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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동 환경 스님 曉東 幻鏡HwanGyeong Buddhist Monk
1887 ~ 1983
한국
작가약력
- 1887(고종 24)∼1983. 승려·독립운동가.
작가 소개
1887년(정해년) 9월12일 경남 합천군 가야면 마장동에서 출생했다. 속명은 임재상(林在相). 본관은 나주(羅州). 1894년 송재(松齋) 이동광(李東光) 선생 문하에서 사서(四書)를 배웠다.
1899년 13세에 합천 해인사 백련암 연응(蓮應)스님에게 출가했다. 1904년 3월에는 금강산 성지순례에 나서 불법(佛法)을 더욱 깊이 공부했으며, 1906년 2월 해인사로 돌아왔다. 가야산 홍류동 계곡 구선암(龜船岩) 바위에 있는 ‘나모아미타불’ 글씨가 그 무렵 스님이 쓴 것이다. 1919년 2월 오세창의 연락을 받고 상경하여, 백용성, 한용운 스님과 독립운동에 참여했다. 같은 해 3월 탑골공원에서 열린 3.1운동에 가담했고, 같은 달 15일 다시 상경하여 김법린 스님과 백당(白堂) 현채(玄采,1886~1925)를 만났다. 현채는 광문회(光文會) 편집원으로 고전을 간행하고 문화보급에 힘쓴 계몽주의자였다.
1924년 전 해인사 주지 이회광(李晦光)이 빚을 지면서 저당 잡힌 사찰 토지 3000두락(논, 밭의 넓이를 나타내는 단위로 논은 200평, 밭은 300평이 1두락)을 되찾았다. 이 비용은 17년에 걸쳐 상환했다.
1926년 해인사 대웅보전 앞 탑의 복원공사를 진행했고, 1927년 4월에는 45일간 경남 통영에서 조선 독립을 기원하는 수륙재(水陸祭)를 지냈다. 또 이 무렵 만해 한용운 스님을 해인사로 초빙하여 영자전(影子殿, 홍제암)에서 법문을 하도록 했다. 1929년 10월 독립운동에 참여했다는 사실이 드러나 연행됐다. 이듬해 4월 부산 형무소로 이감(移監)되었다가, 같은 해 10월 출감했다.
1945년 서울 중앙포교사로 위촉되었으며, 1946년 4월에는 합천 해인사 주지로 취임했다. 주지 취임 후 가장 먼저 한 일이 일제강점기 때 파괴된 사명대사 비를 복원한 것이었다. 1949년 해인사 주지를 사임했다. 1967년 박정희 대통령으로부터 격문을 받았으며, 1978년 7월 숭산 초등학교에 유관순 동상을 세웠다. 1983년 세수 97세, 법랍 84세로 입적했다.
1899년 13세에 합천 해인사 백련암 연응(蓮應)스님에게 출가했다. 1904년 3월에는 금강산 성지순례에 나서 불법(佛法)을 더욱 깊이 공부했으며, 1906년 2월 해인사로 돌아왔다. 가야산 홍류동 계곡 구선암(龜船岩) 바위에 있는 ‘나모아미타불’ 글씨가 그 무렵 스님이 쓴 것이다. 1919년 2월 오세창의 연락을 받고 상경하여, 백용성, 한용운 스님과 독립운동에 참여했다. 같은 해 3월 탑골공원에서 열린 3.1운동에 가담했고, 같은 달 15일 다시 상경하여 김법린 스님과 백당(白堂) 현채(玄采,1886~1925)를 만났다. 현채는 광문회(光文會) 편집원으로 고전을 간행하고 문화보급에 힘쓴 계몽주의자였다.
1924년 전 해인사 주지 이회광(李晦光)이 빚을 지면서 저당 잡힌 사찰 토지 3000두락(논, 밭의 넓이를 나타내는 단위로 논은 200평, 밭은 300평이 1두락)을 되찾았다. 이 비용은 17년에 걸쳐 상환했다.
1926년 해인사 대웅보전 앞 탑의 복원공사를 진행했고, 1927년 4월에는 45일간 경남 통영에서 조선 독립을 기원하는 수륙재(水陸祭)를 지냈다. 또 이 무렵 만해 한용운 스님을 해인사로 초빙하여 영자전(影子殿, 홍제암)에서 법문을 하도록 했다. 1929년 10월 독립운동에 참여했다는 사실이 드러나 연행됐다. 이듬해 4월 부산 형무소로 이감(移監)되었다가, 같은 해 10월 출감했다.
1945년 서울 중앙포교사로 위촉되었으며, 1946년 4월에는 합천 해인사 주지로 취임했다. 주지 취임 후 가장 먼저 한 일이 일제강점기 때 파괴된 사명대사 비를 복원한 것이었다. 1949년 해인사 주지를 사임했다. 1967년 박정희 대통령으로부터 격문을 받았으며, 1978년 7월 숭산 초등학교에 유관순 동상을 세웠다. 1983년 세수 97세, 법랍 84세로 입적했다.
출처/불교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