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검색
- Service
- 작가검색
북곡 홍치중 北谷 洪致中Hong ChiJung
1667 ~ 1732
조선
작가약력
- 1667(현종 8)∼1732(영조 8). 조선 후기의 문신.
작가 소개
본관은 남양(南陽). 자는 사능(士能), 호는 북곡(北谷). 평안도관찰사 명구(命耉)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우의정 중보(重普)이고, 아버지는 강원도관찰사 득우(得禹)이며, 어머니는 김경여(金慶餘)의 딸이다.
1699년(숙종 25) 사마시에 합격하고, 1706년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해 검열이 되었다. 그 뒤 지평·헌납·교리 등을 지내다가, 1712년 북평사(北評使)로 차출되어 백두산정계비를 세우는 데 참여하였다.
이어 대사간·승지 등을 역임하고 경상도·전라도 관찰사를 지냈다. 1719년 통신정사(通信正使)로 일본에 다녀와 부제학·이조참판이 되었으나, 경종 때 집권세력인 소론의 배척을 받아 홍주목사로 출보(黜補)되었다.
영조 즉위 후 예조판서로 발탁, 병조와 형조의 판서를 지냈다. 1726년(영조 2) 좌의정 민진원(閔鎭遠)의 천거로 우의정에 올랐는데, 노론이면서도 소론에 대한 정치적 보복에는 반대해 노론의 강경파로부터 기회주의자라는 비난도 받았다. 그러나 탕평을 추구하는 왕으로부터는 신임이 두터워 좌의정에 승진되었다.
뒤이은 정미환국으로 소론정권이 들어선 뒤에도 잠시 물러났다가 바로 복직되었다. 1729년 조문명(趙文命) 등의 탕평파가 신임옥사에 대한 시비의 절충을 꾀하자, 노론4대신(老論四大臣)과 3수옥(三手獄) 관련자에 대한 신원문제를 구분해야 한다는 논리를 폈다. 이로써 기유처분(己酉處分)을 내리게 하였다.
이어 영의정으로 승진하였다. 그리고 노론의 온건파를 이끌고 정치에 참여함으로써, 탕평파가 주도하는 노·소론의 온건파를 중심으로 한 연합정권 구축에 크게 기여하였다. 국가 재정 문제에도 큰 관심을 가져 7년여 재상으로 있는 동안 공명첩 발매의 개선책을 주장하였다.
그리고 민생고의 원인이 되는 전화(錢貨)의 부족 해소를 위한 주전의 필요성과 순목(純木 : 무명베)의 통용을 역설하였다. 또한 함경도 지역의 전략적 가치에 주목, 이 지역 출신 인물의 조화로운 등용을 통해 평소에 인심을 거둘 것을 요구하였다.
양역 문제와 관련해서는 양역의 철폐를 전제로 한 호포법 등의 대변통에는 반대하였다. 대신 호포법의 엄격한 운용과 철저한 호구 조사, 불필요한 서원의 철폐를 통한 모속양정(冒屬良丁 : 함부로 양정에 소속시킴.)의 색출 등으로 양역인구(良役人口)를 확보하는 것이 가장 현실적인 대책이라고 주장하였다.
원만하고 자상한 성격으로 노론은 물론 소론의 영수인 이광좌(李光佐)와도 친교가 깊었다. 이해에 밝고 타산에 빠르며, 남과 모나지 않기 위해 시비를 구별하지 않아 재상으로서의 명분과 절개를 지키지 못했다는 평을 받기도 하였다. 시호는 충간(忠簡)이다.
1699년(숙종 25) 사마시에 합격하고, 1706년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해 검열이 되었다. 그 뒤 지평·헌납·교리 등을 지내다가, 1712년 북평사(北評使)로 차출되어 백두산정계비를 세우는 데 참여하였다.
이어 대사간·승지 등을 역임하고 경상도·전라도 관찰사를 지냈다. 1719년 통신정사(通信正使)로 일본에 다녀와 부제학·이조참판이 되었으나, 경종 때 집권세력인 소론의 배척을 받아 홍주목사로 출보(黜補)되었다.
영조 즉위 후 예조판서로 발탁, 병조와 형조의 판서를 지냈다. 1726년(영조 2) 좌의정 민진원(閔鎭遠)의 천거로 우의정에 올랐는데, 노론이면서도 소론에 대한 정치적 보복에는 반대해 노론의 강경파로부터 기회주의자라는 비난도 받았다. 그러나 탕평을 추구하는 왕으로부터는 신임이 두터워 좌의정에 승진되었다.
뒤이은 정미환국으로 소론정권이 들어선 뒤에도 잠시 물러났다가 바로 복직되었다. 1729년 조문명(趙文命) 등의 탕평파가 신임옥사에 대한 시비의 절충을 꾀하자, 노론4대신(老論四大臣)과 3수옥(三手獄) 관련자에 대한 신원문제를 구분해야 한다는 논리를 폈다. 이로써 기유처분(己酉處分)을 내리게 하였다.
이어 영의정으로 승진하였다. 그리고 노론의 온건파를 이끌고 정치에 참여함으로써, 탕평파가 주도하는 노·소론의 온건파를 중심으로 한 연합정권 구축에 크게 기여하였다. 국가 재정 문제에도 큰 관심을 가져 7년여 재상으로 있는 동안 공명첩 발매의 개선책을 주장하였다.
그리고 민생고의 원인이 되는 전화(錢貨)의 부족 해소를 위한 주전의 필요성과 순목(純木 : 무명베)의 통용을 역설하였다. 또한 함경도 지역의 전략적 가치에 주목, 이 지역 출신 인물의 조화로운 등용을 통해 평소에 인심을 거둘 것을 요구하였다.
양역 문제와 관련해서는 양역의 철폐를 전제로 한 호포법 등의 대변통에는 반대하였다. 대신 호포법의 엄격한 운용과 철저한 호구 조사, 불필요한 서원의 철폐를 통한 모속양정(冒屬良丁 : 함부로 양정에 소속시킴.)의 색출 등으로 양역인구(良役人口)를 확보하는 것이 가장 현실적인 대책이라고 주장하였다.
원만하고 자상한 성격으로 노론은 물론 소론의 영수인 이광좌(李光佐)와도 친교가 깊었다. 이해에 밝고 타산에 빠르며, 남과 모나지 않기 위해 시비를 구별하지 않아 재상으로서의 명분과 절개를 지키지 못했다는 평을 받기도 하였다. 시호는 충간(忠簡)이다.
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