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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봉 황보인 芝峰 皇甫仁Hwang BoIn
1387 ~ 1453
조선
작가약력
- 1387(고려 우왕 13)∼1453(단종 1). 조선 전기의 문신.
작가 소개
본관은 영천(永川). 자는 사겸(四兼)·춘경(春卿), 호는 지봉(芝峰). 아버지는 지중추원사(知中樞院事) 황보임(皇甫琳)이다.
1387년에 출생하였으며 문음(門蔭)으로 벼슬에 나가 내자시직장(內資寺直長)·사헌부감찰 등을 역임하였다. 그러다가 1414년(태종 14) 친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1418년(세종 즉위년) 좌정언이 되었고, 1420년 좌헌납이 되었다.
1422년에는 사재감부정(司宰監副正)으로서 강원도경차관으로 파견되어 기근을 규찰한 뒤 귀환해 곧 장령이 되었다. 1425년 1월 한성소윤(漢城少尹) 재임중 경상도찰방으로 파견되었으며, 지승문원사(知承文院事)를 거쳐 1428년 집의가 되었다.
다음해에는 승정원동부대언(承政院同副代言)으로 발탁되었다. 그리고 좌부대언을 거쳐 1430년에는 지신사(知申事)가 되었다. 1431년 강무행행(講武行幸)중에 추위와 굶주림으로 인마(人馬)가 죽거나 다치자 이에 대한 문책으로 파면되었다.
그 뒤 얼마 안 있어 형조참의로 복직되었으며, 이어 강원도관찰사가 되었다. 그리고 1432년 형조좌참판·병조우참판 등을 역임하였다. 그 해 10월부터 다음해 1월에는 사은사(謝恩使) 정효전(鄭孝全)의 부사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433년 판중추원사 하경복(河敬復), 형조판서 정흠지(鄭欽之), 예문관대제학 정초(鄭招) 등과 함께 진서(陣書)를 찬진(撰進)하였다. 이듬해 병조참판을 거쳐 1436년에 병조판서가 되었다.
1440년에는 평안·함길도도체찰사로 파견되었다. 그리고 그 해 의정부좌참찬 겸 판병조사(議政府左參贊兼判兵曹事)가 되면서 국왕으로부터 대소행행(大小行幸)에 항상 호종하라고 할 정도로 아낌을 받았다.
1441년 함길도에 파견되어 종성을 수주(愁州) 강변으로 이치(移置)하면서 종성·회령·온성·경원·경흥 등지에 소보(小堡)를 설치해 북방의 방어를 강화하였다. 이후 빈번하게 평안도와 함길도를 출입하면서 김종서(金宗瑞)와 쌍벽이 되어 북변을 개척하고 방어하는 데 공헌하였다.
1445년 좌찬성으로 판이조사(判吏曹事)를 겸임하고, 1447년 우의정이 되었다. 그 뒤 1449년 양계축성(兩界築城)의 일에 전념하기 위해서 우의정의 사직을 청하였다. 그러나 허락되지 않아 그대로 우의정에 유임하면서 축성사를 관장하다가 그 해 좌의정이 되었다.
1450년(문종 즉위년) 사은사로 부사 김효성(金孝誠)과 함께 명나라에 파견되었다. 문종의 고명(誥命)을 받고 귀환했으며, 이듬 해 영의정부사(領議政府事)가 되었다. 1452년(단종 즉위년) 빈전(殯殿)·국장(國葬)·산릉도감(山陵都監)의 총호사(總護使)가 되어 문종의 국상을 총령하였다.
다음해에 영춘추관사(領春秋館事)로서 감춘추관사 김종서 등과 함께 『세종실록』을 찬진하였다. 1453년 계유정난으로 좌의정 김종서, 우의정 정분(鄭苯), 우찬성 이양(李穰), 이조판서 조극관(趙克寬) 등과 함께 어린 단종을 보필하던 중 피살되었다.
오랫동안 신원(伸寃: 억울하게 입은 죄를 풀어줌.)되지 못하다가, 1705년(숙종 31) 7월 한성부판윤 민진후(閔鎭厚)의 상소를 계기로 김종서와 함께 복관(復官)이 논의되었으나 실행되지는 못하였다.
그 뒤 1719년 후손이 전조(銓曹: 吏曹)에 서록(敍錄)됨으로써 부분적으로 신원되었다. 그러다가 1746년(영조 22) 복관되면서 완전히 신원되었다. 1758년에는 충정(忠定)의 시호를 받았다.
1791년(정조 15)장릉(莊陵: 端宗陵)충신단(忠臣壇)에 배식(配食)되었다. 그리고 1804년(순조 4) 집 앞에 정문이 세워졌으며, 1807년에는 조상의 묘를 옮기지 않는 부조지전(不祧之典)을 받았다. 영천의 임고서원(臨皐書院), 포항구룡포읍의 광남서원(廣南書院), 종성의 행영사(行營祠)에 제향되었다.
1387년에 출생하였으며 문음(門蔭)으로 벼슬에 나가 내자시직장(內資寺直長)·사헌부감찰 등을 역임하였다. 그러다가 1414년(태종 14) 친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1418년(세종 즉위년) 좌정언이 되었고, 1420년 좌헌납이 되었다.
1422년에는 사재감부정(司宰監副正)으로서 강원도경차관으로 파견되어 기근을 규찰한 뒤 귀환해 곧 장령이 되었다. 1425년 1월 한성소윤(漢城少尹) 재임중 경상도찰방으로 파견되었으며, 지승문원사(知承文院事)를 거쳐 1428년 집의가 되었다.
다음해에는 승정원동부대언(承政院同副代言)으로 발탁되었다. 그리고 좌부대언을 거쳐 1430년에는 지신사(知申事)가 되었다. 1431년 강무행행(講武行幸)중에 추위와 굶주림으로 인마(人馬)가 죽거나 다치자 이에 대한 문책으로 파면되었다.
그 뒤 얼마 안 있어 형조참의로 복직되었으며, 이어 강원도관찰사가 되었다. 그리고 1432년 형조좌참판·병조우참판 등을 역임하였다. 그 해 10월부터 다음해 1월에는 사은사(謝恩使) 정효전(鄭孝全)의 부사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433년 판중추원사 하경복(河敬復), 형조판서 정흠지(鄭欽之), 예문관대제학 정초(鄭招) 등과 함께 진서(陣書)를 찬진(撰進)하였다. 이듬해 병조참판을 거쳐 1436년에 병조판서가 되었다.
1440년에는 평안·함길도도체찰사로 파견되었다. 그리고 그 해 의정부좌참찬 겸 판병조사(議政府左參贊兼判兵曹事)가 되면서 국왕으로부터 대소행행(大小行幸)에 항상 호종하라고 할 정도로 아낌을 받았다.
1441년 함길도에 파견되어 종성을 수주(愁州) 강변으로 이치(移置)하면서 종성·회령·온성·경원·경흥 등지에 소보(小堡)를 설치해 북방의 방어를 강화하였다. 이후 빈번하게 평안도와 함길도를 출입하면서 김종서(金宗瑞)와 쌍벽이 되어 북변을 개척하고 방어하는 데 공헌하였다.
1445년 좌찬성으로 판이조사(判吏曹事)를 겸임하고, 1447년 우의정이 되었다. 그 뒤 1449년 양계축성(兩界築城)의 일에 전념하기 위해서 우의정의 사직을 청하였다. 그러나 허락되지 않아 그대로 우의정에 유임하면서 축성사를 관장하다가 그 해 좌의정이 되었다.
1450년(문종 즉위년) 사은사로 부사 김효성(金孝誠)과 함께 명나라에 파견되었다. 문종의 고명(誥命)을 받고 귀환했으며, 이듬 해 영의정부사(領議政府事)가 되었다. 1452년(단종 즉위년) 빈전(殯殿)·국장(國葬)·산릉도감(山陵都監)의 총호사(總護使)가 되어 문종의 국상을 총령하였다.
다음해에 영춘추관사(領春秋館事)로서 감춘추관사 김종서 등과 함께 『세종실록』을 찬진하였다. 1453년 계유정난으로 좌의정 김종서, 우의정 정분(鄭苯), 우찬성 이양(李穰), 이조판서 조극관(趙克寬) 등과 함께 어린 단종을 보필하던 중 피살되었다.
오랫동안 신원(伸寃: 억울하게 입은 죄를 풀어줌.)되지 못하다가, 1705년(숙종 31) 7월 한성부판윤 민진후(閔鎭厚)의 상소를 계기로 김종서와 함께 복관(復官)이 논의되었으나 실행되지는 못하였다.
그 뒤 1719년 후손이 전조(銓曹: 吏曹)에 서록(敍錄)됨으로써 부분적으로 신원되었다. 그러다가 1746년(영조 22) 복관되면서 완전히 신원되었다. 1758년에는 충정(忠定)의 시호를 받았다.
1791년(정조 15)장릉(莊陵: 端宗陵)충신단(忠臣壇)에 배식(配食)되었다. 그리고 1804년(순조 4) 집 앞에 정문이 세워졌으며, 1807년에는 조상의 묘를 옮기지 않는 부조지전(不祧之典)을 받았다. 영천의 임고서원(臨皐書院), 포항구룡포읍의 광남서원(廣南書院), 종성의 행영사(行營祠)에 제향되었다.
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두산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