稷)[1840~1910]의 문하에서 학문과 서도를 연마하였다. 군산에 있는 측량 학교에서 신학문을 익힌 뒤, 한때 백산면장을 역임했으며, 석교학교를 세우고 경영하였다.
1930년 전주로 이거하여 성재(惺齋) 김태석(金台錫)에게 사사하여 전서(篆書)와 예서(隸書) 및 전각을 배웠으며, 전주의 효산(曉山) 이광렬(李光烈)과 교유하여 많은 활동을 하였다. 대동한묵회원으로 활동하였고, 1954년에는 학술원과 예술원의 추천회원이 되었다. 1955년에는 덕수궁미술관에서 열린 제1회 현대미술 상시전람회에 작품을 출품하였다. 만년에는 서도에 정진하여 전주에 한묵회(翰墨會)를 창설하고 후진을 양성하여 학정(鶴汀) 백홍기(白洪基) 등을 배출하였다.
유재(裕齋) 송기면(宋基冕)은 최규상의 인품에 대해, “눈처럼 깨끗하고 노송처럼 고고한 속되지 않는 몸으로, 저자거리에 숨어 세속과 함께 하네.”라고 말하였다. 서체는 구양순체(歐陽詢體)에 기초를 두었으나 안진경체(顔眞卿體)를 체득하여 해서(楷書)·행서(行書)·초서(草書)·예서에 능통하여 독창적 경지에 이르렀다. 묘소는 전라북도 김제시 성덕면 대목리 산59-1번지인 서김제 톨게이트 북쪽 50m 지점에 자리하고 있다. 이곳에는 아버지 최보열의 묘소도 함께 있다.
최규상의 글씨는 경향 각지의 각종 기념비문과 묘비·주련(柱聯)·현액(懸額)에서 많이 찾아볼 수 있으며, 문장에도 능하여 서한과 기문에서 그의 우아한 문필을 볼 수 있다. 전북도립미술관 및 강암서예관에 작품이 소장되어 있으며, 전주의 기령당과 완주 소양 주덕재 등에 편액(扁額)이 남아 있다.
출처/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한국학중앙연구원, 김달진미술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