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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라 이순석 賀羅 李順石Lee SunSeok
1905 ~ 1986
한국
석공예
작가약력
- 학력
- 1931년 일본 우에노미술학교 공안과 졸업
- 기관 경력
- 화신백화점 광고선전 과장
- 1946년 미군정 문교부 고문관
- 1946년-1969년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교수
- 1950년 국방부정훈국 기획전문위원, 종군화가단 단장
- 1953년-1975년 대한민국 미술전람회 추천작가, 초대작가, 심사위원, 운영위원
- 1965년 한국 디자인센터 소장
- 1966년-1970년 제1-4회 대한민국 상공미전 심사위원장
- 1969년 한국 디자인 포장센터 이사장
- 1969년 국립현대미술관 운영위원
- 1970년 한국 수출 디자인센터 이사장
- 1970년-1979년 재단법인 한국 디자인 포장센터 상임고문
- 1970년 서울대학교 명예교수
- 1971년-1981년 서울 가톨릭 미술가 협회장
- 1974년 예술원 회원
- 1981년-1986년 예술원 원로회원
- 서울시 문화위원
- 한국미술협회 부이사장
- 세계공예회의 총회위원
- 현대미술관 운영위원
- 하라석 공예연구원 운영
- 전시
- 1931년, 개인전, 동앙일보사 강당
- 1947년, 개인전, 동화백화점 화랑
- 1949년, 개인전, 동아 화랑
- 1965년, 개인전, 신문회관 화랑
- 1969년, 국제 공예전, 슈투트가르트
- 1970년, 개인전, 한국 수출 디자인 센터
- 1971년, 개인전, 신세계 화랑
- 1973년, 개인전, 태능 푸른동산
- 1976년, 개인전, 동경
- 1979년, 개인전, 통인 화랑
- 1982년-1985년, `82, `85 현대미술 초대전, 국립현대미술관
- 1985년, 현대미술 40년전, 국립현대미술관
- 1986년, 한국 현대미술 어제와 오늘전, 국립현대미술관
- 1999년, 근대를 보는 눈: 공예, 국립현대미술관
- 수상
- 1955년, 서울시문화상 공예부문
- 1962년, 문화훈장 대통령장
- 1962년, 최고회의 의장 표창장
- 1969년, 대한민국문화예술상
- 1975년, 대한민국 예술원상
작가 소개
본관은 광주(廣州). 호는 하라(賀羅). 충청남도 아산 출생. 1925년 일본에 가서 1926년 동경미술학교 도안과에 입학하였다. 그가 도안과에 입학하게 된 것은 일본인 니와(丹羽) 화백의 권고와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의 영향 때문이었다. 야나기 무네요시의 민예사상과 일본에서 전시되었던 한국의 전통적인 공예품들을 보고 감명을 받았고 그 전통을 계승하기 위해서 도안과를 선택하였다. 1931년 동경미술학교 도안과를 졸업하고 귀국하여 가진 도안개인전은 한국 최초의 디자인전이다.
화신백화점 광고선전과장으로 근무하다가 개인작업실을 차리고 공예를 연구하여 각종 재료의 공예작품을 시도하였고, 광복 후부터는 본격적인 석공예 창작에 전념하였다.
1946년 미군정 문교부 문화국 예술과 고문으로 서울대학교 미술학부 창설의 산파역을 담당하여 신설된 도안과 주임교수를 맡았으며 정년퇴임(1970) 때까지 후진 양성에 힘썼다.
1953년∼1975년(제2∼24회) 대한민국미술전람회 추천작가·초대작가·심사위원(14차례)·운영위원을 역임하며 국전 공예부를 주도하였고, 6·25 동란 때는 국방부정훈국 기획전문위원·종군화가단 단장을 역임하였다.
1966년에 한국산업디자인진흥원과 대한민국상공미술전람회를 탄생시켜 디자인센터의 소장·이사장·상임고문과 상공미전 심사위원(9차례)을 역임하면서 현 한국디자인포장센터와 대한민국산업디자인전의 기틀을 다져놓았다.
그 밖에 서울시문화위원·한국미술협회부이사장·세계공예회의총회위원·현대미술관운영위원·서울가톨릭미술협회 회장·예술원회원 등으로 활약하였다.
주로 국전·상공미전·가톨릭미술협회전을 통하여 작품활동을 하였으며, 7차례 개인전(제2회까지 도안전, 제7회는 일본동경전)을 가진 바 있다.
중요초대전(전국공예가초대전·한국현대공예대전·1982년∼1985현대미술초대전·1986현대한국미술상황전 등)에도 빠짐없이 출품하였고, 1984년부터 한국공예가회(현 사단법인 한국공예가협회의 전신)전에 고문으로 출품하였다.
이순석의 동경미술학교 졸업작품들에는 1920년대 후반 일본 공예계에 유행했던 다양한 양식, 즉 아르누보, 세세션, 바우하우스 등 양식이 혼합되어 있다. 책 표지를 도안한 그의 작품들에는 장식적이고 선적인 요소가 강하게 나타나고 있다. 그는 사물의 형태를 단순하고 간결하게 생략된 형태로 처리하고 있는데 이는 좀 더 기하학적으로 간결해진 세세션의 영향을 받았음을 보여주고 있다.
모티브 면에서도 서구의 장식사조와 마찬가지로 동식물을 위주로 한 자연물을 많이 다루고 있다. 「우정」, 「인생학」, 「카톨릭」,「스콜라철학자」, 「촌락」 등의 작품에서 양식화된 선과 전형적인 좌우대칭을 주로 사용하고 있다.
바우하우스의 구성주의의 영향을 보여주는 작품은 「무제」와 「노동」으로 표면 전체를 원과 직선을 사용하여 면 분할을 시도하고 있다. 색채 면에서도 검정과 회색의 무채색과 아울러 빨강, 초록, 노랑 등의 원색을 사용하여 이전의 작품과는 다른 이미지를 보여주고 있다. 또 추상적 기법을 보이는 「내 동경에 있는 동안」은 노랑, 빨강, 초록 등의 원색을 밑에 자유롭게 칠한 위에 뿌리기 기법을 사용하여 전체적으로 번지고 몽롱한 느낌을 주고 있다.
귀국한 이후에 그의 작품은 양식이나 형식면에서는 단순화하거나 양식화하는 장식적인 일본적인 도안 요소와 서양의 반추상적인 느낌을 주고 있으나 주제나 모티브는 전통적인 것을 주로 사용하였다. 교육에 있어서도 전통 공예품의 우수성을 역설하고 전통미를 살리는데 역점을 두었다.
그의 석공예작품은 민화의 모티브나 전통적인 공예품에 주로 나타난 자연물의 형상을 주로 다뤘다. 그의 작품은 기러기나 오리 등의 새나 곰, 소 등의 동물형상과 총석정 등의 자연의 모습을 담고 있는데 전통적인 부드러운 곡선을 이용하여 단순한 형태로 만들어져 있다. 수석 등의 취미활동에 영향을 받아 돌이 가지고 있는 자연적인 형상과 재질, 색 등 재료가 갖고 있는 성질을 충분히 살려 작업하고자 했으며 이러한 가운데 우러나오는 소박하고 무작위의 자연스러운 민예의 미를 살리고자 노력하였다.
이밖에도 기념비적 석조작품(유관순·화랑·해태상 등)과 또 독실한 가톨릭신자(세례명 바오로)로서 많은 종교미술품을 남겼는데, 「명상의 길」·「십자가의 길」 등 (1975∼1977년작, 부산 성분도수녀원 소장)의 부조작품은 대표적인 것이다. 만년에는 근 10년 동안 병고에 시달리면서도 하라석공예연구원을 운영하였다.
서울시문화상·최고회의의장표창·문화훈장 대통령장·문화예술대상본상(대통령상)·예술원상·국전초대작가상을 받았다.
화신백화점 광고선전과장으로 근무하다가 개인작업실을 차리고 공예를 연구하여 각종 재료의 공예작품을 시도하였고, 광복 후부터는 본격적인 석공예 창작에 전념하였다.
1946년 미군정 문교부 문화국 예술과 고문으로 서울대학교 미술학부 창설의 산파역을 담당하여 신설된 도안과 주임교수를 맡았으며 정년퇴임(1970) 때까지 후진 양성에 힘썼다.
1953년∼1975년(제2∼24회) 대한민국미술전람회 추천작가·초대작가·심사위원(14차례)·운영위원을 역임하며 국전 공예부를 주도하였고, 6·25 동란 때는 국방부정훈국 기획전문위원·종군화가단 단장을 역임하였다.
1966년에 한국산업디자인진흥원과 대한민국상공미술전람회를 탄생시켜 디자인센터의 소장·이사장·상임고문과 상공미전 심사위원(9차례)을 역임하면서 현 한국디자인포장센터와 대한민국산업디자인전의 기틀을 다져놓았다.
그 밖에 서울시문화위원·한국미술협회부이사장·세계공예회의총회위원·현대미술관운영위원·서울가톨릭미술협회 회장·예술원회원 등으로 활약하였다.
주로 국전·상공미전·가톨릭미술협회전을 통하여 작품활동을 하였으며, 7차례 개인전(제2회까지 도안전, 제7회는 일본동경전)을 가진 바 있다.
중요초대전(전국공예가초대전·한국현대공예대전·1982년∼1985현대미술초대전·1986현대한국미술상황전 등)에도 빠짐없이 출품하였고, 1984년부터 한국공예가회(현 사단법인 한국공예가협회의 전신)전에 고문으로 출품하였다.
이순석의 동경미술학교 졸업작품들에는 1920년대 후반 일본 공예계에 유행했던 다양한 양식, 즉 아르누보, 세세션, 바우하우스 등 양식이 혼합되어 있다. 책 표지를 도안한 그의 작품들에는 장식적이고 선적인 요소가 강하게 나타나고 있다. 그는 사물의 형태를 단순하고 간결하게 생략된 형태로 처리하고 있는데 이는 좀 더 기하학적으로 간결해진 세세션의 영향을 받았음을 보여주고 있다.
모티브 면에서도 서구의 장식사조와 마찬가지로 동식물을 위주로 한 자연물을 많이 다루고 있다. 「우정」, 「인생학」, 「카톨릭」,「스콜라철학자」, 「촌락」 등의 작품에서 양식화된 선과 전형적인 좌우대칭을 주로 사용하고 있다.
바우하우스의 구성주의의 영향을 보여주는 작품은 「무제」와 「노동」으로 표면 전체를 원과 직선을 사용하여 면 분할을 시도하고 있다. 색채 면에서도 검정과 회색의 무채색과 아울러 빨강, 초록, 노랑 등의 원색을 사용하여 이전의 작품과는 다른 이미지를 보여주고 있다. 또 추상적 기법을 보이는 「내 동경에 있는 동안」은 노랑, 빨강, 초록 등의 원색을 밑에 자유롭게 칠한 위에 뿌리기 기법을 사용하여 전체적으로 번지고 몽롱한 느낌을 주고 있다.
귀국한 이후에 그의 작품은 양식이나 형식면에서는 단순화하거나 양식화하는 장식적인 일본적인 도안 요소와 서양의 반추상적인 느낌을 주고 있으나 주제나 모티브는 전통적인 것을 주로 사용하였다. 교육에 있어서도 전통 공예품의 우수성을 역설하고 전통미를 살리는데 역점을 두었다.
그의 석공예작품은 민화의 모티브나 전통적인 공예품에 주로 나타난 자연물의 형상을 주로 다뤘다. 그의 작품은 기러기나 오리 등의 새나 곰, 소 등의 동물형상과 총석정 등의 자연의 모습을 담고 있는데 전통적인 부드러운 곡선을 이용하여 단순한 형태로 만들어져 있다. 수석 등의 취미활동에 영향을 받아 돌이 가지고 있는 자연적인 형상과 재질, 색 등 재료가 갖고 있는 성질을 충분히 살려 작업하고자 했으며 이러한 가운데 우러나오는 소박하고 무작위의 자연스러운 민예의 미를 살리고자 노력하였다.
이밖에도 기념비적 석조작품(유관순·화랑·해태상 등)과 또 독실한 가톨릭신자(세례명 바오로)로서 많은 종교미술품을 남겼는데, 「명상의 길」·「십자가의 길」 등 (1975∼1977년작, 부산 성분도수녀원 소장)의 부조작품은 대표적인 것이다. 만년에는 근 10년 동안 병고에 시달리면서도 하라석공예연구원을 운영하였다.
서울시문화상·최고회의의장표창·문화훈장 대통령장·문화예술대상본상(대통령상)·예술원상·국전초대작가상을 받았다.
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월간미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