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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전 허문 林田 許文Huh Moon
1941 ~
한국
한국화
작가약력
- 1941년 전남 목포 출생
- 1942년 부친 임인 허림 별세
- 1948년 백부 남농 허건 슬하로 입문
- 1959년 목포 상업고등학교 졸업
- 1963년 홍익대 미술대학 졸업
- 1966년 제 15회 국전 입선( 19회, 20회 입선)
- 1970년 백양회전 특선
- 1972년 제 8회 전남도전 최우수상(9회, 10회 특선)
- 1976년 목포교대 강사
- 1978년 목포, 광주 순회전
- 1981년 국립현대미술관 81현대미술초대전 출품
- 1982년 미국 시몬슨 화랑 초대전
- 1990년 MBC 초대 소치 일가 4대전(세종문화예술회관)
- 2012년 무안 삼향면에 아트리에 준공
작가 소개
전남 목포 출신의 한국화가. 호는 임전(林田)이다. 운림산방 3대 화가인 임인 허림의 아들이자 남농 허건의 조카다.
아버지 임인 허림이 두 살 때 타계하는 바람에 큰아버지 허건 슬하에 들어가 초등학교를 다니면서 그림공부를 하였다. 그러나 목포상업학교 시절 그는 음악부에 들어가 트럼벨을 불고 악대를 지휘할 정도로 음악에 심취했다. 당시 음악선생은 그를 음악대학 진학을 권유했고 큰아버지 남농 허건선생도 그림공부를 반대했다. 하지만 홍익대 미대에 진학해 운림산방 4대 화맥을 잇기로 작정했다. 그는 얼굴조차 알지 못했던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이 자신을 화업의 길로 안내했다고 술회한 적이 있다.
허문은 졸업 후 국전 19회, 20회에서 입선하고 백양회전에 특선하는 등 두각을 나타냈다. 초창기 그는 채색화 보다 묵화를 선호했고 지도교수였던 천경자 선생으로부터 피를 속이지는 못한다는 칭찬을 받기도 했다. 남농도 뭔가 다른 그림을 그리기 위해 골몰하는 그를 격려했다.
그는 대학 졸업 후 한양중고학교에서 미술교사로 근무했으나 3년여 만에 사표를 내고 전업화가의 길로 들어섰다. 가족이 있는 데다 인기작가도 아닌 상태에서 전업화가를 길을 선택해 혹독한 시련을 겪었다.
1970년대 초 전남도전 최우수상을 수상했으며 목포교육대학 강사를 역임하면서 창작에 열중하였다. 이 시기에 그는 큰아버지 남농의 화풍에서 벗어나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기울였다. 목포에 있으면서 문예진흥원 주최 지방작가 초대전에도 초대돼 우수상을 수상하는 등 점차 화가로서의 입지를 굳히기 시작했다.
서울로 거주지를 옮긴 뒤 ‘안개에 쌓인 산수’를 소재로 그림으로 독특한 화역을 구축하였다. 그러나 남농조차 칭찬했던 작품이 국전에 낙선하자 실망을 느끼고 국전을 포기하고 비국전파 재야작가로 활동을 시작했다. 피나는 노력 끝에 ‘동(動)’이라는 주제를 찾았다. 그것은 서양화의 이론에 동양화를 대칭시키는 작업이었다. 그는 실사와 원근의 교차를 중요시하고 여백을 무시하는 서양화의 기법을 받아들였다. 동양화의 ‘정(靜)’을 버리고 서양화의 ‘동(動)’을 매개로 안개를 택했다. 초묵(焦墨)과 발묵을 조화시켜 화면전체를 흔들어보는 작업을 시도했다.
그는 이 무렵 화법은 무법이다. 주제를 살리기 위해서는 어떤 법칙도 무시할 수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는 작품의 주제인 안개를 끊임없이 살아서 움직이면서 피어나도록 화면에 리듬을 가했다. 깊은 안개가 주는 두려움을 깨기 위해 새를 그려 넣는 것도 특징 가운데 하나다. 남농도 생전에 허문의 안개를 따를 사람이 없다고 칭찬했다고 전해진다.
허문은 자신의 화업을 구추하면서도 운림산방 4대 화맥을 잇는 작가라는 긍지가 남다르다. 1990년 MBC문화방송 주최로 열린 운림산방 4대 화가전도 그가 말로 뛰며 만들어낸 결실이다.
허문은 70이 다돼 고향과 가까운 무안군 삼향면에 아틀리에를 마련하고 작품에 전력을 쏟고 있다.
아버지 임인 허림이 두 살 때 타계하는 바람에 큰아버지 허건 슬하에 들어가 초등학교를 다니면서 그림공부를 하였다. 그러나 목포상업학교 시절 그는 음악부에 들어가 트럼벨을 불고 악대를 지휘할 정도로 음악에 심취했다. 당시 음악선생은 그를 음악대학 진학을 권유했고 큰아버지 남농 허건선생도 그림공부를 반대했다. 하지만 홍익대 미대에 진학해 운림산방 4대 화맥을 잇기로 작정했다. 그는 얼굴조차 알지 못했던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이 자신을 화업의 길로 안내했다고 술회한 적이 있다.
허문은 졸업 후 국전 19회, 20회에서 입선하고 백양회전에 특선하는 등 두각을 나타냈다. 초창기 그는 채색화 보다 묵화를 선호했고 지도교수였던 천경자 선생으로부터 피를 속이지는 못한다는 칭찬을 받기도 했다. 남농도 뭔가 다른 그림을 그리기 위해 골몰하는 그를 격려했다.
그는 대학 졸업 후 한양중고학교에서 미술교사로 근무했으나 3년여 만에 사표를 내고 전업화가의 길로 들어섰다. 가족이 있는 데다 인기작가도 아닌 상태에서 전업화가를 길을 선택해 혹독한 시련을 겪었다.
1970년대 초 전남도전 최우수상을 수상했으며 목포교육대학 강사를 역임하면서 창작에 열중하였다. 이 시기에 그는 큰아버지 남농의 화풍에서 벗어나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기울였다. 목포에 있으면서 문예진흥원 주최 지방작가 초대전에도 초대돼 우수상을 수상하는 등 점차 화가로서의 입지를 굳히기 시작했다.
서울로 거주지를 옮긴 뒤 ‘안개에 쌓인 산수’를 소재로 그림으로 독특한 화역을 구축하였다. 그러나 남농조차 칭찬했던 작품이 국전에 낙선하자 실망을 느끼고 국전을 포기하고 비국전파 재야작가로 활동을 시작했다. 피나는 노력 끝에 ‘동(動)’이라는 주제를 찾았다. 그것은 서양화의 이론에 동양화를 대칭시키는 작업이었다. 그는 실사와 원근의 교차를 중요시하고 여백을 무시하는 서양화의 기법을 받아들였다. 동양화의 ‘정(靜)’을 버리고 서양화의 ‘동(動)’을 매개로 안개를 택했다. 초묵(焦墨)과 발묵을 조화시켜 화면전체를 흔들어보는 작업을 시도했다.
그는 이 무렵 화법은 무법이다. 주제를 살리기 위해서는 어떤 법칙도 무시할 수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는 작품의 주제인 안개를 끊임없이 살아서 움직이면서 피어나도록 화면에 리듬을 가했다. 깊은 안개가 주는 두려움을 깨기 위해 새를 그려 넣는 것도 특징 가운데 하나다. 남농도 생전에 허문의 안개를 따를 사람이 없다고 칭찬했다고 전해진다.
허문은 자신의 화업을 구추하면서도 운림산방 4대 화맥을 잇는 작가라는 긍지가 남다르다. 1990년 MBC문화방송 주최로 열린 운림산방 4대 화가전도 그가 말로 뛰며 만들어낸 결실이다.
허문은 70이 다돼 고향과 가까운 무안군 삼향면에 아틀리에를 마련하고 작품에 전력을 쏟고 있다.
출처/전남문화예술인D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