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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 대왕 正祖 大王Great King JeongJo
1752 ~ 1800
조선
작가약력
- 1752(영조 28)∼1800(정조 24). 조선 제22대 왕(재위 1776∼1800).
작가 소개
이름은 이산(李祘). 자는 형운(亨運), 호는 홍재(弘齋). 영조의 둘째아들인 장헌세자(莊獻世子, 일명 思悼世子)와 혜경궁 홍씨(惠慶宮洪氏) 사이에서 맏아들로 태어났으며, 비(妃)는 청원부원군(淸原府院君)김시묵(金時默)의 딸 효의왕후(孝懿王后)이다. 1759년(영조 35) 세손(世孫)에 책봉, 1762년 아버지가 원통하게 죽은 뒤 효장세자(孝章世子 : 진종(眞宗))의 후사(後嗣)가 되었고, 1775년 늙은 영조를 대신하여 국정(國政)을 다스렸으며, 이듬해 영조가 죽자 즉위했다. 영조 말년 이래 집권하여 오던 벽파(僻派) 일당이 그를 옹호해왔던 시파(時派)를 탄핵하자 이들 벽파를 추방 했고, 이어 모역(謀逆)하다 발각된 홍상간(洪相簡)ㆍ정후겸(鄭厚謙)ㆍ윤양로(尹養老) 등을 주살(誅殺). 유배하는 한편, 즉위 이듬해 그를 시해(弑害)하고 은전군(恩全君) 찬(禶)을 추대하려다 발각된 홍상범(洪相範) 일당을 주살하는 등 끈질긴 벽파의 음모로 그의 지위까지도 위협당했으나, 홍국영(洪國榮)을 중용(重用)하여 아버지 장헌세자를 죽이게 한 벽파 일당의 음모를 분쇄케 했다. 그러나 홍국영이 그의 총애를 빙자하여 횡포를 자행하고 세력 유지를 위해 왕통(王統)을 바꾸려 획책하자, 1780년 그를 전리(田里)에 방축(放逐) 함으로써 홍씨 세도 정권(洪氏勢道政權)을 무너뜨렸다. 이후 영조의 뜻을 이어 탕평책(蕩平策)으로 일관하였고, 숙종 이후 실각했던 남인(南人)을 등용하고 서북인(西北人)을 채용, 한편 서인(庶人)도 기용했고 1791년에는 신해사옥(辛亥邪獄)을 일으켜 천주교를 탄압했으나, 천주교 교세는 날로 확장되었다.
규장각(奎章閣)을 설치하여 역대 서적을 보관하고 세손 때부터 활자(活字)에 관심이 깊어 임진자(壬辰字)ㆍ정유자(丁酉字)ㆍ한구자(韓構字)ㆍ생생자(生生字)ㆍ정리자(整理字)ㆍ춘추관자(春秋館字) 등을 새로 만들어 인쇄술의 발달을 기하는 한편, 서적 편찬에도 힘을 기울여 《증보동국문헌비교(增補東國文獻備考)》ㆍ《국조보감(國朝寶鑑)》ㆍ《대전통편(大典通編)》ㆍ《문원보불(文苑輔黻)》ㆍ《동문휘고(同文彙考)》ㆍ《규장전운(奎章全韻)》ㆍ《오륜행실(五倫行實)》 등을 간행하게 했고, 자신의 문집 《홍재전서(弘齋全書)》도 완성했다. 특히 남인 학자를 우대하여 주자학(朱子學)의 공리 공론적인 학풍을 배격하고 실사 구시(實事求是)와 이용 후생(利用厚生)을 목표로 하는 실학(實學)이 크게 발전하는 등 조선 후기의 문화적 황금 시대를 이룩했다. 제도 개편에도 힘써 형정(刑政)을 개혁, 악형을 금지시켰고, 백성의 부담을 덜기 위해 궁차 징세법(宮差徵稅法)을 폐지, 한편 빈민의 구제를 위해 자휼전칙(字恤典則)을 반포했다. 능은 건릉(健陵 : 수원 水原).
규장각(奎章閣)을 설치하여 역대 서적을 보관하고 세손 때부터 활자(活字)에 관심이 깊어 임진자(壬辰字)ㆍ정유자(丁酉字)ㆍ한구자(韓構字)ㆍ생생자(生生字)ㆍ정리자(整理字)ㆍ춘추관자(春秋館字) 등을 새로 만들어 인쇄술의 발달을 기하는 한편, 서적 편찬에도 힘을 기울여 《증보동국문헌비교(增補東國文獻備考)》ㆍ《국조보감(國朝寶鑑)》ㆍ《대전통편(大典通編)》ㆍ《문원보불(文苑輔黻)》ㆍ《동문휘고(同文彙考)》ㆍ《규장전운(奎章全韻)》ㆍ《오륜행실(五倫行實)》 등을 간행하게 했고, 자신의 문집 《홍재전서(弘齋全書)》도 완성했다. 특히 남인 학자를 우대하여 주자학(朱子學)의 공리 공론적인 학풍을 배격하고 실사 구시(實事求是)와 이용 후생(利用厚生)을 목표로 하는 실학(實學)이 크게 발전하는 등 조선 후기의 문화적 황금 시대를 이룩했다. 제도 개편에도 힘써 형정(刑政)을 개혁, 악형을 금지시켰고, 백성의 부담을 덜기 위해 궁차 징세법(宮差徵稅法)을 폐지, 한편 빈민의 구제를 위해 자휼전칙(字恤典則)을 반포했다. 능은 건릉(健陵 : 수원 水原).
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시사상식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