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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봉 조희룡 又峰 趙熙龍Cho HuiRyong
1789 ~ 1866
조선
서화
작가약력
- 1789년(정조 13)∼1866년(고종 3). 조선 후기의 화가.
작가 소개
본관은 평양(平壤). 자는 치운(致雲), 호는 우봉(又峰)·석감(石憨)·철적(鐵笛)·호산(壺山)·단로(丹老) 또는 매수(梅叟). 서울 출생. 김정희(金正喜)의 문인이다. 1813년에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한 후 여러 벼슬을 거쳐 오위장(五衛將)을 지냈다. 1851년 왕실전례(王室典禮)에 개입되어 전라도 임자도(荏子島)에 유배되었다가 1853년에 귀향하였다.
19세기 대표적 여항시사인 벽오사(碧梧社)의 중심인물로 활동하였고 58세에는 헌종의 명을 받아 금강산의 명승지를 그리기도 했다. 유배 중에도 자신의 거처에 예서체(隷書體)로 쓴 ‘화구암(畵鷗盦)’이라는 편액을 걸고 활발한 작품활동을 하여 기량이 더욱 완숙해졌다.
그는 시·글씨·그림에 모두 뛰어난 재주를 보였는데, 글씨는 추사체(秋史體)를 본받았고, 그림은 난초와 매화를 특히 많이 그렸다. 난초 역시 김정희의 묵란화(墨蘭畫)의 정신을 본받아 그렸다.
『석우망년록(石友忘年錄)』이라는 자서전적인 저술과 그 당시의 미천한 계층 출신의 인물 중 학문·문장·서화·의술·점술에 뛰어난 사람들의 행적을 기록한 일종의 열전적인 저술인 『호산외사(壺山外史)』를 남겼다. 특히 여기에 수록된 일곱 명의 화가(김홍도·최북·임희지 등)들에 대한 비교적 상세한 인물 묘사와 그들 상호간의 교우 관계의 기록은 조선 후기의 회화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된다.
유작 중 가장 많은 수가 매화 그림인데 이와 같은 자신의 매화벽(梅花癖)을 『석우망년록』에 상세히 적었다. 자신이 그린 매화 병풍을 방 안에 둘러치고 매화를 읊은 시가 새겨져 있는 벼루와 매화서옥장연(梅花書屋藏烟)이라는 먹을 사용했으며, 매화시백영(梅花詩百詠)을 지어 큰 소리로 읊다가 목이 마르면 매화편차(梅花片茶)를 달여 먹었다. 그리고 자기 거처를 매화백영루(梅花百詠樓)라고 이름 짓고 자신의 호를 매수(梅叟)라고 하였다는 내용이다.
현재 간송미술관 소장의 「매화서옥도(梅花書屋圖)」는 이와 같은 그의 생활 주변의 모습을 표현한 듯한 재미있는 그림이다.
매화그림 중 그의 새로운 구도적 특징을 잘 나타내는 것은 길고 좁은 축화(軸畫: 두루마리 그림) 형식의 그림이다. 그 대표적인 예로 「홍매대련(紅梅對聯)」을 들 수 있다. 굵은 노수간(老樹幹: 늙은 나무의 줄기)이 힘찬 용의 꿈틀거림과 같이 두세 번 크게 굴곡지면서 화폭의 높이를 가득 채운다. 그리고 그중 몇 군데로부터 꽃을 가득히 피운 가느다란 가지들이 사방으로 힘차게 뻗어 나가 주간(主幹)과 서로 대조와 조화를 이룬다.
비백법(飛白法: 서예에서 굵은 필획을 그을 때 운필(運筆)의 속도와 먹의 분량에 따라서 그 획의 일부가 먹으로 채워지지 않은 채 불규칙한 형태의 흰 부분을 드러나게 하는 필법)을 사용한 수간에는 역시 대조되는 윤묵(潤墨)의 짙은 점을 찍어 요소요소를 강조하였으며 매화꽃은 몰골법(沒骨法: 그림을 그릴 때 윤곽을 그리지 않는 화법)으로 그렸다.
그의 백매화(白梅花)는 율동적인 경쾌한 붓놀림으로 꽃잎 하나하나의 윤곽선을 그리고 예리한 선으로 꽃술을 장식하였다. 이들 그림에는 항상 추사체 글씨의 화제(畫題)를 곁들여 문인화다운 운치를 더욱 북돋았다.
그의 묵매화는 사임당 신씨(師任堂申氏) 이래의 조선 중기 묵매도의 구도에서 탈피하여 후기 묵매화의 새로운 경지를 개척하였다. 김정희는 조희룡의 난초 그림이 서법에 의한 문인화답지 않게 아직도 화법만을 중시하는 태도를 면하지 못하였다고 낮게 평가하였다. 하지만 그의 묵란화들을 보면 절제 있고 힘찬 필선으로 된 우수한 작품들이 많다.
19세기 대표적 여항시사인 벽오사(碧梧社)의 중심인물로 활동하였고 58세에는 헌종의 명을 받아 금강산의 명승지를 그리기도 했다. 유배 중에도 자신의 거처에 예서체(隷書體)로 쓴 ‘화구암(畵鷗盦)’이라는 편액을 걸고 활발한 작품활동을 하여 기량이 더욱 완숙해졌다.
그는 시·글씨·그림에 모두 뛰어난 재주를 보였는데, 글씨는 추사체(秋史體)를 본받았고, 그림은 난초와 매화를 특히 많이 그렸다. 난초 역시 김정희의 묵란화(墨蘭畫)의 정신을 본받아 그렸다.
『석우망년록(石友忘年錄)』이라는 자서전적인 저술과 그 당시의 미천한 계층 출신의 인물 중 학문·문장·서화·의술·점술에 뛰어난 사람들의 행적을 기록한 일종의 열전적인 저술인 『호산외사(壺山外史)』를 남겼다. 특히 여기에 수록된 일곱 명의 화가(김홍도·최북·임희지 등)들에 대한 비교적 상세한 인물 묘사와 그들 상호간의 교우 관계의 기록은 조선 후기의 회화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된다.
유작 중 가장 많은 수가 매화 그림인데 이와 같은 자신의 매화벽(梅花癖)을 『석우망년록』에 상세히 적었다. 자신이 그린 매화 병풍을 방 안에 둘러치고 매화를 읊은 시가 새겨져 있는 벼루와 매화서옥장연(梅花書屋藏烟)이라는 먹을 사용했으며, 매화시백영(梅花詩百詠)을 지어 큰 소리로 읊다가 목이 마르면 매화편차(梅花片茶)를 달여 먹었다. 그리고 자기 거처를 매화백영루(梅花百詠樓)라고 이름 짓고 자신의 호를 매수(梅叟)라고 하였다는 내용이다.
현재 간송미술관 소장의 「매화서옥도(梅花書屋圖)」는 이와 같은 그의 생활 주변의 모습을 표현한 듯한 재미있는 그림이다.
매화그림 중 그의 새로운 구도적 특징을 잘 나타내는 것은 길고 좁은 축화(軸畫: 두루마리 그림) 형식의 그림이다. 그 대표적인 예로 「홍매대련(紅梅對聯)」을 들 수 있다. 굵은 노수간(老樹幹: 늙은 나무의 줄기)이 힘찬 용의 꿈틀거림과 같이 두세 번 크게 굴곡지면서 화폭의 높이를 가득 채운다. 그리고 그중 몇 군데로부터 꽃을 가득히 피운 가느다란 가지들이 사방으로 힘차게 뻗어 나가 주간(主幹)과 서로 대조와 조화를 이룬다.
비백법(飛白法: 서예에서 굵은 필획을 그을 때 운필(運筆)의 속도와 먹의 분량에 따라서 그 획의 일부가 먹으로 채워지지 않은 채 불규칙한 형태의 흰 부분을 드러나게 하는 필법)을 사용한 수간에는 역시 대조되는 윤묵(潤墨)의 짙은 점을 찍어 요소요소를 강조하였으며 매화꽃은 몰골법(沒骨法: 그림을 그릴 때 윤곽을 그리지 않는 화법)으로 그렸다.
그의 백매화(白梅花)는 율동적인 경쾌한 붓놀림으로 꽃잎 하나하나의 윤곽선을 그리고 예리한 선으로 꽃술을 장식하였다. 이들 그림에는 항상 추사체 글씨의 화제(畫題)를 곁들여 문인화다운 운치를 더욱 북돋았다.
그의 묵매화는 사임당 신씨(師任堂申氏) 이래의 조선 중기 묵매도의 구도에서 탈피하여 후기 묵매화의 새로운 경지를 개척하였다. 김정희는 조희룡의 난초 그림이 서법에 의한 문인화답지 않게 아직도 화법만을 중시하는 태도를 면하지 못하였다고 낮게 평가하였다. 하지만 그의 묵란화들을 보면 절제 있고 힘찬 필선으로 된 우수한 작품들이 많다.
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