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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암 이범직 釣菴 李範稷Lee BeomJik
1868 ~ 1896
조선
작가약력
- 1868(고종 5)∼1896(고종 33). 조선 말기의 의병.
작가 소개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보경(輔卿), 호는 조암(釣菴)·조은(釣隱). 충청북도 충주 출신이다. 광평대군 여(廣平大君璵)의 후손으로, 이항로(李恒老) 학파 인물로 의병을 일으키고, 순절한 육의사 가운데 한 사람이다.
빈한한 농가에서 태어났으며, 이항로의 고제(高弟)로 제천에서 강학을 하고 있던 유중교(柳重敎)의 문하에서 춘추대의적 존화양이론(春秋大義的尊華攘夷論)에 입각한 의리지학(義理之學)을 익혔다.
1894년(고종 31) 일본군의 경복궁침범사건이 일어나자, 강원도 관찰사 민형식(閔亨植)을 찾아가 의병을 일으킬 것을 종용하였으나 거절당하였다. 이듬해 을미사변이 일어나고 연이어 단발령이 내려지자, 다시 동문 안승우(安承禹)를 찾아가 함께 의병을 일으킬 것을 제시하고 계획을 세워나갔다.
그러던 중 1896년 1월 동문 이춘영(李春永)이 경기도 지평(砥平)에서 거의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안승우와 함께 그곳으로 가서 의병을 규합한 다음 제천으로 진격하여, 군수 김익진(金益珍)을 몰아내면서 의병항전을 개시하였다.
이들은 제천에서 이필희(李弼熙)를 의병대장으로 추대하고 전열을 가다듬은 뒤, 1896년 1월 28일 단양으로 진격하고, 공주병참 소속의 관·일(官·日) 혼성군과 전투를 벌여 서전을 장식하였다. 그러나 결국 구심력 부족으로 일본군의 연이은 공격에 와해되고 말았다.
이들은 다시 영월에서 회합, 유인석(柳麟錫)을 의병대장에 추대, 호좌의병진(湖左義兵陣)을 편성하여 본격적인 의병항전에 돌입하였다. 1896년 2월 16일 의진의 소모장(召募將)에 임명되어, 유인석의 명을 받아 부대를 거느리고 호서지방으로 파견되었다. 천안으로 이동하여, 당시 삭발을 심하게 강요하여 백성들의 원성을 크게 산 그곳 군수 김병숙(金炳肅)을 처단하는 등 큰 활약을 보였다.
또한, 의병해산의 임무를 띠고 중앙에서 파견된 선유사(宣諭使) 신기선(申箕善)을 일시 감금하는 등 성세가 두드러졌으나, 귀로에 구완희(具完喜)가 거느린 청주 관군의 매복기습을 받아 대패하고 말았다. 그리하여 잔여 의병을 거느리고 충주 가정진(柯亭津)으로 돌아와 전열을 재정비한 뒤 본진에 합류하였다.
한편, 호좌의병의 본진은 제천에서 패한 뒤 각지를 전전하던 중, 6월 초순 음성에 당도하였는데, 그 때 괴산과 음성에 각각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과 관군의 포위공격을 당하게 되었다. 이 때 총령(摠領) 정인설(鄭寅卨)과 함께 독전하여, 마침내 그들의 포위망을 뚫어 대진(大陣)을 안전하게 퇴각하게 하는 공을 세우기도 하였다.
이어 유인석의 본진이 서간도망명의 장도에 오르자 신지수(申芝秀)와 함께 그 전도(前導)가 되어 먼저 발정(發程)하였으나, 황해도·평안도 각지의 관찰사·군수들이 의진에 핍박을 가해와 머무를 곳이 없었다.
이에 북상을 계속한 끝에 강계에 당도하였으나, 여기에서도 관군의 공격을 받게 되어 부득이 압록강을 건너 서간도로 들어갔다. 그러나 그곳의 수장(守將) 왕무림(王茂林) 역시 의병들의 망명을 못마땅히 생각하여 심한 핍박을 가해왔다.
그곳의 정세가 이처럼 불안하자, 뒤이어 북상하던 유인석의 의병 본진을 안전하게 안내하기 위해 참모장 권기수(權夔洙) 등과 함께 한 부대를 거느리고 초산 경계로 마중을 나갔다.
그러나 이 때 곳곳에 군사를 매복시키고 의병의 동정을 정탐하던 강계관찰사 조승현(趙承顯)과 경무관(警務官) 김동근(金東根) 등에게 부하들과 함께 포로가 되었다. 조승현이 회유하기 위하여 갖은 술책을 다하였지만, 끝내 의리를 지켜 권기수 등 부하 20여 명과 함께 죽임을 당하였다.
1995년 건국훈장 독립장에 추서되었다.
빈한한 농가에서 태어났으며, 이항로의 고제(高弟)로 제천에서 강학을 하고 있던 유중교(柳重敎)의 문하에서 춘추대의적 존화양이론(春秋大義的尊華攘夷論)에 입각한 의리지학(義理之學)을 익혔다.
1894년(고종 31) 일본군의 경복궁침범사건이 일어나자, 강원도 관찰사 민형식(閔亨植)을 찾아가 의병을 일으킬 것을 종용하였으나 거절당하였다. 이듬해 을미사변이 일어나고 연이어 단발령이 내려지자, 다시 동문 안승우(安承禹)를 찾아가 함께 의병을 일으킬 것을 제시하고 계획을 세워나갔다.
그러던 중 1896년 1월 동문 이춘영(李春永)이 경기도 지평(砥平)에서 거의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안승우와 함께 그곳으로 가서 의병을 규합한 다음 제천으로 진격하여, 군수 김익진(金益珍)을 몰아내면서 의병항전을 개시하였다.
이들은 제천에서 이필희(李弼熙)를 의병대장으로 추대하고 전열을 가다듬은 뒤, 1896년 1월 28일 단양으로 진격하고, 공주병참 소속의 관·일(官·日) 혼성군과 전투를 벌여 서전을 장식하였다. 그러나 결국 구심력 부족으로 일본군의 연이은 공격에 와해되고 말았다.
이들은 다시 영월에서 회합, 유인석(柳麟錫)을 의병대장에 추대, 호좌의병진(湖左義兵陣)을 편성하여 본격적인 의병항전에 돌입하였다. 1896년 2월 16일 의진의 소모장(召募將)에 임명되어, 유인석의 명을 받아 부대를 거느리고 호서지방으로 파견되었다. 천안으로 이동하여, 당시 삭발을 심하게 강요하여 백성들의 원성을 크게 산 그곳 군수 김병숙(金炳肅)을 처단하는 등 큰 활약을 보였다.
또한, 의병해산의 임무를 띠고 중앙에서 파견된 선유사(宣諭使) 신기선(申箕善)을 일시 감금하는 등 성세가 두드러졌으나, 귀로에 구완희(具完喜)가 거느린 청주 관군의 매복기습을 받아 대패하고 말았다. 그리하여 잔여 의병을 거느리고 충주 가정진(柯亭津)으로 돌아와 전열을 재정비한 뒤 본진에 합류하였다.
한편, 호좌의병의 본진은 제천에서 패한 뒤 각지를 전전하던 중, 6월 초순 음성에 당도하였는데, 그 때 괴산과 음성에 각각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과 관군의 포위공격을 당하게 되었다. 이 때 총령(摠領) 정인설(鄭寅卨)과 함께 독전하여, 마침내 그들의 포위망을 뚫어 대진(大陣)을 안전하게 퇴각하게 하는 공을 세우기도 하였다.
이어 유인석의 본진이 서간도망명의 장도에 오르자 신지수(申芝秀)와 함께 그 전도(前導)가 되어 먼저 발정(發程)하였으나, 황해도·평안도 각지의 관찰사·군수들이 의진에 핍박을 가해와 머무를 곳이 없었다.
이에 북상을 계속한 끝에 강계에 당도하였으나, 여기에서도 관군의 공격을 받게 되어 부득이 압록강을 건너 서간도로 들어갔다. 그러나 그곳의 수장(守將) 왕무림(王茂林) 역시 의병들의 망명을 못마땅히 생각하여 심한 핍박을 가해왔다.
그곳의 정세가 이처럼 불안하자, 뒤이어 북상하던 유인석의 의병 본진을 안전하게 안내하기 위해 참모장 권기수(權夔洙) 등과 함께 한 부대를 거느리고 초산 경계로 마중을 나갔다.
그러나 이 때 곳곳에 군사를 매복시키고 의병의 동정을 정탐하던 강계관찰사 조승현(趙承顯)과 경무관(警務官) 김동근(金東根) 등에게 부하들과 함께 포로가 되었다. 조승현이 회유하기 위하여 갖은 술책을 다하였지만, 끝내 의리를 지켜 권기수 등 부하 20여 명과 함께 죽임을 당하였다.
1995년 건국훈장 독립장에 추서되었다.
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