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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곡 정지화 南谷 鄭知和Jung JiHwa
1613 ~ 1688
조선
작가약력
- 1613(광해군 5)∼1688(숙종 14). 조선 후기의 문신.
작가 소개
본관은 동래(東萊). 자는 예경(禮卿), 호는 남곡(南谷). 영의정 광필(光弼)의 5대 손이며, 유길(惟吉)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창연(昌衍)이고, 아버지는 이조참판 광경(廣敬)이다. 어머니는 돈녕부도정 민유경(閔有慶)의 딸이다. 영의정 태화(太和)와 좌의정 치화(致和)와는 4촌간이다.
이정남(李井男)의 딸과 결혼했으나, 아들을 두지 못해 형 지화(至和)의 셋째아들 재희(載禧)를 양자로 들였는데, 재희는 예조판서에 올랐다.
1633년(인조 11) 사마시에 합격하고, 이어 1637년 제릉참봉(齊陵參奉)으로 있으면서 정시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홍문관 부수찬에 임용되었다. 이듬해허적(許積) 등과 함께 홍문록(弘文錄)에 올랐다.
다음해 사간원정언을 거쳐 세자시강원사서(世子侍講院司書)가 되어 심양(瀋陽)에 가는 세자를 모셨다. 1640년 세자의 정조(正朝) 문안을 겸해서 귀국한 뒤, 홍문관수찬·교리·응교, 이조정랑, 의정부사인, 사헌부집의 등의 청요직을 지내다가 1649년 초 원주목사로 나갔다. 그러나 효종이 즉위하자마자 곧 세자시강원보덕에 임명되어 8개월 만에 다시 조정에 들어왔다.
그리고 이듬해에는 진주사(陳奏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청나라에 가서 세폐(歲幣)를 삭감하는 데 성공하고 돌아왔다. 그 뒤 병조참의가 되어 당상관에 올랐고, 이어 승지·대사간 등을 거쳤다. 한편, 외직으로 전라도·함경도·평안도의 관찰사를 지내다가 1664년(현종 5) 형조판서에 올랐다.
1674년 좌의정이 되기까지 각 조의 판서와 대사헌을 거듭 역임하면서, 1666년과 1667년 두 차례나 동지사(冬至使)로 청나라 연경(燕京)에 다녀왔다. 그러나 예조판서로 있던 1673년영릉(寧陵)의 봉심(奉審)을 잘못한 죄로 관작을 삭탈당하고 한성 문밖으로 출송(黜送)되기도 하였다.
약 1년 간 시골에서 지내다가 현종이 죽기 몇 달 전에 좌의정으로 기용되었으나, 곧 신병을 칭하여 중추부판사로 물러앉았다. 현종의 죽음과 더불어 다시 복상문제가 일어나(제2차 禮訟) 송시열(宋時烈)을 비롯한 서인들이 모두 화를 입게 되었기 때문이다.
태화·치화 등 친족들과 함께 서인이면서도 항상 중도적 입장을 취하여 남인들의 극단적인 처벌론을 무마하면서 그 스스로 화를 면했을 뿐 아니라, 많은 서인들을 죽음의 처지로부터 구해내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그 뒤, 1680년(숙종 6)에 다시 좌의정이 되어 한동안 정계에서 활약하기도 했지만, 대부분의 세월을 중추부의 판사나 영사로 지내면서 한가히 보내다가 76세로 죽었다.
사신(史臣)은 그의 졸기에서 “본성이 성색(聲色)과 사죽(絲竹)을 즐겨 분대(粉黛:곱게 화장한 여인)가 그 옆을 떠나지 않았고, 연희(宴嬉)에 빠져서 공무를 돌보지 않았으니, 여러 경상(卿相)의 자리를 지냈어도 이룩한 바가 없다.”고 비방하면서도, 한편으로 “간당(奸黨)이 정권을 잡으면 곧 관직을 내놓고 집에 들어앉았고, 제2차 예송 때는 송시열을 죽음에서 구하는 데 크게 힘썼다.”고 칭송하기도 하였다.
이정남(李井男)의 딸과 결혼했으나, 아들을 두지 못해 형 지화(至和)의 셋째아들 재희(載禧)를 양자로 들였는데, 재희는 예조판서에 올랐다.
1633년(인조 11) 사마시에 합격하고, 이어 1637년 제릉참봉(齊陵參奉)으로 있으면서 정시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홍문관 부수찬에 임용되었다. 이듬해허적(許積) 등과 함께 홍문록(弘文錄)에 올랐다.
다음해 사간원정언을 거쳐 세자시강원사서(世子侍講院司書)가 되어 심양(瀋陽)에 가는 세자를 모셨다. 1640년 세자의 정조(正朝) 문안을 겸해서 귀국한 뒤, 홍문관수찬·교리·응교, 이조정랑, 의정부사인, 사헌부집의 등의 청요직을 지내다가 1649년 초 원주목사로 나갔다. 그러나 효종이 즉위하자마자 곧 세자시강원보덕에 임명되어 8개월 만에 다시 조정에 들어왔다.
그리고 이듬해에는 진주사(陳奏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청나라에 가서 세폐(歲幣)를 삭감하는 데 성공하고 돌아왔다. 그 뒤 병조참의가 되어 당상관에 올랐고, 이어 승지·대사간 등을 거쳤다. 한편, 외직으로 전라도·함경도·평안도의 관찰사를 지내다가 1664년(현종 5) 형조판서에 올랐다.
1674년 좌의정이 되기까지 각 조의 판서와 대사헌을 거듭 역임하면서, 1666년과 1667년 두 차례나 동지사(冬至使)로 청나라 연경(燕京)에 다녀왔다. 그러나 예조판서로 있던 1673년영릉(寧陵)의 봉심(奉審)을 잘못한 죄로 관작을 삭탈당하고 한성 문밖으로 출송(黜送)되기도 하였다.
약 1년 간 시골에서 지내다가 현종이 죽기 몇 달 전에 좌의정으로 기용되었으나, 곧 신병을 칭하여 중추부판사로 물러앉았다. 현종의 죽음과 더불어 다시 복상문제가 일어나(제2차 禮訟) 송시열(宋時烈)을 비롯한 서인들이 모두 화를 입게 되었기 때문이다.
태화·치화 등 친족들과 함께 서인이면서도 항상 중도적 입장을 취하여 남인들의 극단적인 처벌론을 무마하면서 그 스스로 화를 면했을 뿐 아니라, 많은 서인들을 죽음의 처지로부터 구해내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그 뒤, 1680년(숙종 6)에 다시 좌의정이 되어 한동안 정계에서 활약하기도 했지만, 대부분의 세월을 중추부의 판사나 영사로 지내면서 한가히 보내다가 76세로 죽었다.
사신(史臣)은 그의 졸기에서 “본성이 성색(聲色)과 사죽(絲竹)을 즐겨 분대(粉黛:곱게 화장한 여인)가 그 옆을 떠나지 않았고, 연희(宴嬉)에 빠져서 공무를 돌보지 않았으니, 여러 경상(卿相)의 자리를 지냈어도 이룩한 바가 없다.”고 비방하면서도, 한편으로 “간당(奸黨)이 정권을 잡으면 곧 관직을 내놓고 집에 들어앉았고, 제2차 예송 때는 송시열을 죽음에서 구하는 데 크게 힘썼다.”고 칭송하기도 하였다.
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