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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곡 천재동 曾谷 千在東Cheon JaeDong
1915 ~ 2007
한국
중요무형문화재 18호 '동래야류' 보유자
작가약력
- 울산광역시 출생
- 남목보통학교 졸업
- 일본 동경 가와바다화학교 소묘과 수료 및 조교
- 가와바다화학교 특설 인체과 수학
- 서울현대극장 주관 국민극연구소 수료
- 일본 동경 동보계 극장 유락좌(有樂座)에서 연출 및 무대미술 수료
- 초중등 교사 25년 봉직
- 기타 경력
- 부산시 교육청 민간장학사
- 경남교직원연수 강사
- 한국미협회원
- 한국예총 부산미술협회 공예분과 이사
- 사단법인 한국전업미술가협회 부산회 자문위원
- 상록수 노인합창단 단장
- 중요무형문화재 제18호 동래야류기능보유
- 중요무형문화재 동래야류 보존협회이사
- 부산연극협회 고문
- 부산시 부산진구 문화협의회 고문
- 부산민속예술관 관장
작가 소개
천재동(千在東)[1915~2007]은 경상남도 울산군 방어진[현 울산광역시 동구 방어동]에서 태어나 남목보통학교를 졸업하였다. 일본 도쿄[東京] 가와바타미술학교의 소묘과를 수료하고, 조교를 지내다가 같은 학교 특설 인체과를 중퇴하였다. 해방되기 2년 전인 1943년 11월에 귀국하여 1944년 서정자와 결혼하였다. 25년간 평교사 생활을 하였으며, 토우 만들기와 창작 가면 전시회 등을 통해 지속적으로 문화 예술 활동을 이어갔다. 천재동은 회고록에서 자신의 다섯 가지 전공을 토우, 동요 민속화, 연극, 탈·가면, 민속놀이라고 밝혔다.
1945년 10월 첫 개인전인 ‘광복 축하 유화전’을 개최한 이후 천재동의 화가로서의 경력은 화려했다. 1965년 10월 한국 최초의 창작 가면 전시회인 제2회 천재동 탈 작품전[86점 전시]을 개최한 이래, 1999년까지 모두 스물다섯 번의 탈 작품전을 개최하였다. 그리고 1996년 서울 정도 600주년을 기념하는 대한민국 원로 작가 초대전을 비롯한 일곱 번의 각종 초대전에도 작품을 출품하였다.
연극 활동도 다채로웠다. 1946년 3월 방일 방공을 내용으로 한 부락민 계몽 운동 작품을 만들어 순회공연을 한 것은 천재동의 작품 활동의 시초가 되었다. 천재동이 만든 아동극단으로는 한나라·갈매기·바다 등이 있고, 연극 가족 운동으로 창단한 드라마센타 부산극회는 살롱 드라마 형식의 작품인 「붉은 카네이션」·「위협」·「대합실」·「흥부전」 등의 작품을 공연하였다. 1978년에는 극단 마당을 창단하여 사뮤엘 베케트(Samuel Beckett)의 「고도우를 기다리며」를 공연하였다.
1965년 10월 사단법인 부산민속예술보존협회에 가입하여 본격적인 민속 예술 활동을 시작하였다. 1967년 3월 독일 뤼브케 대통령 부산 방문 환영 ‘민속 길놀이’ 제작 총지휘를 맡은 것을 시작으로, 1969년에는 동래 야류 연희본 소책자를 발간하였다. 1972년에는 부산시 무형 문화재 제3호인 동래 학춤 무보를 작성하였으며, 이와 함께 부산시 무형 문화재 제4호 동래 지신밟기 연희본을 채록하여 정립하였다. 같은 해에는 동래 야류 길놀이 「도해화」를 완성하여 오늘날의 길놀이 표본을 만들었다.
1981년에는 동래 부사 송상현(宋象賢)의 군사 행렬을 단독 채록하여 도해를 완성하였는데, 이는 현재 동래문화원에 소장되어 있다. 1991년 8월에는 제4회 민족 통일 대동 장승굿 대회장을 역임하였다. 이외에도 숱한 봉사 활동을 통해 불우한 이웃과 함께하는 활동을 하였으며, ‘부산 시민 위안 민속놀이 대잔치’라는 명칭으로 5회의 행사를 개최하기도 하였다. 천재동은 2007년 7월 27일에 세상을 떠났다.
저서로 전래 동요 화집인 『달노래 별노래 새노래』가 있고, 희곡으로 「십시일반」·「살신성효」·「상금상금 쌍가락지」·「화초 며느리」·「신술선인」·「최후의 일발」·「조삼모사」·「쇠똥골 장승」·「우리 농부」·「중매 소동」·「범내골 이야기」·「바다를 건너가는 처용무」 등이 있고, 동극으로 「병원 놀이」·「병아리와 바둑이」·「노래 주머니」·「풍속도」·「녹화 만세」·「모든 윤희」·「고추 먹고 맴맴」 등이 있다.
1967년 6월에 전국 아동극 경연 대회에서 문공부 장관상을 수상하였고, 1971년 6월에 제1회 향토 문화상 수상, 1971년에 중요 무형 문화재 제18호 동래 야류[가면 제작] 예능 보유자 지정, 1973년에 전국 기능 보유 공예 경진 대회에서 우수상 수상, 1985년에 부산시 문화상[무대예술] 수상, 2002년 8월 5일에 동다송 문화상 수상, 2002년 10월 7일에 제1회 부산 예술상 수상, 2002년 10월 18일에 자랑스러운 부산진구민상을 수상하였다.
1945년 10월 첫 개인전인 ‘광복 축하 유화전’을 개최한 이후 천재동의 화가로서의 경력은 화려했다. 1965년 10월 한국 최초의 창작 가면 전시회인 제2회 천재동 탈 작품전[86점 전시]을 개최한 이래, 1999년까지 모두 스물다섯 번의 탈 작품전을 개최하였다. 그리고 1996년 서울 정도 600주년을 기념하는 대한민국 원로 작가 초대전을 비롯한 일곱 번의 각종 초대전에도 작품을 출품하였다.
연극 활동도 다채로웠다. 1946년 3월 방일 방공을 내용으로 한 부락민 계몽 운동 작품을 만들어 순회공연을 한 것은 천재동의 작품 활동의 시초가 되었다. 천재동이 만든 아동극단으로는 한나라·갈매기·바다 등이 있고, 연극 가족 운동으로 창단한 드라마센타 부산극회는 살롱 드라마 형식의 작품인 「붉은 카네이션」·「위협」·「대합실」·「흥부전」 등의 작품을 공연하였다. 1978년에는 극단 마당을 창단하여 사뮤엘 베케트(Samuel Beckett)의 「고도우를 기다리며」를 공연하였다.
1965년 10월 사단법인 부산민속예술보존협회에 가입하여 본격적인 민속 예술 활동을 시작하였다. 1967년 3월 독일 뤼브케 대통령 부산 방문 환영 ‘민속 길놀이’ 제작 총지휘를 맡은 것을 시작으로, 1969년에는 동래 야류 연희본 소책자를 발간하였다. 1972년에는 부산시 무형 문화재 제3호인 동래 학춤 무보를 작성하였으며, 이와 함께 부산시 무형 문화재 제4호 동래 지신밟기 연희본을 채록하여 정립하였다. 같은 해에는 동래 야류 길놀이 「도해화」를 완성하여 오늘날의 길놀이 표본을 만들었다.
1981년에는 동래 부사 송상현(宋象賢)의 군사 행렬을 단독 채록하여 도해를 완성하였는데, 이는 현재 동래문화원에 소장되어 있다. 1991년 8월에는 제4회 민족 통일 대동 장승굿 대회장을 역임하였다. 이외에도 숱한 봉사 활동을 통해 불우한 이웃과 함께하는 활동을 하였으며, ‘부산 시민 위안 민속놀이 대잔치’라는 명칭으로 5회의 행사를 개최하기도 하였다. 천재동은 2007년 7월 27일에 세상을 떠났다.
저서로 전래 동요 화집인 『달노래 별노래 새노래』가 있고, 희곡으로 「십시일반」·「살신성효」·「상금상금 쌍가락지」·「화초 며느리」·「신술선인」·「최후의 일발」·「조삼모사」·「쇠똥골 장승」·「우리 농부」·「중매 소동」·「범내골 이야기」·「바다를 건너가는 처용무」 등이 있고, 동극으로 「병원 놀이」·「병아리와 바둑이」·「노래 주머니」·「풍속도」·「녹화 만세」·「모든 윤희」·「고추 먹고 맴맴」 등이 있다.
1967년 6월에 전국 아동극 경연 대회에서 문공부 장관상을 수상하였고, 1971년 6월에 제1회 향토 문화상 수상, 1971년에 중요 무형 문화재 제18호 동래 야류[가면 제작] 예능 보유자 지정, 1973년에 전국 기능 보유 공예 경진 대회에서 우수상 수상, 1985년에 부산시 문화상[무대예술] 수상, 2002년 8월 5일에 동다송 문화상 수상, 2002년 10월 7일에 제1회 부산 예술상 수상, 2002년 10월 18일에 자랑스러운 부산진구민상을 수상하였다.
출처/문화체육관광부,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한국학중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