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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촌 지석영 松村 池錫永Ji SeokYeong
1855 ~ 1935
근대
작가약력
- 1855(철종 6)∼1935. 의사·국어학자.
작가 소개
본관은 충주(忠州). 자는 공윤(公胤), 호는 송촌(松村). 서울 낙원동 중인 집안에서 태어났다. 의학교육을 받은 일은 없었으나 일찍부터 서학(西學)을 동경하여 중국에서 번역된 서양의학책을 탐독하였는데, 특히 관심을 둔 것은 영국인 제너(Jenner,E.)의 종두법(種痘法:천연두 예방법)에 관한 것이었다.
1876년(고종 13) 병자수호조약이 일본과 체결되면서 그 해 수신사로 지석영의 스승인 박영선(朴永善)이 가게 되어 그에게 일본에서 실시되고 있는 종두법의 실황을 조사하도록 간청하였다. 그래서 박영선은 오다키[大瀧富川]에게 우두법을 배우고 구가[久我克明]의 『종두귀감(種痘龜鑑)』을 얻어다 전해주었다.
그 뒤 1879년 일본해군이 세운 부산의 제생의원(濟生醫院)에 가서 원장 마쓰마에[松前讓]와 군의(軍醫) 도즈카[戶塚積齊]로부터 2개월간 종두법을 배우고 두묘(痘苗:우두의 원료)와 종두침 두 개를 얻어 서울로 돌아오는 길에 처가가 있는 충주에 들러 40여 명에게 우두를 놓아주었다.
이것이 우리 나라 사람에 의한 공개적인 종두법 실시의 시초이다. 이듬해 서울로 돌아와 종두를 실시하여 호평을 받았다.
그러나 두묘의 공급이 잘 안 되었으므로 1880년 제2차 수신사 김홍집(金弘集)의 수행원으로 일본 도쿄에 건너가서 그곳 위생국 우두종계소장(牛痘種繼所長) 기쿠치[菊池康庵]에게 종두기술을 익히고 두묘의 제조, 저장법과 독우(犢牛:송아지)의 사양법(飼養法)·채장법(採漿法)을 배운 뒤 두묘 50병(柄)을 얻어가지고 귀국하였다.
서울에서 두묘를 만들어 종두를 보급하면서 군의 마에다[前田淸則]로부터 서양의학을 배웠다. 1882년 임오군란이 일어나자 일본에서 종두법을 배워왔다는 죄목으로 체포령이 내렸다. 그는 재빨리 피신하였으나 종두장은 난민들의 방화로 불타버렸다. 정국이 바뀌면서 서울로 돌아와 종두장을 재건하였다.
그는 전라도어사 박영교(朴永敎)의 초청을 받아 전주에 우두국을 설치하고 종두를 실시하면서 종두법을 가르쳤고, 이듬해에는 충청도어사 이용호(李容鎬)의 요청에 의하여 공주에도 우두국을 만들었다.
『한성순보(漢城旬報)』에 외국의 종두에 관한 기사가 실려 종두법은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이렇게 종두법의 보급에 진력하면서도 1883년 문과에 등제(登第)하여 성균관전적과 사헌부지평을 역임하였다.
1885년 그 동안 쌓은 지식과 경험을 종합하여 『우두신설(牛痘新說)』을 지어냈다. 이것은 우리 나라에서 처음 나온 우두법에 관한 저서로 2권으로 되어 있는데, 제너의 우두법 발견을 비롯하여 우두의 실시, 천연두의 치료, 두묘의 제조, 독우의 사양법·채장법이 간명하게 서술되어 있다.
같은 해 우두교수관으로서 전라도지방을 순회, 시종(施種)을 하여 큰 성과를 거두었고, 1887년전라남도 강진의 신지도(薪智島)에 유배되어서도 여전히 우두를 실시하였다.
1892년 유배에서 풀려 서울로 돌아온 그는 이듬해 우두보영당(牛痘保嬰堂)을 설립하고 많은 어린이들에게 시종하였다. 1894년 갑오개혁과 함께 위생국의 종두를 관장하게 되어 떳떳하게 우두를 보급할 수 있었다. 김홍집 내각이 들어서면서 형조참의·승지를 거쳐 동래부사를 지냈는데 임지에서도 우두를 실시하기를 잊지 않았다.
학부대신에게 의학교의 설립을 제의하였고, 1899년 의학교가 설치되자 초대 교장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일본인 교사들을 초빙하고 일본 의학책을 번역하여 가르치게 하였다. 1902년 그의 제창으로 훈동(勳洞)에 의학교의 부속병원이 설립되었고, 이듬해 의학교는 첫 졸업생 19명을 배출했다.
그는 『황성신보(皇城新報)』에 「양매창론(楊梅瘡論)」을 발표하여 매독의 해독을 대중에게 알렸고, 온역(瘟疫:봄철에 유행하는 급성전염병)·전염병·양매창(楊梅瘡:악성 매독으로 인한 발진)의 예방법을 만들 것을 주장하기도 하였다.
1907년 의학교가 폐지되고 대한의원의육부(大韓醫院醫育部)로 개편됨과 함께 학감에 취임하였다. 1910년에 사직하였으니 11년 동안 의학교육에 헌신한 셈이다.
그의 업적은 근대의학의 도입에만 그치지 않았다. 1882년에 올린 상소에서 급속한 개화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이를 위하여 일종의 훈련원을 세우자고 주장하였다.
그곳에 당시의 세계정세를 알 수 있는 책과 외국의 과학기술에 관한 책들을 모으고, 구할 수 있는 여러 가지 문물을 수집하여 전국에서 뽑아온 젊은이들에게 보이고 가르치자는 야심적인 계획이었다.
이처럼 일찍이 개화에 눈을 뜬 그는 1890년대 후반에는 독립협회의 주요 회원으로 크게 활약하였다. 독립협회가 주최하는 갖가지 토론회에 참가하여 의견을 발표하였으며, 그럼으로써 시야를 넓혀갔다.
다른 회원들이 대부분 서양문물이라면 무조건 받아들이자는 태도로 쏠려 있던 때 좀 다른 생각을 가졌던 듯하다. 예컨대, 그는 음력을 주로 쓰되 그 옆에 양력을 아울러 표시하자는 의견이었다.
또한, 개화가 늦어지는 이유가 어려운 한문을 쓰기 때문이라 보고 1905년 널리 교육을 펴기 위하여 알기 쉬운 한글을 쓸 것을 주장하였다. 더욱이 주시경(周時經)과 더불어 한글의 가로쓰기를 주장한 선구자였다. 1908년 국문연구소 위원에 임명되었고, 이듬해 한글로 한자를 해석한 『자전석요(字典釋要)』를 지어냈다.
그의 주장은 인정을 받아 많이 받아들여졌고, 고종은 그의 공을 인정하여 태극장(太極章)·팔괘장(八卦章) 등을 내렸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한일합병을 당하자 모든 공직을 버렸다. 일본의 간곡한 협조요청이 있었으나 초야에 묻혀 살다가 80세를 일기로 일생을 마쳤다.
1876년(고종 13) 병자수호조약이 일본과 체결되면서 그 해 수신사로 지석영의 스승인 박영선(朴永善)이 가게 되어 그에게 일본에서 실시되고 있는 종두법의 실황을 조사하도록 간청하였다. 그래서 박영선은 오다키[大瀧富川]에게 우두법을 배우고 구가[久我克明]의 『종두귀감(種痘龜鑑)』을 얻어다 전해주었다.
그 뒤 1879년 일본해군이 세운 부산의 제생의원(濟生醫院)에 가서 원장 마쓰마에[松前讓]와 군의(軍醫) 도즈카[戶塚積齊]로부터 2개월간 종두법을 배우고 두묘(痘苗:우두의 원료)와 종두침 두 개를 얻어 서울로 돌아오는 길에 처가가 있는 충주에 들러 40여 명에게 우두를 놓아주었다.
이것이 우리 나라 사람에 의한 공개적인 종두법 실시의 시초이다. 이듬해 서울로 돌아와 종두를 실시하여 호평을 받았다.
그러나 두묘의 공급이 잘 안 되었으므로 1880년 제2차 수신사 김홍집(金弘集)의 수행원으로 일본 도쿄에 건너가서 그곳 위생국 우두종계소장(牛痘種繼所長) 기쿠치[菊池康庵]에게 종두기술을 익히고 두묘의 제조, 저장법과 독우(犢牛:송아지)의 사양법(飼養法)·채장법(採漿法)을 배운 뒤 두묘 50병(柄)을 얻어가지고 귀국하였다.
서울에서 두묘를 만들어 종두를 보급하면서 군의 마에다[前田淸則]로부터 서양의학을 배웠다. 1882년 임오군란이 일어나자 일본에서 종두법을 배워왔다는 죄목으로 체포령이 내렸다. 그는 재빨리 피신하였으나 종두장은 난민들의 방화로 불타버렸다. 정국이 바뀌면서 서울로 돌아와 종두장을 재건하였다.
그는 전라도어사 박영교(朴永敎)의 초청을 받아 전주에 우두국을 설치하고 종두를 실시하면서 종두법을 가르쳤고, 이듬해에는 충청도어사 이용호(李容鎬)의 요청에 의하여 공주에도 우두국을 만들었다.
『한성순보(漢城旬報)』에 외국의 종두에 관한 기사가 실려 종두법은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이렇게 종두법의 보급에 진력하면서도 1883년 문과에 등제(登第)하여 성균관전적과 사헌부지평을 역임하였다.
1885년 그 동안 쌓은 지식과 경험을 종합하여 『우두신설(牛痘新說)』을 지어냈다. 이것은 우리 나라에서 처음 나온 우두법에 관한 저서로 2권으로 되어 있는데, 제너의 우두법 발견을 비롯하여 우두의 실시, 천연두의 치료, 두묘의 제조, 독우의 사양법·채장법이 간명하게 서술되어 있다.
같은 해 우두교수관으로서 전라도지방을 순회, 시종(施種)을 하여 큰 성과를 거두었고, 1887년전라남도 강진의 신지도(薪智島)에 유배되어서도 여전히 우두를 실시하였다.
1892년 유배에서 풀려 서울로 돌아온 그는 이듬해 우두보영당(牛痘保嬰堂)을 설립하고 많은 어린이들에게 시종하였다. 1894년 갑오개혁과 함께 위생국의 종두를 관장하게 되어 떳떳하게 우두를 보급할 수 있었다. 김홍집 내각이 들어서면서 형조참의·승지를 거쳐 동래부사를 지냈는데 임지에서도 우두를 실시하기를 잊지 않았다.
학부대신에게 의학교의 설립을 제의하였고, 1899년 의학교가 설치되자 초대 교장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일본인 교사들을 초빙하고 일본 의학책을 번역하여 가르치게 하였다. 1902년 그의 제창으로 훈동(勳洞)에 의학교의 부속병원이 설립되었고, 이듬해 의학교는 첫 졸업생 19명을 배출했다.
그는 『황성신보(皇城新報)』에 「양매창론(楊梅瘡論)」을 발표하여 매독의 해독을 대중에게 알렸고, 온역(瘟疫:봄철에 유행하는 급성전염병)·전염병·양매창(楊梅瘡:악성 매독으로 인한 발진)의 예방법을 만들 것을 주장하기도 하였다.
1907년 의학교가 폐지되고 대한의원의육부(大韓醫院醫育部)로 개편됨과 함께 학감에 취임하였다. 1910년에 사직하였으니 11년 동안 의학교육에 헌신한 셈이다.
그의 업적은 근대의학의 도입에만 그치지 않았다. 1882년에 올린 상소에서 급속한 개화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이를 위하여 일종의 훈련원을 세우자고 주장하였다.
그곳에 당시의 세계정세를 알 수 있는 책과 외국의 과학기술에 관한 책들을 모으고, 구할 수 있는 여러 가지 문물을 수집하여 전국에서 뽑아온 젊은이들에게 보이고 가르치자는 야심적인 계획이었다.
이처럼 일찍이 개화에 눈을 뜬 그는 1890년대 후반에는 독립협회의 주요 회원으로 크게 활약하였다. 독립협회가 주최하는 갖가지 토론회에 참가하여 의견을 발표하였으며, 그럼으로써 시야를 넓혀갔다.
다른 회원들이 대부분 서양문물이라면 무조건 받아들이자는 태도로 쏠려 있던 때 좀 다른 생각을 가졌던 듯하다. 예컨대, 그는 음력을 주로 쓰되 그 옆에 양력을 아울러 표시하자는 의견이었다.
또한, 개화가 늦어지는 이유가 어려운 한문을 쓰기 때문이라 보고 1905년 널리 교육을 펴기 위하여 알기 쉬운 한글을 쓸 것을 주장하였다. 더욱이 주시경(周時經)과 더불어 한글의 가로쓰기를 주장한 선구자였다. 1908년 국문연구소 위원에 임명되었고, 이듬해 한글로 한자를 해석한 『자전석요(字典釋要)』를 지어냈다.
그의 주장은 인정을 받아 많이 받아들여졌고, 고종은 그의 공을 인정하여 태극장(太極章)·팔괘장(八卦章) 등을 내렸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한일합병을 당하자 모든 공직을 버렸다. 일본의 간곡한 협조요청이 있었으나 초야에 묻혀 살다가 80세를 일기로 일생을 마쳤다.
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