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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봉 한호 石峯 韓濩Han Ho
1543 ~ 1605
조선
서예
작가약력
- 1543년(중종 38)∼1605년(선조38). 조선 중기의 서예가.
작가 소개
본관은 삼화(三和). 자는 경홍(景洪), 호는 석봉(石峯)·청사(淸沙). 군수대기(大基)의 5대 손으로, 정랑세관(世寬)의 손자이다. 1567년(명종 22)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1583년(선조 16)와서(瓦署)별제(別提)에 제수되었다.
글씨로 출세하여 사자관[寫字官: 조선 시대 승문원과 규장각에서 문서를 정서(正書)하는 일을 맡아보던 벼슬]으로 국가의 여러 문서와 명나라에 보내는 외교문서를 도맡아 썼고, 중국에 사절이 갈 때도 서사관(書寫官)으로 파견되었다. 벼슬은 흡곡현령(歙谷縣令)과 가평군수(加平郡守)를 지냈다.
그의 묘갈(墓碣: 묘비)에 의하면, “송도(松都)에서 났으며, 점(占)보는 사람이 말하기를 ‘옥토끼가 동쪽에 났으니 낙양(洛陽)의 종이 값이 높아지리라. 이 아이는 반드시 글씨를 잘 써서 이름이 날 것이다.’라고 하였다.
자라면서 글씨 쓰기에 힘썼고, 꿈에 왕희지(王羲之)에게서 글씨를 받아, 이로부터 마음속으로 자부(自負)하고 법첩[法帖: 체법(體法)이 될 만한 명필의 서첩]을 대할 때마다 신(神)이 돕는 것 같아 마침내 해서(楷書)·행서(行書)·초서(草書)에 그 묘(妙)를 다하지 아니함이 없었다.”고 하였다. 그의 서법(書法)은 조선 초기부터 성행하던 조맹부(趙孟頫)의 서체를 따르지 않고 왕희지를 배웠다.
그러나 그가 배운 것은 진위(眞僞)가 문제되는 『악의론(樂毅論)』·『동방삭찬(東方朔贊)』·『황정경(黃庭經)』 등의 소해(小楷: 작고 깔끔하게 쓰는 해서체의 하나)에서 시작하였기 때문에 오히려 조법(趙法: 조맹부의 서법)보다 뒤떨어져서 진당인(晉唐人)의 높고 굳센 기운(氣韻)이 모자라는 저속한 구렁으로 떨어졌다.
또한, 한미(寒微: 생활 수준이 낮고 신분이 변변하지 못함)한 출신으로 오랫동안 사자관으로 있었기 때문에 예술적인 타고난 재질을 발휘하지 못하고 틀에 맞추려는 노력이 앞섰다. 『동국금석평(東國金石評)』에는 모든 글씨체에 숙달되기는 하였으나 속되다고 비평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로부터 국가의 문서를 다루는 사자관의 특유한 서체, 즉 사자관체(寫字官體)가 창출될 만큼 그의 영향은 컸으며 또 이로부터 사자관제도가 이루어졌다. 이러한 서체를 중국에서는 간록체(干祿體)라 한다.
양주에 있는 「김광계비(金光啓碑)」·「황주서대수비(黃注書大受碑)」·「이윤식비(李允湜碑)」·「이별제공즙비(李別提公楫碑)」, 고양에 있는 「권도원수대첩비전면(權都元帥大捷碑前面)」·「기응세비(奇應世碑)」, 장단(長湍)「윤감정변묘표액(尹監正忭墓表額)」, 과천(果川)「유용비(柳容碑)」·「허초당엽묘표음(許草堂曄墓表陰)」, 포천(抱川)「이판서몽량비(李判書夢亮碑)」, 남양(南陽)「홍영상섬비(洪領相暹碑)」, 용인「정의흥희린갈(鄭義興姬鄰碣)」·「정대헌유비(鄭大憲裕碑)」, 개성「서화담경덕비(徐花潭敬德碑)」, 합천「박사간소갈(朴司諫紹碣)」, 평양「기자묘비(箕子廟碑)」 등을 썼다.
글씨로 출세하여 사자관[寫字官: 조선 시대 승문원과 규장각에서 문서를 정서(正書)하는 일을 맡아보던 벼슬]으로 국가의 여러 문서와 명나라에 보내는 외교문서를 도맡아 썼고, 중국에 사절이 갈 때도 서사관(書寫官)으로 파견되었다. 벼슬은 흡곡현령(歙谷縣令)과 가평군수(加平郡守)를 지냈다.
그의 묘갈(墓碣: 묘비)에 의하면, “송도(松都)에서 났으며, 점(占)보는 사람이 말하기를 ‘옥토끼가 동쪽에 났으니 낙양(洛陽)의 종이 값이 높아지리라. 이 아이는 반드시 글씨를 잘 써서 이름이 날 것이다.’라고 하였다.
자라면서 글씨 쓰기에 힘썼고, 꿈에 왕희지(王羲之)에게서 글씨를 받아, 이로부터 마음속으로 자부(自負)하고 법첩[法帖: 체법(體法)이 될 만한 명필의 서첩]을 대할 때마다 신(神)이 돕는 것 같아 마침내 해서(楷書)·행서(行書)·초서(草書)에 그 묘(妙)를 다하지 아니함이 없었다.”고 하였다. 그의 서법(書法)은 조선 초기부터 성행하던 조맹부(趙孟頫)의 서체를 따르지 않고 왕희지를 배웠다.
그러나 그가 배운 것은 진위(眞僞)가 문제되는 『악의론(樂毅論)』·『동방삭찬(東方朔贊)』·『황정경(黃庭經)』 등의 소해(小楷: 작고 깔끔하게 쓰는 해서체의 하나)에서 시작하였기 때문에 오히려 조법(趙法: 조맹부의 서법)보다 뒤떨어져서 진당인(晉唐人)의 높고 굳센 기운(氣韻)이 모자라는 저속한 구렁으로 떨어졌다.
또한, 한미(寒微: 생활 수준이 낮고 신분이 변변하지 못함)한 출신으로 오랫동안 사자관으로 있었기 때문에 예술적인 타고난 재질을 발휘하지 못하고 틀에 맞추려는 노력이 앞섰다. 『동국금석평(東國金石評)』에는 모든 글씨체에 숙달되기는 하였으나 속되다고 비평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로부터 국가의 문서를 다루는 사자관의 특유한 서체, 즉 사자관체(寫字官體)가 창출될 만큼 그의 영향은 컸으며 또 이로부터 사자관제도가 이루어졌다. 이러한 서체를 중국에서는 간록체(干祿體)라 한다.
양주에 있는 「김광계비(金光啓碑)」·「황주서대수비(黃注書大受碑)」·「이윤식비(李允湜碑)」·「이별제공즙비(李別提公楫碑)」, 고양에 있는 「권도원수대첩비전면(權都元帥大捷碑前面)」·「기응세비(奇應世碑)」, 장단(長湍)「윤감정변묘표액(尹監正忭墓表額)」, 과천(果川)「유용비(柳容碑)」·「허초당엽묘표음(許草堂曄墓表陰)」, 포천(抱川)「이판서몽량비(李判書夢亮碑)」, 남양(南陽)「홍영상섬비(洪領相暹碑)」, 용인「정의흥희린갈(鄭義興姬鄰碣)」·「정대헌유비(鄭大憲裕碑)」, 개성「서화담경덕비(徐花潭敬德碑)」, 합천「박사간소갈(朴司諫紹碣)」, 평양「기자묘비(箕子廟碑)」 등을 썼다.
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