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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성 이준 一醒 李儁Lee Jun
1859 ~ 1907
조선
작가약력
- 1859(철종 10)∼1907. 조선 말기의 순국열사·애국계몽운동가.
작가 소개
본관은 전주(全州). 초명은 성재(性在)·여천(汝天)·선재(璿在). 자는 순칠(舜七), 호는 일성(一醒)·해사(海史)·청하(靑霞)·해옥(海玉). 함경남도 북청 출신. 아버지는 병관(秉瓘)이다.
1887년(고종 24) 북청에서 초시에 합격해 1894년 함흥의 순릉참봉(純陵參奉)이 되었다. 1895년 법관양성소를 졸업하고, 1896년 한성재판소 검사보가 되었다. 같은 해 2월 아관파천이 일어나자 사임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 법과를 졸업하고 귀국하였다.
1898년 독립협회에 가입해 11월의 만민공동회에서 가두연설을 하는 등 적극적으로 활동하였다. 1902년 이상재(李商在)·민영환(閔泳煥)·이상설(李相卨)·이동휘(李東輝)·양기탁(梁起鐸) 등과 비밀결사인 개혁당(改革黨) 운동을 추진하였다.
1904년 일제가 제1차 한일의정서를 강제체결하고 내정간섭을 자행하면서 침략정책을 강화하자, 이에 대한 반대시위운동을 일으키는 데 주동적 구실을 하였다.
같은 해 일본이 황무지개척권을 요구하자, 송수만(宋秀晩)·원세성(元世性) 등 다수의 동지들과 함께 대한보안회(大韓輔安會)를 조직해 총무를 맡고 반대투쟁을 전개하였다.
보안회가 일제의 강압에 의해 해산되자 후속단체로 이상설과 함께 대한협동회(大韓協同會)를 조직해 부회장을 맡고, 다시 일본의 황무지개척권 요구를 강력히 반대해 결국 이를 저지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1904년 12월 일제가 친일분자들로 일진회(一進會)를 조직해 매국활동을 시작하게 되자, 이에 대항해 윤하영(尹夏榮)·양한묵(梁漢默) 등과 공진회(共進會)를 조직하였다. 회장이 되어, 반일진회 투쟁을 전개하다가 일제의 강압으로 황해도 철도(鐵島)에 6개월간 유배당하였다.
민영환의 주선으로 석방된 뒤 1905년 5월 윤효정(尹孝定)·양한묵 등과 헌정연구회(憲政硏究會)를 조직해 다시 항일국민운동을 벌였다. 같은 해 평리원 검사를 거쳐 특별법원 검사로 임명되었다.
1905년 11월 일제가 을사조약을 강제체결하고 국권을 박탈하자, 상동교회(尙洞敎會)에 모인 전덕기(全德基)·최재학(崔在學)·정순만(鄭淳萬)·이동녕(李東寧) 등 다수의 동지들과 함께 을사조약폐기 상소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정하였다. 이준이 상소문을 짓고 대한문(大漢門) 앞과 서울 시내에서 일본경찰과 투석전을 벌이며 격렬한 시위운동을 전개하였다.
1906년 국권회복을 위한 실력양성을 목적으로 전덕기·유성준(兪星濬)과 함께 국민교육회(國民敎育會)를 조직해, 회장으로 있으면서 교육구국운동을 시작하고 보광학교(普光學校)를 설립하였다.
또한, 설태희(薛泰熙) 등 동지들과 고향인 함경도의 애국계몽운동단체로 한북흥학회(漢北興學會)를 조직, 지도해 함경도지방의 교육구국운동의 발흥에 큰 발판을 마련하였다.
1907년 1월 대구에서 국채보상운동이 일어나자 전국운동으로 확대하기 위해 서울에 국채보상연합회의소(國債報償聯合會議所)를 설립하고 소장이 되어 모금운동을 벌였다. 같은 해 4월 양기탁·안창호(安昌浩)·전덕기 등이 중심이 되어 국권회복을 위한 비밀결사로 신민회(新民會)가 창립되자, 이에 가입해 활동하였다.
같은 해 6, 7월 네덜란드의 헤이그에서 세계평화회의가 열린다는 소식이 있었다. 그는 전덕기·이회영(李會榮)·박상궁(朴尙宮) 등의 도움을 받아 고종을 만나 이 평화회의에 특사를 파견해, 을사조약이 고종의 의사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일본의 강압으로 체결된 조약이므로 무효라는 것을 세계 만방에 선언하고, 한국독립에 관한 열국의 지원을 요청할 것을 제의해 고종의 동의를 받았다.
그리하여 그는 헤이그특사단의 부사가 되어 1907년 4월 22일 서울을 출발해 블라디보스토크에 가서 정사 이상설과 합류하고, 다시 러시아의 수도 페테르스부르크로 가서 이위종(李瑋鍾)과 합류, 6월 25일 헤이그에 도착하였다.
세계평화회의 의장에게 고종의 친서와 신임장을 전하고 평화회의장에 한국대표로서 공식적으로 참석하기 위한 활동을 전개했으나, 일본대표와 영국대표의 방해로 성공하지 못하였다.
이에 세 특사는 일제의 한국침략을 폭로, 규탄하고 을사조약이 무효임을 선언하는 공고사(控告詞)를 작성해 평화회의 의장과 각국 대표에게 보냈다. 또 신문에 이를 공표해 국제여론을 환기시켰다. 신문기자들과 언론들은 세 특사의 활동에 호의적이었으나, 열강의 대표들은 냉담하였다. 이에 격분한 그는 통분을 누르지 못해 헤이그에서 순국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1963년 헤이그에서 유해를 옮겨와 국민장으로 서울 수유리에 안장했으며, 1964년 장충단공원에 동상이 건립되었다.
1887년(고종 24) 북청에서 초시에 합격해 1894년 함흥의 순릉참봉(純陵參奉)이 되었다. 1895년 법관양성소를 졸업하고, 1896년 한성재판소 검사보가 되었다. 같은 해 2월 아관파천이 일어나자 사임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 법과를 졸업하고 귀국하였다.
1898년 독립협회에 가입해 11월의 만민공동회에서 가두연설을 하는 등 적극적으로 활동하였다. 1902년 이상재(李商在)·민영환(閔泳煥)·이상설(李相卨)·이동휘(李東輝)·양기탁(梁起鐸) 등과 비밀결사인 개혁당(改革黨) 운동을 추진하였다.
1904년 일제가 제1차 한일의정서를 강제체결하고 내정간섭을 자행하면서 침략정책을 강화하자, 이에 대한 반대시위운동을 일으키는 데 주동적 구실을 하였다.
같은 해 일본이 황무지개척권을 요구하자, 송수만(宋秀晩)·원세성(元世性) 등 다수의 동지들과 함께 대한보안회(大韓輔安會)를 조직해 총무를 맡고 반대투쟁을 전개하였다.
보안회가 일제의 강압에 의해 해산되자 후속단체로 이상설과 함께 대한협동회(大韓協同會)를 조직해 부회장을 맡고, 다시 일본의 황무지개척권 요구를 강력히 반대해 결국 이를 저지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1904년 12월 일제가 친일분자들로 일진회(一進會)를 조직해 매국활동을 시작하게 되자, 이에 대항해 윤하영(尹夏榮)·양한묵(梁漢默) 등과 공진회(共進會)를 조직하였다. 회장이 되어, 반일진회 투쟁을 전개하다가 일제의 강압으로 황해도 철도(鐵島)에 6개월간 유배당하였다.
민영환의 주선으로 석방된 뒤 1905년 5월 윤효정(尹孝定)·양한묵 등과 헌정연구회(憲政硏究會)를 조직해 다시 항일국민운동을 벌였다. 같은 해 평리원 검사를 거쳐 특별법원 검사로 임명되었다.
1905년 11월 일제가 을사조약을 강제체결하고 국권을 박탈하자, 상동교회(尙洞敎會)에 모인 전덕기(全德基)·최재학(崔在學)·정순만(鄭淳萬)·이동녕(李東寧) 등 다수의 동지들과 함께 을사조약폐기 상소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정하였다. 이준이 상소문을 짓고 대한문(大漢門) 앞과 서울 시내에서 일본경찰과 투석전을 벌이며 격렬한 시위운동을 전개하였다.
1906년 국권회복을 위한 실력양성을 목적으로 전덕기·유성준(兪星濬)과 함께 국민교육회(國民敎育會)를 조직해, 회장으로 있으면서 교육구국운동을 시작하고 보광학교(普光學校)를 설립하였다.
또한, 설태희(薛泰熙) 등 동지들과 고향인 함경도의 애국계몽운동단체로 한북흥학회(漢北興學會)를 조직, 지도해 함경도지방의 교육구국운동의 발흥에 큰 발판을 마련하였다.
1907년 1월 대구에서 국채보상운동이 일어나자 전국운동으로 확대하기 위해 서울에 국채보상연합회의소(國債報償聯合會議所)를 설립하고 소장이 되어 모금운동을 벌였다. 같은 해 4월 양기탁·안창호(安昌浩)·전덕기 등이 중심이 되어 국권회복을 위한 비밀결사로 신민회(新民會)가 창립되자, 이에 가입해 활동하였다.
같은 해 6, 7월 네덜란드의 헤이그에서 세계평화회의가 열린다는 소식이 있었다. 그는 전덕기·이회영(李會榮)·박상궁(朴尙宮) 등의 도움을 받아 고종을 만나 이 평화회의에 특사를 파견해, 을사조약이 고종의 의사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일본의 강압으로 체결된 조약이므로 무효라는 것을 세계 만방에 선언하고, 한국독립에 관한 열국의 지원을 요청할 것을 제의해 고종의 동의를 받았다.
그리하여 그는 헤이그특사단의 부사가 되어 1907년 4월 22일 서울을 출발해 블라디보스토크에 가서 정사 이상설과 합류하고, 다시 러시아의 수도 페테르스부르크로 가서 이위종(李瑋鍾)과 합류, 6월 25일 헤이그에 도착하였다.
세계평화회의 의장에게 고종의 친서와 신임장을 전하고 평화회의장에 한국대표로서 공식적으로 참석하기 위한 활동을 전개했으나, 일본대표와 영국대표의 방해로 성공하지 못하였다.
이에 세 특사는 일제의 한국침략을 폭로, 규탄하고 을사조약이 무효임을 선언하는 공고사(控告詞)를 작성해 평화회의 의장과 각국 대표에게 보냈다. 또 신문에 이를 공표해 국제여론을 환기시켰다. 신문기자들과 언론들은 세 특사의 활동에 호의적이었으나, 열강의 대표들은 냉담하였다. 이에 격분한 그는 통분을 누르지 못해 헤이그에서 순국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1963년 헤이그에서 유해를 옮겨와 국민장으로 서울 수유리에 안장했으며, 1964년 장충단공원에 동상이 건립되었다.
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