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검색
- Service
- 작가검색
위당 정인보 爲堂 鄭寅普Jung InBoh
1893 ~ 1950
근대
작가약력
- 1893(고종 30)∼1950년. 한학자·교육자·역사가.
작가 소개
본관은 동래(東萊). 유명(幼名)은 경시(景施). 자는 경업(經業), 호는 담원(薝園)·미소산인(薇蘇山人). 아호는 위당(爲堂). 서울 출신. 조선 명종대의 대제학 유길(惟吉)의 후손으로, 철종대의 영상 원용(元容)의 증손인 장례원부경(掌禮院副卿)·호조참판을 역임한 은조(誾朝)의 아들이다.
어려서 아버지로부터 한문을 배웠고, 13세 때부터 이건방(李建芳)을 사사하였다. 그의 문명은 이미 10대 때부터 널리 알려졌다. 을사조약이 체결되어 국가의 주권이 손상받고 이에 대한 국권회복투쟁이 활발히 전개되며 세상이 시끄러워지던 한말, 관계의 뜻을 버리고 부모와 더불어 진천(鎭川)·목천(木川) 등지에 은거하며 학문에 전념하였다.
1910년 일제가 무력으로 한반도를 강점하여 조선조가 종언을 고하자 중국 상해(上海)로 망명, 국제 정세를 살폈다. 얼마 후 귀국하였다가 1912년 다시 상해로 건너가 신채호(申采浩)·박은식(朴殷植)·신규식(申圭植)·김규식(金奎植) 등과 함께 동제사(同濟社)를 조직, 교포의 정치적·문화적 계몽활동을 주도하며 광복운동에 종사하였다.
그러나 부인 성씨(成氏)의 갑작스러운 죽음과 노모의 비애를 위로하고자 귀국하였다. 귀국 후 국내에서 비밀리에 독립운동을 펴다 여러 차례 일본 경찰에 붙잡혀 옥고를 치렀다. 서울로 이사한 뒤 연희전문학교·협성학교(協成學校)·불교중앙학림(佛敎中央學林) 등에서 한학과 역사학을 강의하였다.
후배들을 가르쳐 민족의 역량을 키우는 교수 생활에 힘쓰는 한편, 『동아일보』·『시대일보』의 논설위원으로 민족의 정기를 고무하는 논설을 펴며 민족계몽운동을 주도하였다. 1926년 순종이 죽었을 때는 유릉지문(裕陵誌文) 찬술의 일을 맡아보았다. 다음 해 불교전문학교·이화여자전문학교에도 출강하였다.
1931년에는 민족문화의 유산인 고전을 민족사회에 알리고자 다수의 고전을 소개하는 「조선고전해제」를 『동아일보』에 연재하였다. 1935년 조선 후기 실학 집대성자인 정약용(丁若鏞) 사후 100주년을 맞아 조선 후기의 실학을 소개하기 위한 학문행사를 주도, 실학연구를 주도하였다. 실학이라는 역사적 용어는 이때부터 사용되었다.
한편, 이 무렵부터 조선 양명학에 관심을 가지고 일련의 양명학자들의 학문을 추적하였고, 1933년 66회에 걸쳐 『동아일보』에 「양명학연론(陽明學演論)」을 연재해 많은 호응을 얻었다.
양명학이나 실학에 대한 학문적 관심으로 볼 때, 단순한 한학자가 아니라 성리학과 더불어 유학의 또 다른 유파(流派)나 성리학 내에 자생적으로 일어선 새로운 실(實)의 유학풍을 밝혀, 조선 유학의 폭넓은 이해를 시도해 보고자 하는 진취적 학풍을 가진 학문활동으로 이해된다.
1936년 연희전문학교 교수가 되어 한문학·국사학·국문학 등 국학 전반에 걸친 강좌를 담당하였다. 그러나 태평양전쟁이 일어난 뒤 국학에 대한 일제의 탄압이 거세지자 1943년 가솔을 이끌고 전라북도 익산군 황화면 중기리 산중에 은거하였다.
광복이 되자 곧 서울로 상경, 일제의 포악한 민족말살정책으로 가려졌던 국학을 일으켜 세우고 교육에 힘을 쏟아 민족사를 모르는 국민에게 바른 국사를 알리고자 1946년 9월 『조선사연구(朝鮮史硏究)』를 간행하였다.
그의 역사의식은 신채호의 민족주의 사학의 전통을 잇는 것이기는 하나 독립투쟁의 방도로서 민족사 연구를 지향하던 신채호의 민족사학과 달리, 엄밀한 사료적 추적에 의한 사실 인식과 그에 대한 민족사적 의미의 부각을 의도하는 신민족주의 사학의 입장에 서는 것이었다.
1947년 국학의 최고학부를 표방하고 설립된 국학대학(國學大學) 학장에 취임, 일제의 광폭한 식민정책으로 일시 단절된 듯하던 국학을 일으켜 세우고, 발전시키려는 새로운 각오로 다시금 육영사업에 투신하였다. 1948년 대한민국이 수립되자 초대 대통령인 이승만(李承晩)의 간곡한 청으로 신생 조국의 관기(官紀)와 사정(司正)의 중책을 지닌 감찰위원장이 되었다.
그러나 1년 후 정부의 간섭으로 의지를 펼 수 없다고 판단, 미련없이 자리를 사임하였다. 이후 한때나마 학문과 교육을 떠났던 심정을 달래고자 남산동에 은거하며 오로지 국학연구에 몰두하였다. 1950년 6·25가 일어났던 그 해 7월 31일 서울에서 공산군에 의해 납북되었다. 시문·사장(詞章)의 대가로 광복 후 전조선문필가협회의 회장으로 선출되기도 하였으며, 서예에 있어서도 일가를 이루었고, 인각(印刻)에도 능하였다.
30여 년을 두고 대학 강단에서 국고(國故)·절의(節義)·실학·양명학과 역사학으로 후학들을 지도하였고, 국혼(國魂)·경세(警世)·효민(曉民)의 학덕이 높았던 학자이며 교육자였다. 저서로는 『조선사연구』와 『양명학연론』이 있고, 시문과 국학 논고의 글은 『담원시조집(薝園時調集)』·『담원문록(薝園文錄)』·『담원국학산고(薝園國學散藁)』에 수록되어 있다.
1990년 건국훈장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어려서 아버지로부터 한문을 배웠고, 13세 때부터 이건방(李建芳)을 사사하였다. 그의 문명은 이미 10대 때부터 널리 알려졌다. 을사조약이 체결되어 국가의 주권이 손상받고 이에 대한 국권회복투쟁이 활발히 전개되며 세상이 시끄러워지던 한말, 관계의 뜻을 버리고 부모와 더불어 진천(鎭川)·목천(木川) 등지에 은거하며 학문에 전념하였다.
1910년 일제가 무력으로 한반도를 강점하여 조선조가 종언을 고하자 중국 상해(上海)로 망명, 국제 정세를 살폈다. 얼마 후 귀국하였다가 1912년 다시 상해로 건너가 신채호(申采浩)·박은식(朴殷植)·신규식(申圭植)·김규식(金奎植) 등과 함께 동제사(同濟社)를 조직, 교포의 정치적·문화적 계몽활동을 주도하며 광복운동에 종사하였다.
그러나 부인 성씨(成氏)의 갑작스러운 죽음과 노모의 비애를 위로하고자 귀국하였다. 귀국 후 국내에서 비밀리에 독립운동을 펴다 여러 차례 일본 경찰에 붙잡혀 옥고를 치렀다. 서울로 이사한 뒤 연희전문학교·협성학교(協成學校)·불교중앙학림(佛敎中央學林) 등에서 한학과 역사학을 강의하였다.
후배들을 가르쳐 민족의 역량을 키우는 교수 생활에 힘쓰는 한편, 『동아일보』·『시대일보』의 논설위원으로 민족의 정기를 고무하는 논설을 펴며 민족계몽운동을 주도하였다. 1926년 순종이 죽었을 때는 유릉지문(裕陵誌文) 찬술의 일을 맡아보았다. 다음 해 불교전문학교·이화여자전문학교에도 출강하였다.
1931년에는 민족문화의 유산인 고전을 민족사회에 알리고자 다수의 고전을 소개하는 「조선고전해제」를 『동아일보』에 연재하였다. 1935년 조선 후기 실학 집대성자인 정약용(丁若鏞) 사후 100주년을 맞아 조선 후기의 실학을 소개하기 위한 학문행사를 주도, 실학연구를 주도하였다. 실학이라는 역사적 용어는 이때부터 사용되었다.
한편, 이 무렵부터 조선 양명학에 관심을 가지고 일련의 양명학자들의 학문을 추적하였고, 1933년 66회에 걸쳐 『동아일보』에 「양명학연론(陽明學演論)」을 연재해 많은 호응을 얻었다.
양명학이나 실학에 대한 학문적 관심으로 볼 때, 단순한 한학자가 아니라 성리학과 더불어 유학의 또 다른 유파(流派)나 성리학 내에 자생적으로 일어선 새로운 실(實)의 유학풍을 밝혀, 조선 유학의 폭넓은 이해를 시도해 보고자 하는 진취적 학풍을 가진 학문활동으로 이해된다.
1936년 연희전문학교 교수가 되어 한문학·국사학·국문학 등 국학 전반에 걸친 강좌를 담당하였다. 그러나 태평양전쟁이 일어난 뒤 국학에 대한 일제의 탄압이 거세지자 1943년 가솔을 이끌고 전라북도 익산군 황화면 중기리 산중에 은거하였다.
광복이 되자 곧 서울로 상경, 일제의 포악한 민족말살정책으로 가려졌던 국학을 일으켜 세우고 교육에 힘을 쏟아 민족사를 모르는 국민에게 바른 국사를 알리고자 1946년 9월 『조선사연구(朝鮮史硏究)』를 간행하였다.
그의 역사의식은 신채호의 민족주의 사학의 전통을 잇는 것이기는 하나 독립투쟁의 방도로서 민족사 연구를 지향하던 신채호의 민족사학과 달리, 엄밀한 사료적 추적에 의한 사실 인식과 그에 대한 민족사적 의미의 부각을 의도하는 신민족주의 사학의 입장에 서는 것이었다.
1947년 국학의 최고학부를 표방하고 설립된 국학대학(國學大學) 학장에 취임, 일제의 광폭한 식민정책으로 일시 단절된 듯하던 국학을 일으켜 세우고, 발전시키려는 새로운 각오로 다시금 육영사업에 투신하였다. 1948년 대한민국이 수립되자 초대 대통령인 이승만(李承晩)의 간곡한 청으로 신생 조국의 관기(官紀)와 사정(司正)의 중책을 지닌 감찰위원장이 되었다.
그러나 1년 후 정부의 간섭으로 의지를 펼 수 없다고 판단, 미련없이 자리를 사임하였다. 이후 한때나마 학문과 교육을 떠났던 심정을 달래고자 남산동에 은거하며 오로지 국학연구에 몰두하였다. 1950년 6·25가 일어났던 그 해 7월 31일 서울에서 공산군에 의해 납북되었다. 시문·사장(詞章)의 대가로 광복 후 전조선문필가협회의 회장으로 선출되기도 하였으며, 서예에 있어서도 일가를 이루었고, 인각(印刻)에도 능하였다.
30여 년을 두고 대학 강단에서 국고(國故)·절의(節義)·실학·양명학과 역사학으로 후학들을 지도하였고, 국혼(國魂)·경세(警世)·효민(曉民)의 학덕이 높았던 학자이며 교육자였다. 저서로는 『조선사연구』와 『양명학연론』이 있고, 시문과 국학 논고의 글은 『담원시조집(薝園時調集)』·『담원문록(薝園文錄)』·『담원국학산고(薝園國學散藁)』에 수록되어 있다.
1990년 건국훈장독립장이 추서되었다.
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