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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재 전우 艮齋 田愚Jeon Woo
1841 ~ 1922
조선
작가약력
- 1841(헌종 7)∼1922. 조선 말기의 학자.
작가 소개
전라북도 전주 출신. 본관은 담양(潭陽). 초명은 경륜(慶倫)·경길(慶佶). 자는 자명(子明), 호는 구산(臼山)·추담(秋潭)·간재(艮齋). 아버지는 재성(在聖)이다. 임헌회(任憲晦)의 문인이다.
1882년(고종 19) 선공감가감역(繕工監假監役)·선공감감역·전설사별제(典設司別提)·강원도도사, 1894년 사헌부장령, 이듬해 순흥부사·중추원찬의(中樞院贊議)를 제수받았으나 모두 나아가지 않았다. 그의 명성이 널리 알려지자 1895년 박영효(朴泳孝) 등이 수구(守舊) 학자의 우두머리로 지목하여 개화를 실현시키려면 그를 죽여야 한다고 여러 번 청했으나 고종의 승낙을 얻지 못하였다.
1908년(순종 2) 나라가 어지러워지자 왕등도(暀嶝島)·군산도(群山島) 등으로 들어가 나라는 망하더라도 도학(道學)을 일으켜 국권을 회복하겠다고 결심하였으며, 부안·군산 등의 앞 바다에 있는 작은 섬을 옮겨 다니며 학문에 전념하였다. 1912년 계화도(界火島)에 정착하여 계화도(繼華島: 중화를 잇는다는 뜻)라 부르면서 세상을 떠날 때까지 저술과 제자 양성에 힘썼다.
그의 학문은 스승인 임헌회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임헌회는 홍직필(洪直弼)의 문인으로서, 홍직필이 이재(李縡)의 문인에게서 학문을 닦았으므로, 자연히 인성(人性)과 물성(物性)이 같다는 견해를 가졌다. 그리하여 이들은 이른바 낙론(洛論) 계열의 학자라 불린다. 그는 이와 같은 사상의 영향을 받아 인성과 물성이 다르다고 주장하는 한원진(韓元震)과는 의견을 달리하였다.
그는 의리정신을 숭상하고자 조선조의 조광조(趙光祖)·이황(李滉)·이이(李珥)·김장생(金長生)·송시열(宋時烈)을 동방의 오현(五賢)이라고 칭하였다. 그리고 이들의 문집 가운데서 좋은 말을 뽑아 『근사록(近思錄)』의 체재를 모방하여 『오현수언(五賢粹言)』을 만들었다.
그는 자신의 생각과 조금이라도 의견을 달리하는 점이 있으면 주저하지 않고 그 잘못을 지적하며 자기의 성리학설을 세웠다. 그리하여 그는 김창협(金昌協)에게서 사상적인 영향을 받았지만, 『농암사칠의의(農巖四七疑義)』를 지어서 그 불합리함을 지적했고, 기정진(奇正鎭)의 「외필(猥筆)」을 반박하는 「외필변(猥筆辨)」을 썼다. 또한 이항로(李恒老)에게는 「화서아언의의(華西雅言疑義)」로 반박하였고, 이진상(李震相)에게는 「이씨심설조변(李氏心說條辨)」으로 반박하였다.
그는 오직 이이와 송시열의 사상을 계승하는 데 힘썼으며, 나름대로 성리학적 경지를 창안하여 심본성설(心本性說)을 주제로 성존심비(性尊心卑) 또는 성사심제(性師心弟)의 설을 주장하였다. 이는 주희(朱熹)가 인간의 도덕적 의지와 작용을 설명하면서 성을 가장 근본적인 것으로 여겼다는 점에서 착안한 것이며, 그는 이러한 창안이 주희의 학설을 올바로 이해한 것이라 생각하였다.
주희는 모든 도덕적 의지는 성(性)에 근본하고 성은 천리(天理)라고 말하였기 때문에 천리인 성은 당연히 높고 마음은 낮은 것이라 하였다. 전우는 “주자가 말하기를 성은 태극이라 하였고 심(心)은 음양이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하늘과 태극은 마땅히 높은 것이고 심과 음양은 마땅히 낮은 것이다.”라 했고, 또 “이를 미루어 보면 성은 스승이고 심은 제자라는 것은 주희의 설에 바탕을 두기는 했으나 내가 새로 창시한 것이니 의리가 지극히 정미한 것이며 절실한 공부이며 이것이 스스로 만든 심제(心弟) 두 글자다.”라고 하였다.
그는 심성론(心性論)에 있어서도 성은 천리이며 심은 기(氣)라고 주장함으로써 ‘심즉이(心卽理)’에 반대하였다. 이와 같은 견해는 송시열의 학설을 이어받은 것으로 보인다.
이기(理氣)에 대해서는 「이기유위무위변(理氣有爲無爲辨)」에서 태극은 이만 있고 동정(動靜)의 능력은 없으며 음양이 동정한다고 하였다. 또한 이를 무위(無爲), 기를 유위(有爲)한 것이라 했고, 인간에게 있어서도 성은 무위한 것이며 심은 유위한 것이라고 하였다.
심성(心性)에 대해서는 성은 천리로서 무형·무위이며 심은 유위의 기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성은 순선(純善)이므로 대본(大本)이며 심은 작용이니 성명(性命)의 도덕성에 근본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였다.
이와 같은 그의 학문적 성격과는 달리 처신에 대해서는 여러 의견이 엇갈리고 있다. 김평묵(金平默)은 “간재는 죽기가 무서워 의병을 일으키지 못했고, 화가 미칠까 두려워 외세를 배척하지 못하였다.”고 비판하였다. 그러나 전우 자신은 정통 왕권(王權)의 계승만이 국권의 회복이라 생각했고, 파리장서에 가담하지 않은 것도 이적(夷狄)을 끌어들이는 일이라고 하여, “이는 척화를 하기 위해 또 다른 외세의 간섭을 자초하는 일이니 열강의 세력을 빌려 이들에게 호소하는 일은 하지 않겠다.”라고 거절하였다.
그의 이와 같은 견해를 따로 모은 책이 『추담별집(秋潭別集)』이다. 여기에서는 “국권을 회복한다고 하면서 외세와 손잡게 되면 이는 나라를 회복하기 이전에 내 몸이 먼저 이적이 되는 것이니 이는 절대로 할 수 없는 일이다.”, “500년 종사도 중요하지만 3,000년의 도통(道統)을 잇는 것이 더 소중하니 무가치하게 목숨을 버리지 말고, 학문을 일으켜 도(道)로써 나라를 찾아야 한다.”, “을사년의 수치에도 통곡할 수밖에 없었고, 우리의 모든 선비는 마땅히 피를 토하고 눈물을 흘리며 이를 악물고 살 수밖에 없으나, 눈앞의 위태함만을 알고 나라의 참된 힘이 무엇인가를 깨닫지 못하면, 그것은 총칼 앞에 헛되이 목숨을 버리는 일일 뿐이니, 차라리 몸과 마음을 올바로 가다듬어 신명을 얻어 학문을 열심히 닦아 뜻을 편다면 1년, 2년, 10년, 20년 어느 때인가는 우리의 힘으로 이룰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와 같은 그의 견해는 도학 정신에 더욱 투철하려는 것이었다. 어떤 이는 이에 대해 “수천 년의 도학이 간재 한 몸에 달렸으니 가벼이 죽기보다 학문을 북돋우는 것이 더 큰일이다.”라고 말하기도 하였다. 또한 그는 스스로 일제의 탄압에 대해 조선 사람으로 자처하면서 전혀 일본인을 상대하지 않고 세금도 내지 않았으며, 제자 가운데 개화하는 사람은 이름을 지웠다.
이와 같은 학문적 업적에 대해 곽종석(郭鍾錫)은 그의 저서 『면우집(俛宇集)』 권111의 「홍성길(洪成吉)에게 답하는 글」에서 “나 스스로는 간옹(艮翁)에게서 평소에 그 청절(淸節)을 흠앙(欽仰)했던 것이요, 성존심비(性尊心卑)의 뜻은 모든 사람들이 미치지 못했던 바이니 간옹이야말로 나의 의혹된 바를 풀어줄 수 있는 분이다”라고 하였다.
제자로는 오진영(吳震泳)·최병심(崔秉心)·이병은(李炳殷)·송기면(宋基冕)·권순명(權純命)·유영선(柳永善)·김병준(金炳駿)·김택술(金澤述) 등을 비롯하여 3,000여 명이 있다. 저서로는 『안자편(顔子篇)』·『연원정종(淵源正宗)』·『간재집』·『간재사고(艮齋私稿)』 등이 있다.
그의 성리학 연구 업적은 높이 평가되고 있으며, 전통적인 유학사상을 그대로 실현시키려 한 점에서 조선조 최후의 정통 유학자로서 추앙받고 있다. 그러나 그의 행적에 있어서는 나라가 망해도 의병을 일으키려 하지 않고 도학군자만을 자부하고 있었고, 또한 파리장서(巴里長書)에도 참여하지 않았다며 지탄을 받기도 하였다.
그는 전통적 도학의 중흥만이 국권 회복의 길이라 여겼기에 이 정신에 투철했던 것이고, 그의 처신이 어떠했던 지간에 조선조 최후를 장식했던 성리학적 공헌은 높이 평가될 수 있다.
1882년(고종 19) 선공감가감역(繕工監假監役)·선공감감역·전설사별제(典設司別提)·강원도도사, 1894년 사헌부장령, 이듬해 순흥부사·중추원찬의(中樞院贊議)를 제수받았으나 모두 나아가지 않았다. 그의 명성이 널리 알려지자 1895년 박영효(朴泳孝) 등이 수구(守舊) 학자의 우두머리로 지목하여 개화를 실현시키려면 그를 죽여야 한다고 여러 번 청했으나 고종의 승낙을 얻지 못하였다.
1908년(순종 2) 나라가 어지러워지자 왕등도(暀嶝島)·군산도(群山島) 등으로 들어가 나라는 망하더라도 도학(道學)을 일으켜 국권을 회복하겠다고 결심하였으며, 부안·군산 등의 앞 바다에 있는 작은 섬을 옮겨 다니며 학문에 전념하였다. 1912년 계화도(界火島)에 정착하여 계화도(繼華島: 중화를 잇는다는 뜻)라 부르면서 세상을 떠날 때까지 저술과 제자 양성에 힘썼다.
그의 학문은 스승인 임헌회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임헌회는 홍직필(洪直弼)의 문인으로서, 홍직필이 이재(李縡)의 문인에게서 학문을 닦았으므로, 자연히 인성(人性)과 물성(物性)이 같다는 견해를 가졌다. 그리하여 이들은 이른바 낙론(洛論) 계열의 학자라 불린다. 그는 이와 같은 사상의 영향을 받아 인성과 물성이 다르다고 주장하는 한원진(韓元震)과는 의견을 달리하였다.
그는 의리정신을 숭상하고자 조선조의 조광조(趙光祖)·이황(李滉)·이이(李珥)·김장생(金長生)·송시열(宋時烈)을 동방의 오현(五賢)이라고 칭하였다. 그리고 이들의 문집 가운데서 좋은 말을 뽑아 『근사록(近思錄)』의 체재를 모방하여 『오현수언(五賢粹言)』을 만들었다.
그는 자신의 생각과 조금이라도 의견을 달리하는 점이 있으면 주저하지 않고 그 잘못을 지적하며 자기의 성리학설을 세웠다. 그리하여 그는 김창협(金昌協)에게서 사상적인 영향을 받았지만, 『농암사칠의의(農巖四七疑義)』를 지어서 그 불합리함을 지적했고, 기정진(奇正鎭)의 「외필(猥筆)」을 반박하는 「외필변(猥筆辨)」을 썼다. 또한 이항로(李恒老)에게는 「화서아언의의(華西雅言疑義)」로 반박하였고, 이진상(李震相)에게는 「이씨심설조변(李氏心說條辨)」으로 반박하였다.
그는 오직 이이와 송시열의 사상을 계승하는 데 힘썼으며, 나름대로 성리학적 경지를 창안하여 심본성설(心本性說)을 주제로 성존심비(性尊心卑) 또는 성사심제(性師心弟)의 설을 주장하였다. 이는 주희(朱熹)가 인간의 도덕적 의지와 작용을 설명하면서 성을 가장 근본적인 것으로 여겼다는 점에서 착안한 것이며, 그는 이러한 창안이 주희의 학설을 올바로 이해한 것이라 생각하였다.
주희는 모든 도덕적 의지는 성(性)에 근본하고 성은 천리(天理)라고 말하였기 때문에 천리인 성은 당연히 높고 마음은 낮은 것이라 하였다. 전우는 “주자가 말하기를 성은 태극이라 하였고 심(心)은 음양이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하늘과 태극은 마땅히 높은 것이고 심과 음양은 마땅히 낮은 것이다.”라 했고, 또 “이를 미루어 보면 성은 스승이고 심은 제자라는 것은 주희의 설에 바탕을 두기는 했으나 내가 새로 창시한 것이니 의리가 지극히 정미한 것이며 절실한 공부이며 이것이 스스로 만든 심제(心弟) 두 글자다.”라고 하였다.
그는 심성론(心性論)에 있어서도 성은 천리이며 심은 기(氣)라고 주장함으로써 ‘심즉이(心卽理)’에 반대하였다. 이와 같은 견해는 송시열의 학설을 이어받은 것으로 보인다.
이기(理氣)에 대해서는 「이기유위무위변(理氣有爲無爲辨)」에서 태극은 이만 있고 동정(動靜)의 능력은 없으며 음양이 동정한다고 하였다. 또한 이를 무위(無爲), 기를 유위(有爲)한 것이라 했고, 인간에게 있어서도 성은 무위한 것이며 심은 유위한 것이라고 하였다.
심성(心性)에 대해서는 성은 천리로서 무형·무위이며 심은 유위의 기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성은 순선(純善)이므로 대본(大本)이며 심은 작용이니 성명(性命)의 도덕성에 근본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였다.
이와 같은 그의 학문적 성격과는 달리 처신에 대해서는 여러 의견이 엇갈리고 있다. 김평묵(金平默)은 “간재는 죽기가 무서워 의병을 일으키지 못했고, 화가 미칠까 두려워 외세를 배척하지 못하였다.”고 비판하였다. 그러나 전우 자신은 정통 왕권(王權)의 계승만이 국권의 회복이라 생각했고, 파리장서에 가담하지 않은 것도 이적(夷狄)을 끌어들이는 일이라고 하여, “이는 척화를 하기 위해 또 다른 외세의 간섭을 자초하는 일이니 열강의 세력을 빌려 이들에게 호소하는 일은 하지 않겠다.”라고 거절하였다.
그의 이와 같은 견해를 따로 모은 책이 『추담별집(秋潭別集)』이다. 여기에서는 “국권을 회복한다고 하면서 외세와 손잡게 되면 이는 나라를 회복하기 이전에 내 몸이 먼저 이적이 되는 것이니 이는 절대로 할 수 없는 일이다.”, “500년 종사도 중요하지만 3,000년의 도통(道統)을 잇는 것이 더 소중하니 무가치하게 목숨을 버리지 말고, 학문을 일으켜 도(道)로써 나라를 찾아야 한다.”, “을사년의 수치에도 통곡할 수밖에 없었고, 우리의 모든 선비는 마땅히 피를 토하고 눈물을 흘리며 이를 악물고 살 수밖에 없으나, 눈앞의 위태함만을 알고 나라의 참된 힘이 무엇인가를 깨닫지 못하면, 그것은 총칼 앞에 헛되이 목숨을 버리는 일일 뿐이니, 차라리 몸과 마음을 올바로 가다듬어 신명을 얻어 학문을 열심히 닦아 뜻을 편다면 1년, 2년, 10년, 20년 어느 때인가는 우리의 힘으로 이룰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와 같은 그의 견해는 도학 정신에 더욱 투철하려는 것이었다. 어떤 이는 이에 대해 “수천 년의 도학이 간재 한 몸에 달렸으니 가벼이 죽기보다 학문을 북돋우는 것이 더 큰일이다.”라고 말하기도 하였다. 또한 그는 스스로 일제의 탄압에 대해 조선 사람으로 자처하면서 전혀 일본인을 상대하지 않고 세금도 내지 않았으며, 제자 가운데 개화하는 사람은 이름을 지웠다.
이와 같은 학문적 업적에 대해 곽종석(郭鍾錫)은 그의 저서 『면우집(俛宇集)』 권111의 「홍성길(洪成吉)에게 답하는 글」에서 “나 스스로는 간옹(艮翁)에게서 평소에 그 청절(淸節)을 흠앙(欽仰)했던 것이요, 성존심비(性尊心卑)의 뜻은 모든 사람들이 미치지 못했던 바이니 간옹이야말로 나의 의혹된 바를 풀어줄 수 있는 분이다”라고 하였다.
제자로는 오진영(吳震泳)·최병심(崔秉心)·이병은(李炳殷)·송기면(宋基冕)·권순명(權純命)·유영선(柳永善)·김병준(金炳駿)·김택술(金澤述) 등을 비롯하여 3,000여 명이 있다. 저서로는 『안자편(顔子篇)』·『연원정종(淵源正宗)』·『간재집』·『간재사고(艮齋私稿)』 등이 있다.
그의 성리학 연구 업적은 높이 평가되고 있으며, 전통적인 유학사상을 그대로 실현시키려 한 점에서 조선조 최후의 정통 유학자로서 추앙받고 있다. 그러나 그의 행적에 있어서는 나라가 망해도 의병을 일으키려 하지 않고 도학군자만을 자부하고 있었고, 또한 파리장서(巴里長書)에도 참여하지 않았다며 지탄을 받기도 하였다.
그는 전통적 도학의 중흥만이 국권 회복의 길이라 여겼기에 이 정신에 투철했던 것이고, 그의 처신이 어떠했던 지간에 조선조 최후를 장식했던 성리학적 공헌은 높이 평가될 수 있다.
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