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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봉 학눌 스님 曉峰 學訥HakNul Buddhist Monk
1888 ~ 1966
한국
작가약력
- 1888년(고종 25)∼1966년. 승려.
작가 소개
본관은 수안(遂安). 속명은 이찬형(李燦亨). 법호는 효봉(曉峰)·원명(元明). 법명은 학눌(學訥). 평안남도 양덕 출신. 아버지는 병억(炳億)이며, 어머니는 김씨(金氏)이다. 가야총림 초대 방장 및 통합종단 초대 종정을 지냈으며, 정화불사운동에 중추적 역할을 하였다.
1901년평안감사가 베푼 백일장에서 장원 급제하였다. 그 뒤, 평양고등보통학교를 거쳐 1913년일본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 법학부를 졸업하고, 10년 동안 서울과 함흥의 지방법원, 평양의 복심법원에서 우리나라 사람으로는 최초의 판사가 되어 활동하였다.
1923년 직책상 내린 사형 선고로 괴로워하다가, 엿장수로 3년 동안 전국을 돌며 참회와 고행을 한다. 1925년신계사(神溪寺) 보운암(普雲庵)의 석두화상(石頭和尙)에게서 38세로 출가하고 전국을 순례하며 정진한다.
1927년 금강산으로 돌아와서 참선하였는데, 한번 앉으면 절구통처럼 움직이지 않아 ‘절구통수좌’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1930년 법기암(法起庵) 뒤에 단칸방을 짓고 용맹정진하다가, 1931년 도를 깨닫고 석두화상의 인가를 받는다.
1932년 사월초파일에 유점사에서 동선(東宣)을 계사(戒師)로 구족계와 보살계를 받고, 1933년 여여원(如如院)과 마하연(摩訶衍) 선원에서 수행하였다. 이어서 전국의 적멸보궁을 찾아 한 철씩 정진하다가, 1936년 한암(漢巖)과 만공(滿空)으로부터 도를 인가받았다.
1937년 조계산송광사 삼일암(三日庵)에서 10년 동안 후학들을 지도하였으며, 이때 대종사(大宗師)의 법계(法階)를 받았다. 1946년가야산 해인사의 초대 방장(方丈)으로 추대되어, 한국전쟁으로 총림이 흩어질 때까지 5년 동안 많은 인재를 길러내었다.
1950년 부산 동래의 금정선원(金井禪院)으로 옮겼고, 1951년부터 1954년까지 통영 용화사 도솔암(兜率庵)에 머물렀다. 1954년 통영 미륵산 너머에 미래사(彌來寺)를 창건하여 머무르던 중, 8월 17일에 불교계의 정화불사운동(淨化佛事運動)이 일어났으므로 서울선학원(禪學院)에 머무르며 이를 지도하다가, 1955년 다시 미래사로 왔다.
1956년동산(東山)·청담(靑潭) 등과 함께 네팔에서 열린 제4차 세계불교도대회에 다녀온 직후, 조계종의 의결기구인 종회(宗會)의 의장에 취임하였고, 1957년 종무원장에 이어, 1958년 조계종 종정에, 1962년 통합종단 초대 종정에 추대되었다. 그 뒤 통영 미래사에 머물렀으나 건강이 나빠지자 치료차 다시 동화사로 옮겨 수행승들을 지도하였다.
1966년 5월, 거처를 밀양 표충사(表忠寺) 서래각(西來閣)으로 옮겨 머무르다가 10월 15일 오전에 단정히 앉아 입적하였다.
영결식은 10월 21일서울 조계사에서 조계종단장으로 치러졌으며, 사리와 정골은 송광사, 표충사, 용화사, 미래사 등지에 나누어 봉안하였다.
1901년평안감사가 베푼 백일장에서 장원 급제하였다. 그 뒤, 평양고등보통학교를 거쳐 1913년일본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 법학부를 졸업하고, 10년 동안 서울과 함흥의 지방법원, 평양의 복심법원에서 우리나라 사람으로는 최초의 판사가 되어 활동하였다.
1923년 직책상 내린 사형 선고로 괴로워하다가, 엿장수로 3년 동안 전국을 돌며 참회와 고행을 한다. 1925년신계사(神溪寺) 보운암(普雲庵)의 석두화상(石頭和尙)에게서 38세로 출가하고 전국을 순례하며 정진한다.
1927년 금강산으로 돌아와서 참선하였는데, 한번 앉으면 절구통처럼 움직이지 않아 ‘절구통수좌’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1930년 법기암(法起庵) 뒤에 단칸방을 짓고 용맹정진하다가, 1931년 도를 깨닫고 석두화상의 인가를 받는다.
1932년 사월초파일에 유점사에서 동선(東宣)을 계사(戒師)로 구족계와 보살계를 받고, 1933년 여여원(如如院)과 마하연(摩訶衍) 선원에서 수행하였다. 이어서 전국의 적멸보궁을 찾아 한 철씩 정진하다가, 1936년 한암(漢巖)과 만공(滿空)으로부터 도를 인가받았다.
1937년 조계산송광사 삼일암(三日庵)에서 10년 동안 후학들을 지도하였으며, 이때 대종사(大宗師)의 법계(法階)를 받았다. 1946년가야산 해인사의 초대 방장(方丈)으로 추대되어, 한국전쟁으로 총림이 흩어질 때까지 5년 동안 많은 인재를 길러내었다.
1950년 부산 동래의 금정선원(金井禪院)으로 옮겼고, 1951년부터 1954년까지 통영 용화사 도솔암(兜率庵)에 머물렀다. 1954년 통영 미륵산 너머에 미래사(彌來寺)를 창건하여 머무르던 중, 8월 17일에 불교계의 정화불사운동(淨化佛事運動)이 일어났으므로 서울선학원(禪學院)에 머무르며 이를 지도하다가, 1955년 다시 미래사로 왔다.
1956년동산(東山)·청담(靑潭) 등과 함께 네팔에서 열린 제4차 세계불교도대회에 다녀온 직후, 조계종의 의결기구인 종회(宗會)의 의장에 취임하였고, 1957년 종무원장에 이어, 1958년 조계종 종정에, 1962년 통합종단 초대 종정에 추대되었다. 그 뒤 통영 미래사에 머물렀으나 건강이 나빠지자 치료차 다시 동화사로 옮겨 수행승들을 지도하였다.
1966년 5월, 거처를 밀양 표충사(表忠寺) 서래각(西來閣)으로 옮겨 머무르다가 10월 15일 오전에 단정히 앉아 입적하였다.
영결식은 10월 21일서울 조계사에서 조계종단장으로 치러졌으며, 사리와 정골은 송광사, 표충사, 용화사, 미래사 등지에 나누어 봉안하였다.
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