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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재 이제현 益齋 李齊賢Yi JeHyeon
1287 ~ 1367
고려
작가약력
- 1287년(충렬왕 14)∼1367년(공민왕 16). 고려 후기의 문신·학자·문인.
작가 소개
본관은 경주(慶州). 초명은 지공(之公). 자는 중사(仲思), 호는 익재(益齋)·역옹(櫟翁). 고려 건국 초의 삼한공신(三韓功臣) 금서(金書)의 후예로 아버지는 검교시중(檢校侍中)진(瑱)이다. 아버지 진이 과거를 통해 크게 출세함으로써 비로소 가문의 이름이 높아졌다.
어려서부터 남달리 성숙했고 글을 짓는 데 있어서도 비범한 기운을 지니고 있었다. 1301년(충렬왕 27) 성균시(成均試: 일명 국자감시로 진사를 뽑던 시험)에 1등으로 합격하고 이어서 과거에 합격하였다. 이해에 당시 대학자이자 권세가였던 권보(權溥)의 딸을 아내로 맞아들였다. 1303년 권무봉선고판관(權務奉先庫判官)과 연경궁녹사(延慶宮錄事)를 거쳐 1308년 예문춘추관에 선발되고 다음해에 사헌규정(司憲糾正)에 발탁됨으로써 본격적인 관리생활을 시작하였다.
1311년(충선왕 3)에는 전교시승(典校寺丞)과 삼사판관(三司判官)에 나아가고, 다음해에 서해도안렴사(西海道按廉使)에 선발되었다. 1314년(충숙왕 1) 상왕(上王)인 충선왕(忠宣王)의 부름을 받아 원나라의 수도 연경(燕京)으로 가서 만권당(萬卷堂)에 머물게 됨으로써 그의 원나라 생활이 시작되었다.
충선왕은 왕위에서 물러난 다음에도 원나라에 있으면서 만권당을 짓고 서사(書史)를 즐겼다. 이때 원나라의 유명한 학자·문인들을 드나들게 했는데, 그들과 상대할 고려측의 인물로서 이제현을 지명했던 것이다. 이로부터 그는 만권당에 출입한 요수(姚燧)·염복(閻復)·원명선(元明善)·조맹부(趙孟頫) 등 한족(漢族) 출신 문인들과 접촉을 자주 갖고 학문과 식견을 넓힐 수 있었다.
그의 원나라 생활과 관련해 특기할 것은 세 번에 걸쳐 중국 내륙까지 먼 여행을 했다는 사실이다. 1316년에는 충선왕을 대신해 서촉(西蜀)의 명산 아미산(峨眉山)에 치제(致祭)하기 위해 3개월 동안 그곳을 다녀왔다. 1319년에는 충선왕이 절강(浙江)의 보타사(寶陀寺)로 강향(降香)하기 위해 행차할 때 시종하였다. 마지막으로 1323년(충숙왕 10) 유배된 충선왕을 만나 위로하기 위해 감숙성(甘肅省)의 타사마(朶思麻)에 다녀왔다. 이 세 번에 걸친 여행은 그의 견문을 넓히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1320년(충숙왕 7)은 그의 생애에 있어 또 하나의 분기점이었다. 주로 만권당에 머물며 활동하는 동안에도 때때로 고려에 와서 관리로 복무해, 성균좨주(成均祭酒)·판전교시사(判典校寺事)·선부전서(選部典書)를 역임하였다. 이해에는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가 되면서 단성익찬공신(端誠翊贊功臣)의 호를 받았고 지공거(知貢擧)가 되어 과거를 주재하였다. 그런데 겨울에 충선왕이 참소를 받아 유배됨으로써 자연히 그의 원나라 생활도 6년 만에 끝나게 되었다.
충선왕의 유배로 인한 정세변화는 고려의 정치상황과도 밀접한 관련을 맺었다. 고려의 국가적 독립성을 말살시키고 원나라의 내지와 같은 성(省)을 세우도록 주장하는 입성책동(立省策動)이 강력하게 일어났다. 충숙왕을 내몰고 왕위를 차지하려는 심왕 고(瀋王暠)와 그 일파의 준동도 격화되었다.
그는 1321년 아버지의 상을 치른 다음 1323년 원에 들어가 입성반대상소를 올렸는데, 그 내용이 그대로 전해지고 있다. 이어서 토번(吐蕃)으로 유배되어 있는 충선왕의 방환운동도 벌였다. 오래지 않아 입성책동이 저지되고 충선왕이 타사마로 옮겨진 데에는 그가 벌인 활동의 영향이 적지 않았을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1324년 밀직사를 거쳐 1325년 첨의평리(僉議評理)·정당문학(政堂文學)에 전임됨으로써 재상의 지위에 올랐다.
그 뒤 충숙왕(忠肅王)과 충혜왕(忠惠王) 부자가 중조(重祚: 왕이 거듭하여 즉위하는 현상)하는 어지러운 때를 당했을 때는 그의 활동이 크게 드러나지 않았다. 1339년 조적(曺頔)의 난이 일어난 끝에 충혜왕이 원나라에 붙잡혀가자 그를 좇아 원나라에 가서 사태를 수습하고 왕이 복위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그로부터 수년간 조적의 여당(餘黨)에 눌려 두문불출했는데, 이 기간 동안에 『역옹패설(櫟翁稗說)』을 저술하였다.
그가 다시 정치의 표면에 나타나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은 1344년 충목왕(忠穆王)이 즉위한 직후 판삼사사(判三司事)에 임명되면서부터이다. 이때 문란해진 정치기강을 바로잡고 새로운 시책을 펴는 데 참여해 여러 항목에 걸친 개혁안을 제시하였다. 1348년 충목왕이 죽자 원에 가서 왕기(王祺: 훗날의 공민왕)를 왕에 추대하기 위한 운동을 벌였으나 실패하였다.
1351년 공민왕이 즉위해 새로운 개혁정치를 추진하려 할 때 정승에 임명되어 국정을 총괄하였다. 이때부터 네 번에 걸쳐 수상이 되는 기록을 세웠다. 1353년 계림부원군(鷄林府院君)으로서 두 번째로 지공거가 되어 이색(李穡) 등 35인을 등과자(登科者)로 선발하였다.
1356년(공민왕 5)기철(奇轍) 등을 죽이는 반원운동이 일어나자, 문하시중(門下侍中)이 되어 사태의 수습에 나섰다가 다음해에 치사(致仕)하였다. 그 뒤에도 국가의 중대사에 대해서는 자문에 응했으며, 홍건적이 침입해 개경이 함락되었을 때에도 남쪽으로 달려가 상주에서 왕을 배알하고 호종(扈從)하였다.
빼어난 유학지식과 문학적 소양을 바탕으로 사학(史學)에도 많은 업적을 남겼다. 민지(閔漬)의 『본조편년강목(本朝編年綱目)』을 중수(重修)하는 일을 맡았고, 충렬왕·충선왕·충숙왕의 실록을 편찬하는 일에도 참여하였다. 특히 만년에 『국사(國史)』를 편찬했는데, 기년전지(紀年傳志)의 기전체를 계획해 백문보(白文寶)·이달충(李達衷)과 함께 일을 진행시켰으나 완성시키지는 못하였다. 그의 저술로 현존하는 것은 『익재난고(益齋亂藁)』 10권과 『역옹패설』 2권이다. 흔히 이것을 합해 『익재집(益齋集)』이라 한다.
정치가로서의 그는 당시 고려가 원의 부마국(駙馬國)이라는 현실을 시인하고, 그 테두리 안에서 국가의 존립과 사회모순의 시정을 위해 노력하였다. 그러나 급격한 변화를 달가워하지 않았고 온건한 태도로 현실에 임하였다. 원과 고려를 넘나들며 복잡하고 미묘한 상황에 처하기도 했지만 화를 당하거나 유배된 적은 없었다.
문학부문에서도 큰 업적을 이루었는데 시는 전아하고 웅혼하다는 평을 받았고 많은 영사시(詠史詩: 역사적 사실이나 인물을 제재로 한 시)를 저술했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사(詞)의 장르에서도 독보적 존재로 일컬어지고 있다. 고려의 한문학을 세련되면서도 한 단계 높게 끌어올렸다는 점에서 한국문학사의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이제현은 뛰어난 유학자로 성리학의 수용·발전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우선 그는 고려에 성리학을 처음 들여온 백이정(白頤正)의 제자였고 『사서집주(四書集註)』를 간행해 성리학의 보급에 크게 노력한 권보의 문생이요 사위였다. 이색이 그의 묘지명에서 “도덕의 으뜸이요, 문학의 종장이다(道德之首 文章之宗).”라고 말한 바와 같이 후세에 커다란 추앙을 받았다. 또한 그의 제자가 이곡(李穀)·이색의 부자였다는 학통(學統)으로 볼 때도 성리학에 있어 그의 위치는 지대한 것이었다.
그가 만권당에서 교유한 중국의 문인·학자들이 성리학에 깊은 조예를 가진 사람들이었다는 점을 상기해 본다면 이제현은 중국의 성리학을 직접 접하면서 동시에 그것에 대한 이해를 깊게 할 수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충목왕 때 개혁안을 제시하면서 격물치지(格物致知)와 성의정심(誠意正心)의 도를 강조한 것은 성리학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한 것이었다. 그러나 성리학에만 경도되지는 않았고, 그 때문에 뒷날 성리학을 좋아하지 않았다는 비판을 받기도 하였다.
경주의 구강서원(龜岡書院)과 금천(金川)의 도산서원(道山書院)에 제향(祭享)되었다. 1376년 공민왕 묘정에 배향되었으며,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어려서부터 남달리 성숙했고 글을 짓는 데 있어서도 비범한 기운을 지니고 있었다. 1301년(충렬왕 27) 성균시(成均試: 일명 국자감시로 진사를 뽑던 시험)에 1등으로 합격하고 이어서 과거에 합격하였다. 이해에 당시 대학자이자 권세가였던 권보(權溥)의 딸을 아내로 맞아들였다. 1303년 권무봉선고판관(權務奉先庫判官)과 연경궁녹사(延慶宮錄事)를 거쳐 1308년 예문춘추관에 선발되고 다음해에 사헌규정(司憲糾正)에 발탁됨으로써 본격적인 관리생활을 시작하였다.
1311년(충선왕 3)에는 전교시승(典校寺丞)과 삼사판관(三司判官)에 나아가고, 다음해에 서해도안렴사(西海道按廉使)에 선발되었다. 1314년(충숙왕 1) 상왕(上王)인 충선왕(忠宣王)의 부름을 받아 원나라의 수도 연경(燕京)으로 가서 만권당(萬卷堂)에 머물게 됨으로써 그의 원나라 생활이 시작되었다.
충선왕은 왕위에서 물러난 다음에도 원나라에 있으면서 만권당을 짓고 서사(書史)를 즐겼다. 이때 원나라의 유명한 학자·문인들을 드나들게 했는데, 그들과 상대할 고려측의 인물로서 이제현을 지명했던 것이다. 이로부터 그는 만권당에 출입한 요수(姚燧)·염복(閻復)·원명선(元明善)·조맹부(趙孟頫) 등 한족(漢族) 출신 문인들과 접촉을 자주 갖고 학문과 식견을 넓힐 수 있었다.
그의 원나라 생활과 관련해 특기할 것은 세 번에 걸쳐 중국 내륙까지 먼 여행을 했다는 사실이다. 1316년에는 충선왕을 대신해 서촉(西蜀)의 명산 아미산(峨眉山)에 치제(致祭)하기 위해 3개월 동안 그곳을 다녀왔다. 1319년에는 충선왕이 절강(浙江)의 보타사(寶陀寺)로 강향(降香)하기 위해 행차할 때 시종하였다. 마지막으로 1323년(충숙왕 10) 유배된 충선왕을 만나 위로하기 위해 감숙성(甘肅省)의 타사마(朶思麻)에 다녀왔다. 이 세 번에 걸친 여행은 그의 견문을 넓히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1320년(충숙왕 7)은 그의 생애에 있어 또 하나의 분기점이었다. 주로 만권당에 머물며 활동하는 동안에도 때때로 고려에 와서 관리로 복무해, 성균좨주(成均祭酒)·판전교시사(判典校寺事)·선부전서(選部典書)를 역임하였다. 이해에는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가 되면서 단성익찬공신(端誠翊贊功臣)의 호를 받았고 지공거(知貢擧)가 되어 과거를 주재하였다. 그런데 겨울에 충선왕이 참소를 받아 유배됨으로써 자연히 그의 원나라 생활도 6년 만에 끝나게 되었다.
충선왕의 유배로 인한 정세변화는 고려의 정치상황과도 밀접한 관련을 맺었다. 고려의 국가적 독립성을 말살시키고 원나라의 내지와 같은 성(省)을 세우도록 주장하는 입성책동(立省策動)이 강력하게 일어났다. 충숙왕을 내몰고 왕위를 차지하려는 심왕 고(瀋王暠)와 그 일파의 준동도 격화되었다.
그는 1321년 아버지의 상을 치른 다음 1323년 원에 들어가 입성반대상소를 올렸는데, 그 내용이 그대로 전해지고 있다. 이어서 토번(吐蕃)으로 유배되어 있는 충선왕의 방환운동도 벌였다. 오래지 않아 입성책동이 저지되고 충선왕이 타사마로 옮겨진 데에는 그가 벌인 활동의 영향이 적지 않았을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1324년 밀직사를 거쳐 1325년 첨의평리(僉議評理)·정당문학(政堂文學)에 전임됨으로써 재상의 지위에 올랐다.
그 뒤 충숙왕(忠肅王)과 충혜왕(忠惠王) 부자가 중조(重祚: 왕이 거듭하여 즉위하는 현상)하는 어지러운 때를 당했을 때는 그의 활동이 크게 드러나지 않았다. 1339년 조적(曺頔)의 난이 일어난 끝에 충혜왕이 원나라에 붙잡혀가자 그를 좇아 원나라에 가서 사태를 수습하고 왕이 복위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그로부터 수년간 조적의 여당(餘黨)에 눌려 두문불출했는데, 이 기간 동안에 『역옹패설(櫟翁稗說)』을 저술하였다.
그가 다시 정치의 표면에 나타나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은 1344년 충목왕(忠穆王)이 즉위한 직후 판삼사사(判三司事)에 임명되면서부터이다. 이때 문란해진 정치기강을 바로잡고 새로운 시책을 펴는 데 참여해 여러 항목에 걸친 개혁안을 제시하였다. 1348년 충목왕이 죽자 원에 가서 왕기(王祺: 훗날의 공민왕)를 왕에 추대하기 위한 운동을 벌였으나 실패하였다.
1351년 공민왕이 즉위해 새로운 개혁정치를 추진하려 할 때 정승에 임명되어 국정을 총괄하였다. 이때부터 네 번에 걸쳐 수상이 되는 기록을 세웠다. 1353년 계림부원군(鷄林府院君)으로서 두 번째로 지공거가 되어 이색(李穡) 등 35인을 등과자(登科者)로 선발하였다.
1356년(공민왕 5)기철(奇轍) 등을 죽이는 반원운동이 일어나자, 문하시중(門下侍中)이 되어 사태의 수습에 나섰다가 다음해에 치사(致仕)하였다. 그 뒤에도 국가의 중대사에 대해서는 자문에 응했으며, 홍건적이 침입해 개경이 함락되었을 때에도 남쪽으로 달려가 상주에서 왕을 배알하고 호종(扈從)하였다.
빼어난 유학지식과 문학적 소양을 바탕으로 사학(史學)에도 많은 업적을 남겼다. 민지(閔漬)의 『본조편년강목(本朝編年綱目)』을 중수(重修)하는 일을 맡았고, 충렬왕·충선왕·충숙왕의 실록을 편찬하는 일에도 참여하였다. 특히 만년에 『국사(國史)』를 편찬했는데, 기년전지(紀年傳志)의 기전체를 계획해 백문보(白文寶)·이달충(李達衷)과 함께 일을 진행시켰으나 완성시키지는 못하였다. 그의 저술로 현존하는 것은 『익재난고(益齋亂藁)』 10권과 『역옹패설』 2권이다. 흔히 이것을 합해 『익재집(益齋集)』이라 한다.
정치가로서의 그는 당시 고려가 원의 부마국(駙馬國)이라는 현실을 시인하고, 그 테두리 안에서 국가의 존립과 사회모순의 시정을 위해 노력하였다. 그러나 급격한 변화를 달가워하지 않았고 온건한 태도로 현실에 임하였다. 원과 고려를 넘나들며 복잡하고 미묘한 상황에 처하기도 했지만 화를 당하거나 유배된 적은 없었다.
문학부문에서도 큰 업적을 이루었는데 시는 전아하고 웅혼하다는 평을 받았고 많은 영사시(詠史詩: 역사적 사실이나 인물을 제재로 한 시)를 저술했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사(詞)의 장르에서도 독보적 존재로 일컬어지고 있다. 고려의 한문학을 세련되면서도 한 단계 높게 끌어올렸다는 점에서 한국문학사의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이제현은 뛰어난 유학자로 성리학의 수용·발전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우선 그는 고려에 성리학을 처음 들여온 백이정(白頤正)의 제자였고 『사서집주(四書集註)』를 간행해 성리학의 보급에 크게 노력한 권보의 문생이요 사위였다. 이색이 그의 묘지명에서 “도덕의 으뜸이요, 문학의 종장이다(道德之首 文章之宗).”라고 말한 바와 같이 후세에 커다란 추앙을 받았다. 또한 그의 제자가 이곡(李穀)·이색의 부자였다는 학통(學統)으로 볼 때도 성리학에 있어 그의 위치는 지대한 것이었다.
그가 만권당에서 교유한 중국의 문인·학자들이 성리학에 깊은 조예를 가진 사람들이었다는 점을 상기해 본다면 이제현은 중국의 성리학을 직접 접하면서 동시에 그것에 대한 이해를 깊게 할 수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충목왕 때 개혁안을 제시하면서 격물치지(格物致知)와 성의정심(誠意正心)의 도를 강조한 것은 성리학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한 것이었다. 그러나 성리학에만 경도되지는 않았고, 그 때문에 뒷날 성리학을 좋아하지 않았다는 비판을 받기도 하였다.
경주의 구강서원(龜岡書院)과 금천(金川)의 도산서원(道山書院)에 제향(祭享)되었다. 1376년 공민왕 묘정에 배향되었으며,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