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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석 조병옥 維石 趙炳玉Jo ByungOk
1894 ~ 1960
근대·현대
작가약력
- 1894∼1960. 독립운동가·정치인.
작가 소개
출생지는 충청남도 천안. 초명은 조병갑(趙炳甲), 호는 유석(維石)이고, 아버지는 조인원(趙仁元)이다. 공주소학교, 연희전문학교를 거쳐 미국 컬럼비아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신간회(新幹會), 수양동우회 사건 등과 관련해 옥고를 치르고 해방 후 미군정청 경무부장을 역임했다. 1960년 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선출되었으나 발병하여 도미 치료 중 사망하였다.
1894년 충청남도 목천(지금의 천안)에서 출생하여 한학을 수학하고 케블 목사의 추천으로 공주 영명학교에 편입하여 졸업하였다. 이후 영명중학을 거쳐 1909년 평양 숭실중학교로 편입하였다. 졸업 후 상경해 연희전문학교에 입학하였으며 1914년에 졸업하였다. 평양 숭실중학교 재학시 미국 유학 후 귀국한 이승만과 김규식·신흥우·백상규 등의 영향으로 유학을 결심하게 되었다. 그래서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1918년 펜실바니아주 와이오밍 고교를 졸업하고 컬럼비아 대학에서 학사학위를 받은 다음 동 대학교 대학원에 진학하였다. 1925년 『조선의 토지제도』라는 제목의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유학 중인 1919년 3·1운동의 여파로 북미 지역의 독립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자 조병옥도 이에 열성적으로 참여하였다. 1919년 4월 13일부터 4월 15일까지 3일간 필라델피아에서 개최된 제1차 한인연합회의에 참석하였고, 4월 16일에는 서재필의 주도로 열린 ‘한인자유대회’에 참석하였다.
박사학위를 받은 1925년에 귀국하여 연희전문학교 교수로 있으면서 독립운동에 투신하게 되었다. 기독교여자청년회(YWCA) 이사와 비밀 독립단체인 그리스도교 신우회 회원으로 활동했다. 같은해 이루어진 신간회의 창립에 참가하여 재정부장·총무부장 등을 지냈다. 1929년에는 광주학생운동 탄압을 규탄하는 민중대회를 열어 광주학생운동의 배후조종 혐의로 한용운 등과 함께 3년형을 언도받고 감옥에 수감되었다.
조병옥은 미국 체류 중 안창호와 교류하게 되면서 깊은 영향을 받게 되었고, 기호지역인 충청도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서북파가 주도하던 흥사단·수양동우회의 활동에도 참여하게 되었다. 귀국 후 윤치호를 만나기도 했지만 안창호의 강력한 영항아래 있던 이광수를 찾아가 함께 흥사단과 수양동우회의 국내 지부 결성을 추진했다. 1937년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수감되어 2년을 복역하였다.
한편 1932년 조만식 등 서북 출신들이 경영난에 빠진 조선일보사 경영을 담당하게 되자 전무라는 직위로 함께 참여하였고, 보인광업회사라는 광산회사를 운영하기도 했다.
해방 후 한국민주당 창당에 참가하였고 미군정청 경무부장으로 취임하여 1948년까지 재직하면서 수도청장이던 장택상과 함께 경찰력을 장악하게 되었다. 미군정기 가장 중요했던 물리력인 경찰력을 장악함으로써 좌익 탄압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애초 조병옥은 안창호를 지지하였으나 그가 사망하고 해방이 된 후에는 이승만을 지지하게 되었다. 경무부장으로서 그는 이승만의 정치활동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에는 그해 12월에 파리에서 열린 제3차 국제연합 총회에 한국 대표단 일원으로 참가하였다. 이듬해인 1949년 제4차 국제연합 총회에서 단장으로 참가하였다.
정부 수립 후 이승만과 한민당이 결별하게 되면서 조병옥도 이승만과 멀어지게 되었다. 그 결과 1949년 2월 10일 한국민주당과 대한국민당의 신익희·지청천 계열이 통합하여 민주국민당을 창당할 때 참여하였다. 그러나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다시 이승만의 부름으로 내무장관에 임명되어 대구 방어에 공을 세우기도 하였다. 그렇지만 다시 1951년 5월 거창 민간인 학살사건의 책임을 지고 사퇴하게 되었다.
1954년 5월 대구에서 제3대 민의원 선거에 입후보, 출마하여 당선되었고 범야 신당 창당 준비조직인 호헌동지회 창설에 참여하였을 때에는 곽상훈·김도연·김준연·장면·박순천 등과 함께 조봉암의 신당 참여에 반대하였다. 결국 조봉암이 배제된 채 1955년 민주당은 결성되었고, 조병옥이 이에 참여하면서 1956년 신익희의 급서로 대표 최고위원으로 추대되었다.
이후 민주당 내 신파와 구파 간 분쟁이 가시화되면서 조병옥은 구파의 리더로 활약하게 되었다. 1959년 11월 26일 민주당 정·부통령 선거 지명대회 표결 결과 조병옥은 불과 세 표 차이로 승리하여 대통령 후보가 되었다. 조병옥은 대통령 후보등록까지 마쳤지만 갑자기 발병하자 도미하여 미국 월터리드 육군병원에 입원하였다. 그리고 입원한 지 23일 만에, 선거를 불과 한 달여 남겨두고 심장마비로 사망하였다. 그의 장례는 1960년 2월 25일 국민장으로 치러졌다.
1962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1894년 충청남도 목천(지금의 천안)에서 출생하여 한학을 수학하고 케블 목사의 추천으로 공주 영명학교에 편입하여 졸업하였다. 이후 영명중학을 거쳐 1909년 평양 숭실중학교로 편입하였다. 졸업 후 상경해 연희전문학교에 입학하였으며 1914년에 졸업하였다. 평양 숭실중학교 재학시 미국 유학 후 귀국한 이승만과 김규식·신흥우·백상규 등의 영향으로 유학을 결심하게 되었다. 그래서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1918년 펜실바니아주 와이오밍 고교를 졸업하고 컬럼비아 대학에서 학사학위를 받은 다음 동 대학교 대학원에 진학하였다. 1925년 『조선의 토지제도』라는 제목의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유학 중인 1919년 3·1운동의 여파로 북미 지역의 독립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자 조병옥도 이에 열성적으로 참여하였다. 1919년 4월 13일부터 4월 15일까지 3일간 필라델피아에서 개최된 제1차 한인연합회의에 참석하였고, 4월 16일에는 서재필의 주도로 열린 ‘한인자유대회’에 참석하였다.
박사학위를 받은 1925년에 귀국하여 연희전문학교 교수로 있으면서 독립운동에 투신하게 되었다. 기독교여자청년회(YWCA) 이사와 비밀 독립단체인 그리스도교 신우회 회원으로 활동했다. 같은해 이루어진 신간회의 창립에 참가하여 재정부장·총무부장 등을 지냈다. 1929년에는 광주학생운동 탄압을 규탄하는 민중대회를 열어 광주학생운동의 배후조종 혐의로 한용운 등과 함께 3년형을 언도받고 감옥에 수감되었다.
조병옥은 미국 체류 중 안창호와 교류하게 되면서 깊은 영향을 받게 되었고, 기호지역인 충청도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서북파가 주도하던 흥사단·수양동우회의 활동에도 참여하게 되었다. 귀국 후 윤치호를 만나기도 했지만 안창호의 강력한 영항아래 있던 이광수를 찾아가 함께 흥사단과 수양동우회의 국내 지부 결성을 추진했다. 1937년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수감되어 2년을 복역하였다.
한편 1932년 조만식 등 서북 출신들이 경영난에 빠진 조선일보사 경영을 담당하게 되자 전무라는 직위로 함께 참여하였고, 보인광업회사라는 광산회사를 운영하기도 했다.
해방 후 한국민주당 창당에 참가하였고 미군정청 경무부장으로 취임하여 1948년까지 재직하면서 수도청장이던 장택상과 함께 경찰력을 장악하게 되었다. 미군정기 가장 중요했던 물리력인 경찰력을 장악함으로써 좌익 탄압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애초 조병옥은 안창호를 지지하였으나 그가 사망하고 해방이 된 후에는 이승만을 지지하게 되었다. 경무부장으로서 그는 이승만의 정치활동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에는 그해 12월에 파리에서 열린 제3차 국제연합 총회에 한국 대표단 일원으로 참가하였다. 이듬해인 1949년 제4차 국제연합 총회에서 단장으로 참가하였다.
정부 수립 후 이승만과 한민당이 결별하게 되면서 조병옥도 이승만과 멀어지게 되었다. 그 결과 1949년 2월 10일 한국민주당과 대한국민당의 신익희·지청천 계열이 통합하여 민주국민당을 창당할 때 참여하였다. 그러나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다시 이승만의 부름으로 내무장관에 임명되어 대구 방어에 공을 세우기도 하였다. 그렇지만 다시 1951년 5월 거창 민간인 학살사건의 책임을 지고 사퇴하게 되었다.
1954년 5월 대구에서 제3대 민의원 선거에 입후보, 출마하여 당선되었고 범야 신당 창당 준비조직인 호헌동지회 창설에 참여하였을 때에는 곽상훈·김도연·김준연·장면·박순천 등과 함께 조봉암의 신당 참여에 반대하였다. 결국 조봉암이 배제된 채 1955년 민주당은 결성되었고, 조병옥이 이에 참여하면서 1956년 신익희의 급서로 대표 최고위원으로 추대되었다.
이후 민주당 내 신파와 구파 간 분쟁이 가시화되면서 조병옥은 구파의 리더로 활약하게 되었다. 1959년 11월 26일 민주당 정·부통령 선거 지명대회 표결 결과 조병옥은 불과 세 표 차이로 승리하여 대통령 후보가 되었다. 조병옥은 대통령 후보등록까지 마쳤지만 갑자기 발병하자 도미하여 미국 월터리드 육군병원에 입원하였다. 그리고 입원한 지 23일 만에, 선거를 불과 한 달여 남겨두고 심장마비로 사망하였다. 그의 장례는 1960년 2월 25일 국민장으로 치러졌다.
1962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